무엇이든 옷이 되는 세상

테리어카

옷과 옷 이외의 것 사이에 경계가 사라진 세계를 상상해 보자.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잠든 이의 온기가 남은 침대보를 걸치고 밖으로 나선다. 어떤 사람은 공을, 또 다른 사람은 꽉 묶어둔 쓰레기봉투를 옷으로 입는다. 점심으로 먹은 라비올리 파스타는 저녁 약속을 위한 드레스가 되고, 카펫을 입은 채 잠자리에 든다. 이 엉뚱하고도 기발한 상상은 베를린 거점 브랜드 ‘테리어카Theriaca’와 디자이너 아스카 하마다의 손에서 피어올랐다. 무엇이든 옷이 되는 그녀의 세상은 어떻게 탄생했을까.

사람에게 맞지 않는 옷

아스카 하마다의 세상을 처음 발견한 건 성수동에 자리한 오래된 아트북 서점에서였다. 모양새가 무수히 다른 책들이 열을 맞춰 늘어선 와중에도, 빨간색 텍스트가 큼지막하게 쓰인 《THERIACA: Shapes and Forms: Clothes, The Body》가 가장 먼저 보였다. 글자처럼 새빨간 양말을 신은 모델이 몸을 구부린 채 원피스를 공처럼 붙잡은 표지도 손을 뻗었던 이유 중 하나. 책장을 넘겨 보니, 같은 사진 위로 ‘배구공Volleyball’이 적혀 있다. 또 다음 장을 넘겨볼까. 구멍이 숭숭 뚫린 원피스를 입은 사진 위로 ‘치즈Cheese’가, 가로와 세로가 직조되어 늘어진 회색 옷 위로는 ‘사다리Ladder’가 적혀 있다. 이어지는 챕터에서는 침대보라 부르는 한 장의 천으로 코트를 만들거나 애벌레, 열쇠 구멍, 플러스 기호 모양의 옷감이 누군가에게 입혀져 있다. 우리 주변에 손을 뻗으면 닿을 만한 것들이 그 책 안에선 전부 입고 벗을 수 있는 옷이 되었다.

이 책은 아스카 하마다가 2018년 일본 이와미 미술관에서 자신의 브랜드인 ‘테리어카’라는 이름으로 연 전시회의 도록이다. 이 전시는 사람에게 보편적으로 맞는 형태의 옷에는 존재하지 않는, 옷이 가진 기능성과 재미를 전달하기 위해 기획했다고. 사람이 입는 옷은 사람의 형상을 닮기 마련이다. 상의라면 몸통과 머리, 양팔이 들어가기 위한 구멍을 내고, 어깨선을 만든다. 또 바지와 치마는 허리와 다리 모양에 맞춰 옷감을 봉제한다. 그러나 단지 우리 몸을 감싸기 위해 만들어진 옷은 하마다의 흥미를 끌지 못한다. 오히려 구멍이 무척 많거나 아예 없는, 팔다리를 어디다 넣어야 할지 헷갈리는 여러 가지 모양의 옷을 입음으로써, 재미있는 부조화를 발견할 수 있다고. 몸에 맞지 않는 여분의 천은 자연스럽고 느슨한 주름을 만들고, 사람 움직임에 맞춰 볼륨감과 생기가 더해지기도 할 테니까.

집House

사람에 의해 완성되는 옷

한 권에 담긴 하마다의 작품은 세 챕터로 구분되어 있다. 작품을 기획할 당시에는 사물을 본떠 옷으로 표현하는 <3D의 형태>, 사각형에서 시작된 발상을 전개한 <한 장의 큰 천>, 다양한 도형을 입어 보는 <기하학>으로 구분했으나, 만든 이에게 필요한 개념일 뿐 보는 이의 이해를 돕는 명칭은 아니었다. 그래서 하마다는 작품이 완성되어 갈 즈음 3D의 형태라는 표현을 <사물Objects>로, 한 장의 큰 천을 <침대보Bed Sheets>로, 기하학을 <모양들Shapes>이라 불렀다고. 구체나 정사각형이라는 말보다 배구공이나 라비올리로 불리는 편이 어떤 옷일지 더 알고 싶지 않은가.

