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리하지 않으면 내가 보여요

김미재—아트먼트뎁·티컬렉티브

“처음으로 2년을 살게 된 집이에요. 원래의 나로 돌아온 거 같아요.” 김미재 디렉터는 아침이면 아끼는 다기를 꺼내, 차를 내려 마시고 일주일에 세 번 운동을 하며 주말엔 가족과 동네 산책을 한다. 나를 놓치고 달려온 시간의 터널을 지나 내 자리를 찾게 해준 집. 이름은 그로우스다.

그로우스

형태: 복층 빌라
거주: 2년 1개월
나이: 20년 정도

생활과 예술이 공존하는 공간 같아요. 인터뷰 전에 공간을 먼저 둘러보고 싶어요. 

이 빌라엔 건축가, 유튜버, 개인 브랜드 대표 등 재미있는 분들이 많이 살아요. 20년 전에 지어졌는데 리모델링을 한 번도 안 했대요. 평수가 넓은 편은 아니지만 층고가 높고 2층으로 나뉜 구조가 마음에 들었어요. 타일 같은 디테일이 흔치 않고, 층마다 테라스가 있어요. 여기가 거실과 주방인데요, 보통의 집에 비해 싱크대가 협소한 편이고 식기장이 넓죠? 요리를 자주 하진 않지만 집기 수집을 좋아해서 저에게 적절한 구조예요. 거실에 빛이 잘 들어와서 클라이언트 프로젝트나 ‘티컬렉티브’ 촬영도 자주 하고, 빈티지 수집품 판매 사진도 찍어요. 남자친구와 차를 마시고 아들과 강아지랑 놀기도 하죠. 아들은 친정인 파주와 이곳을 왔다 갔다 하며 지내고 있어요. 아래층에는 드레스룸, 남자친구 방, 침실이 있어요. 혼자 있을 때는 주로 침실에 박혀 지내요. 

 

이 집에 머문 지 2년이 갓 지났다고요. 

네, 성인이 되고 이렇게 오래 산 집은 처음이에요. 청담동에 디자인 스튜디오 ‘아트먼트뎁’ 사무실과 티컬렉티브 카페를 두고 있었을 땐 삼성동 작은 오피스텔에 혼자 살았어요. 카페에서 메뉴를 개발하고 아름답게 꾸며야 하니까 마음에 드는 건 전부 매장에 갖다 놓았고, 집은 텅 비어 있었어요. 주중에는 집에서 거의 물만 마셨어요. 언제든 이동할 수 있게 여행 가방을 꺼내 놓았고요. 여기로 이사 오고 카페를 정리하면서 정말 오랜만에 내 손으로 차를 우려 마셨어요. 늘 카페에서 직원들이 내려주는 티를 먹거나, 그것조차 일이라고 느껴질 땐 “난 종이컵에 마실게.” 하면서 대충 먹곤 했죠. 티컬렉티브를 만든 이유가 차 마시는 시간을 좋아해서였는데 바쁜 생활이 이어지며 그 마음을 좀 잊고 살았던 거죠. 코로나19로 숨을 돌리면서 아끼는 다기를 직접 써보고 책 읽을 시간이 생겼어요. 걱정이 많이 줄었고, 내면적으로 재정비가 되었어요. 

 

많은 변화가 있었네요. 

