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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영은 — 미온전
산책은 무리하기 위한 행위가 아니다. 그저 충분하다는 짐작이 들 때까지 발자국을 남기는 것이다. 미온전의 전영은은 산책의 의미를 빼닮은 사람이다. 읽고 싶은 만큼의 문장을 꼭꼭 씹어 삼키고 내키는 만큼 몸을 움직이며, 필요 이상의 물건을 만들지 않는다. 일정한 보폭과 속도로 남기는 발자국은 그의 일상을 안온한 산책길로 만든다.
만나게 되어 반가워요. 우선 간단한 소개 부탁해요.
안녕하세요. ‘미온전’을 운영하는 전영은입니다. 미온전은 가방이나 장갑, 다이어리처럼 작고 소소하지만 일상에 녹아들어 함께할 수 있는 무언가를 만드는 브랜드예요. 학생 때부터 막연히 나만의 것을 만들고 싶다고 생각했는데, 올해로 7년 넘게 미온전을 운영하고 있네요. 작고 미비하지만 많은 분이 애정을 보내주셔서 이어 나가고 있어요.
미온전은 온전하지 않다는 뜻의 단어인 거죠? 이름이 독특하다고 생각했어요.
저는 제품을 만들 때 ‘더 나은 선택이 있지 않을까? 나중에 봐도 만족스러운 제품일까?’ 이런 질문들과 매번 싸웠어요. 그런 복잡함을 떨치고 싶어서 브랜드 이름을 청개구리처럼 지었죠. 제 이름의 한자가 ‘온전할 전全’인데 결점 없이 완벽하다는 의미로 쓰이거든요. 그래서 ‘세상에 그런 게 어딨어?’라는 마음으로 앞에 ‘아닐 미未’를 붙였어요. 분명 부정의 의미는 있지만 ‘아닐 부不’와 달리 마침표는 찍히지 않은, 미래의 가능성을 포함한 글자 같았거든요.
자꾸 곱씹게 되는 좋은 이름 같아요.
다행히 아직 질리지 않아서, 지금까지 이름으로 쓰고 있네요(웃음).
영은 씨는 혜화의 서점 ‘어쩌다 산책’에서도 일하고 있죠.
본업이 아닌 곳에서 편한 마음으로 대할 수 있는 동료를 만들고 싶었어요. 1인 브랜드를 운영하다 보면 좋은 점도 있지만, 가끔 외로운 순간이 찾아와요. 모든 일이 혼자 시작해서 혼자 마무리되거든요. 저도 예전에 회사에서 일했던 경험이 있는데, 분명 곁에 있는 동료한테서 얻을 수 있는 에너지가 있거든요.
맞아요. 혼자 있을 때와는 또 다른 에너지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그런 바람만 가진 채로 외로움에 지쳐가던 중에, 어쩌다 산책에서 팀원을 구한다는 공고를 봤고 충동적으로 지원했어요. 본업에 영향을 주지 않도록 일주일에 이틀만 출근하는데 벌써 2년 가까이 근무했네요.
꽤 긴 시간이네요. 어쩌다 산책은 자주 가던 곳이에요?
몇 해 전, 제 생일에 엄마와 혜화동에서 데이트를 했어요. 그때 처음 와봤는데 뭐랄까, 마음이 편안하더라고요. 이런 멋진 공간에서 일하는 사람들도 멋져 보이고요. 막연하게 ‘아, 여기서 일하면 좋겠다.’ 싶었어요. 저에게 이곳은 본업에서 벗어나 생각을 환기할 수 있는 공간이에요. 단순한 일터가 아니죠. 무엇보다 선하고 다정한 동료들이 저에게 큰 힘이 되어주고요. 제가 항상 “로또 1등 당첨되어도 산책은 계속 다닐 거야!”라고 말하는데, 농담이라고 안 믿어줘요. 완전 진심인데(웃음).