하마다는 아티스트로서 작품을 만들면서도 우리의 일상과 가까운 거리를 유지한다. 예술대학에 다닐 당시, 그는 고심 끝에 완성한 작품이 발표가 끝나면 단순한 물건으로 치부되는 상황을 괴로워했다. 시간과 마음을 들여 제작해도 자기 만족감 이상의 의미를 갖지 못했기 때문이다. 고민에 빠진 하마다를 끌어낸 건 ‘실용품’이었다. 실용적인 것에는 여러 사람을 모으는 힘이 존재했고, 만든 이의 생각을 넘어 쓰는 이를 통해 상상도 못 한 발전을 거듭할 수 있다. 옷을 착용하는 사람과 손에 든 사람, 이들의 모습을 보고 소통을 시도하는 사람까지, 하마다의 옷은 모두를 끌어안으며 존재 의미가 완성된다.

사다리Ladder
쿠션Cushion

©Katsumi Omori

그의 옷을 즐기는 방법은 정해져 있지 않다. 원하는 자리에 팔을 뻗어 보고 폭이 작은 구멍에 안간힘을 쓰며 머리를 넣어도 좋다. 옷을 고르고 입는 데는 규칙이 없기 때문이다. 하마다는 언제나 테리어카의 옷이 겉모습이 아니라 마음에 작용하길 바란다. 그가 만든 세상에선 나다울 수 있는 자유로움과 새로운 시도를 거듭하는 용기를, 다름 아닌 옷이 선물해 주겠지. 밝은 표정과 유쾌한 걸음으로 그 세계를 거닐어 본다.

책은

어떤 옷을 입었을까

아스카 하마다와 테리어카의 세계를 충분히 이해했다면, 《THERIACA: Shapes and Forms: Clothes, The Body》가 두른 옷도 들여다볼 차례. 한 권의 책에서 발견한 특별한 부분들을 한 손에 쥐어본다.

1. 세심함이 녹아든 구성

의류 제작과 상품을 홍보하는 보통의 책이라면 선택하기 어려울 표지, 텍스트 색깔과 크기를 골랐다. 테리어카가 만들어낸 작품은 무수한 줄글이나 이론보다는, 뾰족한 비주얼로 보여주는 것이 설득력이 높을 거라 판단했다고. 표지에 들어가는 요소를 통해 이어지는 내용에 대한 단서를 슬쩍 건네며 보는 이들의 호기심도 불러일으켰다. 또한 옷은 바닥에 놓인 상태와 사람이 입은 상태에서 전혀 다르게 보이기 때문에, 내지에는 실제 작품뿐 아니라 모델이 착용한 모습도 담아두었다. 작품 촬영 내내 다림질을 무척 많이 했다는 후문. 

2. 삽지로 엿보는 작가의 머릿속

내지 두 곳에는 책 판형보다 작은 크기의 삽지가 다수 끼워져 있다. 어떠한 소제목도 없이 콜라주와 스케치, 스크랩이 이 페이지를 채우고 있는데, 바로 아스카 하마다의 아이디어 노트 중 일부다. 일상에서 문득 눈에 들어오는 문구나 광고지, 즐겨 보는 잡지에서 재미있다고 생각하는 부분을 오려 내어 노트에 기록했다고. 예쁜 지류를 발견하면 옷으로 만들어 붙여두기도 하는데, 작업과는 관련 없는 내용도 곧잘 쓰인다. 하마다는 이렇게 채운 노트들을 다시 보며 작업에 대한 영감을 얻는다.

3. 세계관을 책으로 잇는 출판사

이 책은 일본에서 활동하는 ‘토치 프레스Torch Press’가 제작했다. 횃불, 지식이나 문화의 빛이라는 의미의 이름에는 작더라도 마음의 등불로서 선명하게 존재하겠다는 목표를 담았다. 사진집이나 작품집, 화가나 디자이너의 도록 등 아트북을 중심으로 제작하고 있는데, 아티스트의 세계를 책이라는 형태로 만들어 우리 일상에 예술이 뿌리내리길 바란다고. 토치 프레스의 대표 나오 아미노는 친구한테서 “재미있는 사람이 있다.”며 하마다를 소개받아 작업하게 됐다고 한다.

Book—《THERIACA: Shapes and Forms: Clothes, The Body》 Asuka Hamada | Torch Pr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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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이명주

자료 제공 Asuka Hamada, Nao Amino 사진 Katsumi Omo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