티컬렉티브의 첫 시작이 오프라인이라서, 카페를 닫으면 큰일 나는 줄 알았어요. 일을 강남에서 시작했고 클라이언트 회사도 강남에 많아서 벗어날 생각도 못 했죠. 코로나19로 운영이 어려워져 어렵게 결정했어요. 청담동 월세가 정말 비쌌거든요. 한남동은 전혀 모르는 지역이었는데 남자친구 영향으로 와봤다가 집을 구했고, 일하기 좋은 곳으로 사무실도 옮겼어요. 삶의 터전을 바꾸니까 티컬렉티브를 처음 만들었을 때부터 계획했던 라이프스타일 브랜드로 도약해보고 싶은 마음이 커졌어요. 카페를 닫으면서 앞으로 ‘잘하는 것만 하자.’고 마음먹었거든요. 열심히 매달릴 땐 몰랐는데 쉬면서 ‘디자이너인 내가 카페 운영부터 직원 관리까지 자신 없는 분야를 직접 하려고 애쓰면서 스트레스가 컸구나.’ 깨달았죠. 여러 브랜드의 라이프스타일 제품을 함께 만들어 왔고, 다양한 브랜드의 상품을 사용해 봤지만 내 브랜드를 만드는 건 쉽지 않았어요. 새로운 제품군을 준비하는 데 꼬박 2년이 걸렸네요. 티 브랜드에서 라이프스타일 브랜드로 확장하는 이유를 설명하면서, 나답게 만드는 게 큰 숙제였어요. 감사하게도 제작, 운영을 맡아줄 수 있는 좋은 파트너를 만나 제가 잘 할 수 있는 기획과 개발, 디자인에 집중하고 있어요. 

 

정말 바쁠 거 같은데 차분한 말투와 행동을 보며 ‘어쩜 저렇게 여유로울까?’ 감탄하곤 했어요. 

바쁘게 일한 모습을 많이 드러내지 않아서 그럴 거예요. 17년 동안 개인 브랜드부터 대기업까지 브랜드 프로젝트만 230개를 했어요. 내 브랜드를 만들고, 카페도 운영했죠. 일어나서 잠들 때까지 대부분 시간 일에 파묻혀 지냈어요. 그런 저를 보신 친정 부모님이 아들을 맡아서 키워주셨죠. 아이랑 같이 못 있으니 더 일을 많이 했어요. 아이한테 전화가 오면 “엄마 일하고 있어.”라고 답하는 건 괜찮은데, “퇴근해서 집에 있어.”라고 말하는 건 스스로 용납이 안 되더라고요. ‘일을 마쳤으면 아이를 돌봐야 하는데 나는 왜 집에 있지?’ 죄책감이 들면서 더 일에 매달린 거 같아요. 덕분에 이젠 어떤 일이 들어와도 눈 깜짝 안 하는 내공이 생겼어요. 몸으로 부딪치고 실패도 해보면서 나만의 방식을 찾았고요. 누구나 자신을 갈아 넣어야 하는 때가 있는 거 같아요. 몰입의 시간을 지나 지금은 나에게 편한 방식으로 일하고 있어요. 아이와 지내는 주말은 오롯이 아이에게 집중하고요. 각자의 시간을 보내고 만나니 주말을 기대하고, 함께하는 시간이 귀해요. 지금이 제 인생의 가장 편한 시기예요.

코로나19가 진정되면서 다시 출근하는 생활을 할 텐데요, 전처럼 무리하지 않는 거죠? 

남자친구가 디제이라서 12시쯤 집에 와요. 저희는 혼자만의 시간이 중요한 사람들이라 인사하고 각자의 방에서 따로 시간을 보낸 뒤 다시 만나 이야기를 나누곤 해요. 보통 새벽 2시에 잠들고 아침 열시쯤 일어나요. 2층 거실로 올라와 차를 마시고, 메일 확인하고, 직원들 연락에 답하면서 하루를 준비하는 시간을 두 시간쯤 가지죠. 12시에서 1시쯤 출근해 집중해서 일하고 야근은 안 하려고 노력해요. 예전에는 8시 전에 퇴근한 적이 거의 없었어요. 늘 저녁 먹고 일을 더 하곤 했는데, 제가 늦으니까 직원들도 계속 야근하는 거예요. 좋아하는 물건들이 있고 편안하게 쉴 수 있는 집이 생기니 퇴근이 빨라졌어요. 집으로 와 혼자 저녁을 먹고 일주일에 세 번 운동하는 게 주중의 루틴이에요. 개발 중인 차를 천천히 음미해 보고, 목욕하면서 배스솔트 테스트도 하고, 곁들이면 좋을 차도 고민해 보죠. 