방금 그 말에서 어느 정도의 애정인지 확 와닿았어요. 근처에서 일하다 보니 마로니에 공원을 자주 찾게 된 것 같네요.
맞아요. 마로니에 공원은 공간이 확 트여 있어서 답답하지도 않고 계절마다 풍경의 맛이 달라요. 찬바람이 불고 눈이 오는 겨울뿐 아니라 여름과 가을에도 나무를 구경하며 걷기 좋아요. 항상 사람이 많은데, 오늘은 날씨가 좋아서 더 북적이네요.
그러게요. 바람에 부딪치는 나뭇잎 소리도 들리고요. 바쁜 일상을 보낼 텐데 평소에 산책은 자주 하세요?
사실 일부러 시간을 내서 걷는 사람은 아니에요. 산책만을 위해 외출한다기보다 나간 김에 걷고 둘러보는 거죠. 요즘은 마로니에 공원 외에도 중랑천에서 걷곤 해요. 저녁 운동을 마친 후에 열기를 가라앉히기 좋거든요. 밤 산책을 하기 딱 좋은, 얼마 안 되는 귀한 계절이기도 하고요.
계절을 느끼면서 잠깐이라도 마음의 쉼표를 찍었다면 그게 바로 산책인 것 같아요.
바쁜 일상을 살다 보니 자연스레 그렇게 되더라고요. 제가 책 읽는 걸 좋아하는데요. 장르를 가리진 않지만, 산책이라는 행위를 좋아하거나 자연을 예찬하거나, 멍하니 벤치에 앉아 사색에 잠기는 작가들의 책을 가까이 두려고 해요. 일상에서 쉽게 놓치는 부분을 이렇게라도 채우고 싶거든요.
일종의 대리만족이네요. 그럼 책은 언제 주로 읽어요?
원래는 샤워를 마친 후에 좋아하는 잠옷을 입고 침대에 누워 읽는 게 최고인데, 그런 시간을 자주 갖긴 어려워요. 그래서 어딘가로 이동할 때 주로 읽어요. 제가 경기도민이라 어딜 가든 30분 이상은 걸리거든요(웃음). 대중교통에서 보내는 시간이 남들보다 긴 거죠. 그리고 한 가지 덧붙이면, 스마트폰만 보는 사람들 가운데서 책 읽는 모습을 사랑하기도 해요.
독서할 때 튀어나오는 영은 씨만의 습관도 있을까요?
저는 내지를 험하게 보는 걸 좋아해요. 마음이 가는 문장에 밑줄을 긋고, 다음에도 펼쳐보고 싶은 페이지는 고민 없이 모서리를 접어버리기도 하고요. 다 읽은 책을 덮었을 때 이전과 달리 책 두께가 살짝 부풀어 있거든요. 그걸 보면 왠지 기분이 좋아져요. 다만 표지가 상하는 건 싫어요. 미온전의 산‘책’가방을 만든 이유도 그 때문이에요.
저도 그 가방 덕분에 미온전을 알게 되었어요.
일상에서 책 읽을 때 불편했던 부분을 고민하면서 제작한 북 커버인데, 많은 분이 사랑해 주셨죠. 들고 다니기 편하게 가방처럼 손잡이를 달고, 수납공간과 가름끈을 만들었어요. 책 몇 권을 한 번에 넣을 수 있도록 공간을 구성했고요. 책이 아닌 태블릿 패드도 들어가면 좋겠다는 의견이 있었는데, 오직 책만을 위한 가방이라는 제작 의도를 바꾸고 싶진 않아요.
오늘은 산’책’가방에 어떤 책을 넣어 왔어요? 얼핏 보기에도 책이 부풀어 있는데요.