 

집을 채우는 가구나 집기들이 예사롭지 않아요. 

제가 텍스타일 디자인을 공부했고, 텍스처에 민감해서 다기와 유리, 돌, 목재를 선택할 때도 정말 얇거나 아주 두껍거나 질감이 매트한 걸 선호해요. 언밸런스한 아름다움을 좋아해서 작고 아담한 물건을 쪼르륵 놓기보단 가정집에서 잘 안 쓸 것 같은 사이즈들도 자주 구매하죠. 벽에 부착된 램프도 놋 아이런이라는 메탈 소재인데 제가 가지고 있는 다기랑 잘 어울리죠? 의도한 건 아닌데 색이 화려하거나 요소가 많아서 ‘나 의자예요. 소파예요.’라는 존재감을 드러내는 디자인은 피하는 편이에요. 식탁은 중고 가게에서 20만 원을 주고 산 건데 5년째 잘 쓰고 있고, 패브릭 의자도 포터리반에서 10만 원 초반의 합리적인 가격으로 구입한 거예요. 

 

아름다운 물건만큼 사물들의 조화로움도 중요할 거 같아요. 

맞아요. 브랜드 공간을 만들어주거나 카페를 꾸리던 습관이 있어서 하나씩 안 사고 수북이 쌓을 수 있게 사곤 해요. 새 제품과 빈티지 제품을 반반씩 섞어서 공간에 두는 걸 좋아하고요. 한곳에서 여러 종류를 사거나 같은 시기에 산 물건이 아닌데, 수납할 때 텍스처별로 정렬하면 정돈된 효과가 있어요. 저는 눈이 편안한 걸 좋아해서 주로 입는 옷이나 좋아하는 작품, 사용하는 가구와 소품에 원색이 드문 편인데 이탈리안 스타일을 좋아하는 남자친구는 화려하고 과감한 색을 좋아해요. 거실의 카펫와 오디오 램프가 큼직하고 용감한 스타일이잖아요. 둘의 색이 섞이면서 더 재미난 공간이 된 거 같아요. 

 

지금이 인생에서 가장 편한 시기라고 했어요. 공간이 편안하지 않으면 안락한 시간을 갖기 힘들잖아요. 행복한 터전을 만드는 데 중요한 요소는 뭐였어요? 

좋아하는 가구와 소품들이 아름다운 빛을 받으며 공간에 스며들 때 행복을 느껴요. 빛이 잘 드는 집에 살면서 더 행복해졌거든요. 조도에 민감해서 조명을 중요하게 생각해요. 도쿄랑 런던에서 10년 지내다 서울에 왔을 때 화려한 형광등을 견디기 힘들어서 오피스텔에 촛불 켜고 지냈어요. 전체 조명을 바꾸기 힘들 땐 램프를 유용하게 써요. 테이블 램프는 공간의 제약이 많지 않아서 내 취향을 드러내기 좋아요. 빛에 민감해서 나라별 조도의 차이도 느껴요. 런던은 흐린 날씨가 많지만 우리나라와 빛의 양이 달라서 사진의 분위기가 달라요. 티컬렉티브 홈케어 제품을 프랑스에서 촬영했는데요, 소량 제작이고 상품군도 열 개 내외라서 모두 말렸어요. 강행할 수 있던 건 우리 제품을 아름답게 담을 수 있는 빛의 색을 믿었기 때문이에요. 상업 공간을 만들 때도 빛의 양을 중요하게 생각해 디머를 꼭 달아요.

나를 품어주는 집에 이름을 붙여볼 시간이에요. 어떤 이름이 떠올라요? 

음… 그로우스Growth요. 이 집에 살면서 저와 남자친구, 아들, 강아지 모두 각자의 자리에서 상대를 사랑하는 법을 배웠어요.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인생의 한 부분을 함께하며 서로를 보듬어주는 게 느껴져요. 정신적, 육체적으로 성장하고 있다는 감각이 어느 때보다 생생해요. 

 

나를 중심으로 집과 취향, 하는 일이 동그랗게 연결된 모습이에요. 유년 시절부터 내가 좋아하는 걸 잘 아는 편이었어요? 

유년 시절을 파주 시골에서 보냈어요. 40분 산길을 걸어 학교에 다녔고, 개구리 잡으러 다니는 친구들이 많았죠. 네 식구가 시골 작은 아파트에 살다 보니 제 방이 없었어요. 초등학교 3학년쯤 아파트 기계실 같은 창고에 들어가 본 후 친구들과 아지트를 만든 기억이 있어요. 친구들한테 ‘집에서 제일 좋아하는 거 가지고 와서 여기에 놓자.’고 했죠. 공간에 대한 열망이 컸나 봐요. 그릇이나 엄마 물건을 조금씩 가져와서 아지트에 이름도 지어줬어요. 엄마들이 자꾸 집 물건이 사라져서 걱정할 즈음 경비 아저씨에게 발각돼서 아주 크게 혼이 났죠. 중학교 3학년 때 일본으로 이사를 했어요. 처음으로 내 방이 생기자 일주일에 한 번씩 방 구조를 바꿨어요. 가구라 해봐야 책상이랑 침대, 책장 정도가 다인데 책상을 나란히 놨다가 떨어뜨려 놨다가 침대 위치를 바꾸는 등 계속 변화를 줬죠. 엄마가 병이라고 혀를 찰 정도였어요(웃음). 고등학생이 되면서 좋아하는 것을 더 적극적으로 하기 시작했어요. 요요기 공원 빈티지 마켓에서 빈티지 옷, 바구니, 연필꽂이, 문구용품을 사고 팔았고, 학교 문화제에 작은 포스터를 만들어볼 기회도 얻었어요. 디자인 툴도 없는 데스크톱 그림판에서 원 그리고 컬러 넣고 폰트 선택하고 날짜 적어 디자인을 하는데 너무 재밌어서 태어나 처음으로 밤을 새웠어요. 내 마음대로 컬러를 지정하고 크기를 바꿨는데 사람들이 예쁘다고 하니까, ‘디자인을 배워봐야지.’ 마음먹고 미술학원에 다니기 시작했어요. 

 

그래서 미술 대학으로 진학한 거예요? 

네. 영국은 스킬보다 스케치북에 그려둔 아이디어와 아이디어 발전 과정을 중요하게 여기는 편이라 입학할 수 있었죠. 대학에 가서 종이로 디자인을 하는 게 성에 안 차서 텍스타일로 전공을 바꿨어요. 1년 파운데이션 과정에서 다양하게 해보니 패브릭도 만족이 안 되더라고요. 디지털 작업을 하고 싶어서 포토샵, 일러스트를 배웠고, 그러면서 파인 아트에 마음이 있어서 직접 그림도 그렸죠. 그림을 컴퓨터로 옮기거나 그림 그린 걸 실크 스크린으로 만들기도 했어요. 관심 분야가 다양하고 하고 싶은 영역이 좀 많은 학생이었어요. 영국에서 학교에 다니며 아르바이트하는 틈틈이 찰리티 숍에 드나들었죠. 찰리티 숍은 입던 물건을 기부하면 아주 싼 값에 사람들에게 파는 상점이에요. 친구들이 제가 학교에 안 온 날은 찰리티 숍에 있을 거라고 짐작할 정도로요. 지역마다 찰리티 숍 리스트를 만들었고, 옷이 많은 지점, 그릇이 다양한 곳, 서적을 주로 파는 곳, 업데이트되는 날을 적어두면서 정보를 모았죠. 일이 아니었는데도 폴더에 카페, 레스토랑, 미술관 등의 정보와 이미지를 정리해 뒀어요. 도서관에서 잡지를 보고 새로 생긴 숍이나 브랜드도 메모해 두고요. 어릴 때부터 좋아하는 것들을 찾아다니고, 내 공간에 하나둘 모으면서 행복과 편안함을 느끼는 욕구가 다른 사람보다 조금 더 강한 편이었어요. 영역이 커지긴 했지만 지금도 어린 시절 좋아했던 것과 비슷한 일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휴학을 하고 카페 ‘페이퍼가든’ 공간 디자인 작업을 한 걸로 알아요. 