최근에 읽은 에밀리 디킨슨의 《모두 예쁜데 나만 캥거루》라는 시집인데, 여기에도 열심히 접은 흔적이 있죠(웃음). 그의 시를 풀어낸 한정원 작가의 《시와 산책》도 가져왔어요. 한정원 작가는 자연의 형상을 담은 시를 자주 썼던 에밀리 디킨슨에게 ‘매우 성실한 산책자’라는 표현을 쓰더라고요. 저도 시를 읽으면서, 저자의 눈을 빌려 자연을 감상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어요.
작가의 시선을 빌려 세상을 경험하는 거네요. 영은 씨는 독서라는 정적인 행동뿐 아니라, 운동이라는 동적인 행위도 즐겨 하죠.
요가는 오래전부터 해왔고, 등산은 3년 전부터 했어요. 사실 제가 누워 있는 걸 세상에서 제일 좋아하던 사람이거든요. 정지돈 작가가 “산책에서 제일 좋은 파트는 산책하기 직전이다. 꿈꿀 땐 행복하지만 막상 시작하면 피곤한 행위”라는 말을 했는데, 너무 공감했어요.
저도요. 운동 시작하는 순간부터 ‘아, 오지 말걸.’ 하고 후회하거든요(웃음).
그러니까요(웃음). 그런데 나이 앞자리가 바뀌면서 ‘건강 무료 구독’이 끝난 느낌이 딱 들더라고요. 이제 시간과 돈을 들여 몸뚱이의 건강을 구축해야 할 때가 왔구나, 실감했죠. 그래서 올해부터는 PT, 축구까지 시작했어요.
필요함을 느끼자마자 곧바로 행동으로 옮긴 게 정말 대단한데요?
사실 하타요가는 한 동작에 오래 머물면서 몸의 움직임을 느끼는 건데, 제 성향과 잘 맞아서 자연스레 꾸준히 하게 되었어요. 그런데 최근에 시작한 축구나 PT는 제가 가진 성향을 거스르는 운동이에요.
보통은 운동도 나와 잘 맞는 걸 찾게 되던데, 어떤 이유로 시작하게 되었어요?
생각해 보면, 학교 다닐 때 여학생들이 운동장에서 공을 차면서 팀워크를 느낄 만한 기회가 주어지지 않잖아요. 하다못해 공으로 누군가를 맞추는 정도고요. 그런데 《우아하고 호쾌한 여자 축구》라는 책을 읽은 후로, 해보지 않았던 걸 도전하고 싶은 욕구가 들었어요. 그래서 친구들이 만든 여자 축구팀에 들어가서 열심히 뛰고 있죠.
어때요. 소질이 있는 것 같아요?
오합지졸이지만 어쩌다가 골이라도 하나 넣으면 기분이 너무 좋아요(웃음).
글을 읽고 몸을 움직이는 게 일상을 바꾸어 놓았네요.
그렇죠. 인간은 어떤 면에서 참 단순해서 귀여울 때가 있어요. 우울할 때 따뜻한 물로 몸을 씻어내고 깨끗한 잠옷을 입으면 조금이나마 기분이 나아지는 것처럼, 독서와 운동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해요. 꼭 대단한 목적이 아니라도, 잠시 밖으로 나와 몸을 움직이거나 글자를 읽으면 확실히 전보다 나은 상태가 돼요. 특히 저는 요즘 운동할 때 몸에 근육 붙는 느낌이 엄청 신나고 재미있어요. 만나는 친구마다 팔에 힘을 주며 만져보라는 주접도 떨고요(웃음). 더욱 강해지고 싶어요!
영은 씨는 자신이 무엇을 추구하는 사람인지 잘 아는 것 같아요.
주변에서는 성공하고 싶으면 그냥 팔릴 만한 걸 계속 찍어내라고들 말해요. 하지만 저는 거창한 목표 같은 게 없어요. 남들 버는 만큼 벌면 잘하는 것 같고요. 나답지 않게 무리하다가는 분명 넘어질 거예요. 앞으로도 제가 하고 싶은 걸 만들고, 하고 싶은 걸로 일상을 채울래요.
에디터 이명주
포토그래퍼 김혜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