학교에 다니면서 생활비를 직접 벌어야 했기에 아르바이트를 정말 많이 했어요. 무인양품부터 레스토랑, 플라워 숍, 빈티지 가게에서도 일했어요. 그러다 비자 문제 때문에 1년간 엄마랑 친구들이 있는 일본에 못 가니까 우울해지고 너무 지쳐서 휴학하고 아빠가 계신 한국에 왔어요. 아르바이트를 알아보던 중 압구정 건물에 붙은 ‘직원 모집’ 안내가 눈에 들어왔어요. 그렇게 인연이 닿아 일어와 영어가 능한 제가 대표님이 원하는 걸 찾아주고 트렌드를 알려주는 역할을 했어요. 큰 조직에서 일했으면 제가 할 수 있는 범위가 작았을 텐데, 당시에 직원이 대표님과 저 둘이어서 그래픽 스킬 1년 차인 제가 메뉴판 디자인을 했어요. 해상도가 뭔지도 몰랐을 때인데 밤새며 재미있게 만들었고, 제가 아이디어 내는 것들이 실제로 만들어지니 즐거웠어요. 학창 시절 좋아해서 자주 하던 일인데, ‘어떻게 이런 일을 하며 돈도 받지?’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신났어요. 

 

좋아하는 일을 하며 잘하는 일이라는 확신도 들었어요? 

페이퍼가든이 유명해지고 다양한 분들이 많이 왔어요. 당시 한국은 큰 테이블에 모르는 사람들이 같이 앉는 문화가 아니었어요. 그런데 그 공간이 좋아서 유명한 분들이 겸손하게 옹기종기 같이 앉아서 밥을 먹는 거예요. 저희가 꾸민 공간을 좋아하고 사진도 많이 찍으셨죠. 제가 카운터 옆 조그마한 책상에서 일했는데, 저한테 편지를 써주는 분들도 계셔서 쪽지를 주고받으며 친해지기도 했고요. 사람들의 오감을 자극하고 아름답게 만드는 게 너무 즐거워서 나한테 정말 잘 맞는 일이라는 걸 확신했죠.

색과 재료, 디자인 감각은 어떻게 길러진 거 같아요? 

좋아하는 색과 재료는 머물렀던 도시의 영향을 받은 듯해요. 도쿄의 희미한 파스텔톤, 런던의 무겁고 칙칙한 잿빛과 벽돌색, 토기색 같은 투박한 색감을 일상에서 접했어요. 하지만 처음부터 런던이 아름다웠던 건 아니었어요. 가난한 유학생인 저는 학교가 마치면 아르바이트를 해야 했고, 지하철도 비싸서 못 타는 날이 많았거든요. 페이퍼가든에서 일한 경험 덕분에 ‘알래스카’라는 빵집 디자인 의뢰가 들어와서, 학비를 해결했어요. 학비에 대한 걱정이 덜자 런던을 즐길 만한 도시로 바라보게 되더라고요. 주변의 좋은 취향의 브랜드와 공간이 보이기 시작했어요. ‘맞아, 런던이 이렇게 예뻤지.’ 깨달으며 시야가 확 트였어요. 부담스럽지 않은 금액을 지불하고 다양한 걸 경험해 봤어요. 알래스카 로고와 패키지 디자인을 하며 안 가본 빵집 없을 만큼 영국이랑 파리 빵집에 다녀보고 사진을 찍어 공유하고, 구매 대행 일도 했어요. 알래스카 대표님이 저의 눈을 믿어 주셔서, 매장 페인트 컬러도 제가 골랐죠 

 

이후 디자인 스튜디오인 아트먼트뎁을 만든 거예요? 

저는 프리랜서 디자이너가 되고 싶진 않았어요. 스스로 정한 시간에 일하는 것도 이상적인데 좋은 브랜드들하고 일하고 싶다는 욕심이 있었어요. 우리나라에 들어와 대기업 규모에 놀랐어요. 일본이나 영국에 없는 회사의 규모였거든요. 마트, 전자, 백화점, 자동차, 아파트 등의 카테고리를 다룬다는 게 대단해 보여서, 대기업 회장님들 책도 사서 봤어요. 제가 졸업할 즈음 아크네 스튜디오Acne Studios가 인기가 많았는데, 데님 브랜드로 시작했지만 베이스가 디자인 스튜디오예요. 그들이 기업과 호텔, 자동차 브랜드와 협업하는 프로젝트가 너무 멋있었어요. 나도 꼭 저런 팀에서 일하고 싶다는 생각이 컸죠. 졸업 후 커다란 프로젝트가 연이어 들어와서 그래픽 디자인을 전공한 친구와 3개월 인턴으로 일을 시작해 봤어요. 둘 다 욕심이 많고 일을 빠르게 처리하는 편이라 점차 많은 제안이 들어왔어요. 개인적으로 브랜딩 수업을 하고 있는데, 어린 시절 좋아하는 걸 어떻게 일로 만들어갔는지 떠올리면서 강의를 해요. 

 

브랜딩 수업에서는 어떤 걸 가르쳐요? 

예쁜 게 뭔지는 알겠는데 나의 취향이라 말할 수 있는가, 취향을 개발하는 것부터 시작해 확고한 취향을 쌓는 법에 대한 이야기를 나눠요. 브랜드 대표님, 대학생, 대기업 사원 등 다양한 분들이 신청해 주셨어요. 수업에서 지극히 개인적인 경험으로 내가 좋아하는 것을 나열해 봐요. 어떤 추억의 순간, 냄새, 촉감 같은 걸 써 내려가고 무드 보드를 만들고 카테고리별로 정리해서 10년 후 좋아하지 않을 것 같은 건 지워나가는 거예요. 정말 좋아하는 하나만 남겨서 깊게 파고 이미지로 만든 뒤 언어로 만들어봐요. 400명 정도 수업을 진행해왔고, 요즘은 사무실에서 수업을 해요. 제 일을 잘 알고, 제 취향을 존중하는 분들이니까 제가 거쳐온 경험을 귀 기울여 주시고 좋아해 주셔서 마음이 통한다는 느낌이 들어요. 프로젝트 일할 때랑은 다른 에너지를 주고받아요. 너무 바쁘고 수업하기 전 긴장도 되지만 두 시간 수업하고 나면 제가 더 채워지는 느낌이에요. 브랜드 리서치하면서 제가 모르는 브랜드도 알게 되고 마음이 잘 맞아 함께 일하는 친구도 있어요. 수업에서 만난 학생분들끼리 합이 맞아서 협업하는 경우도 있죠. 클라이언트 외에 새로운 사람들을 만날 기회가 별로 없으니까 이런 선순환이 저한테 많은 자극이 돼요. 

 

왜 그런 수업을 만들었어요? 

제가 일을 시작할 때 이런 수업이 정말 필요했거든요. 취향을 찾기 위한 무드 보드, 리서치뿐 아니라 계약서와 견적서 쓰는 법, 어떤 프로젝트를 어느 정도 견적으로 임하고 영역은 어떻게 정하는지도 공유해요. 당시에는 아트 디렉션이라는 영역이 없었고, 어리고 경험이 부족해서 제가 하는 일을 뭐라고 부르고 얼마를 받아야 하는지 모른 채 일했어요. 제가 좋아하는 음악으로 리스트를 만들어 음악을 틀고, 손으로 그림 그려 공간 꾸미고, 메뉴판 디자인하고, 그 외에도 보이지 않는 많은 디테일을 디렉팅했지만 한 카테고리 안에 묶어두지 않아서 일은 많이 하고 제대로 된 대우는 받지 못했어요. 젊은 친구들이 아트디렉터라는 일에 자긍심을 가지고, 알맞은 돈을 받고 책임감 있게 자기 영역을 똑바로 얘기할 수 있기를 바라요. 

 

일을 개인적인 의미를 넘어서 사회적 차원에서 바라보는 거 같아요. 

혼자 할 수 있는 일은 제한이 많아요. 아트디렉터도 티 브랜드도 시장이 커지고 필드 자체의 힘이 생겨야 예산도 올라가고 재미난 일도 많이 생기죠. 제 MBTI가 ENFJ거든요(웃음). 오바마랑 같은 유형인데, 다른 사람에게 공유할 때 행복을 느껴요. 같이 얘기하면서 시너지를 일으켜 더 잘 만들고 규모도 크게 하고 싶어요. 제가 주거 공간을 아트 디렉팅 하지 않는 이유도 많은 사람이 오가며 경험하는 상업 공간이 훨씬 더 재미있기 때문이에요.

차도 좋아해서 선택한 카테고리예요? 

보리차를 너무 좋아해서 어린 시절 보리차를 끓여서 가지고 다녔어요. 다도를 배웠다거나 격식을 차려 엄청나게 비싼 차를 찾아서 마시는 편은 아니었고 일본과 영국에서 자연스레 차를 마시곤 했어요. 영국 친구들은 티백과 우유를 넣어서 밀크티를 먹고, 일본은 편의점에 차 종류가 정말 많아요. 점심시간에 오늘은 도시락에 무슨 차를 곁들일지 고민하는 게 일이었죠. 한국 차를 좋아하는데, 잘 알려진 녹차 브랜드가 하나고 제품이 다양하지 않아서 놀랐어요. 런던은 프리마켓이나 티 버스, 트럭에서 아기자기하고 자유롭게 스콘과 쿠키에 티를 곁들여 종이컵에 담아 팔아요. 일본도 티를 다양하게 발전시켜 티 페어링, 연구소도 만들고 있잖아요. 외국에서 우리나라 차를 너무 좋아하는데, 국내에서 저평가 받는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잘해보고 싶은데, 아트먼트뎁에 한국 기반의 FNB 프로젝트는 들어오지 않더라고요. 신세계 백화점에 팝업을 꾸리는 프로젝트를 하면서 마음에 드는 차 브랜드가 없어서 우리가 만들게 된 거예요. 하동 구청에서 우리와 잘 어울리는 농장을 알려주셔서 찾아갔어요. 녹차나 홍차보다는 호박차나 유자 또는 감잎차 등 티 종류를 다양하게 만들고, 티컬렉티브 색을 입혀 브랜딩 했죠. 클라이언트 컨펌 없이 내 취향대로 처음 만든 일이다 보니 재미있으면서 책임감이 커요. 

 

일본과 영국에서 공부하다가 다시 한국으로 왔고, 차를 주제로 브랜드를 펼쳐가는 것을 보면서 한국 정서에 뿌리를 둔다고 느꼈어요. 

한국에 훌륭한 것들이 많은데 브랜딩이 안 되어 늘 아쉬워요. 일본은 한국보다 뛰어나지 않은 것들도 스토리텔링을 잘해요. 한국이 이미 갖고 있는 걸 저는 잘 포장하여 세상에 소개해보겠다는 마음으로 시작한 거예요. 저는 차를 전문적으로 만든다기보다 적당한 공간에서 맛있고 편하고 예쁘게 마실 수 있는 티 브랜드를 만들고 싶었어요. 편하게 마시는 차도 있어야지, 너무 바쁜데 어떻게 모든 차를 시간을 들여 우려내 마셔요(웃음). 커피숍 가서 커피 사진을 찍는 친구들이 호박차 마시는 모습은 담지 않더라고요. 다른 나라는 티 마시는 것도 사진 찍고 공유하는 문화인데, 시대적 흐름을 못 따라간다는 느낌도 들었어요. 티컬렉티브를 라이프 스타일 브랜드로 확장하면서 한국적인 재료들에 더 주목해 보려고 해요. 저는 목욕탕의 쑥탕을 좋아해요. 한지도 좋아해서 사무 공간에 써본 적도 있어요. 선조부터 몸에 좋고 과학적으로 증명된 한국 재료들을 지금의 라이프 스타일에 맞춰 모던하고 아름답게 푸는 것이 목표예요. 외국인들에게 한국에 김치와 BTS만 있는 게 아니라 이렇게 아름다운 게 많다고 보여주고 싶어요. 

 

잘하는 일이라도 17년간 꾸준히 하는 건 쉽지 않죠. 원동력이 궁금해요. 

좋아하는 걸 일로 만들고 돈을 버는 거, 왜 안 어려웠겠어요. 오랜 시간 놓지 않았고, 다른 길을 보지 않았던 건 이 직업에 확신이 있어서예요. 누군가가 하고 있었는데 아트디렉터라고 정의되지 않았을 뿐이죠. 패션계에서는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라는 직업이 자리 잡았는데 그 외 영역에서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의 역할이 정립되지 않은 느낌이었어요. 브랜드를 꾸릴 때 디자인을 넘어서 전체적인 무드를 잡고 콘셉트를 이해하고 챙길 수 있는 역할이 점점 중요해지고 있어요. 또 무엇보다 소중한 아들이 있어서 지금까지 이어올 수 있었어요.

오랜 시간 일을 하고, 여러 사람을 만나며 삶의 우선 순위나 사람을 대하는 태도가 조금씩 변하고 다듬어지곤 하잖아요. 어떤 과정이었어요? 

저는 이혼을 했고, 부모님이 아이를 봐주셨기에 오랜 시간 가장으로 살았어요. 가장으로의 책임감과 일을 좋아하는 성격으로 열심히 일과 육아에 매달렸고, 무리했어요. 그러다 보니 나를 살피거나 돌볼 여유는 부족했던 거 같아요. 남자친구를 만나며 원래의 나를 찾아가는 거 같아요. 저보다 어리고 아들을 같이 키울 수 있을 거라는 기대없이 비슷한 관심사, 성향에 이끌려 만남을 시작했어요. 20대에 만났으면 좋았을 친구를 이제야 만난 느낌이에요. 치열하게 살면서 그때그때 힘든 시간이 닥쳤지만 긍정적으로 넘기려 노력했어요. 헤어진 사람을 미워하기보다 아이에게 아빠를 계속 보여주려고 제가 먼저 연락하죠. 불행해지지 않으려고 이혼한 거라서 부정적인 에너지를 더 이상 쓰고 싶지 않아요. 지금은 저도 편하고, 아이도 할아버지, 남자친구와 무탈하게 지내고 아이 아빠랑도 편한 사이예요. 저만 무리하지 않으면 돼요. 

 

무리하지 않는다는 게 어떤 의미예요? 

솔직하게 얘기하는 거요. 아들과 있을 때, 둘이 같이 좋아하는 건 함께 하는데 혼자 있고 싶으면 “엄마 오늘 말을 너무 많이 했어. 지금부터 15분 동안 말하고 싶지 않아.” 솔직하게 말해요. “엄마는 너와 둘이도 너무 행복한데 마트에 오면 잠깐 남편이 있으면 좋겠어. 짐이 너무 무거워(웃음).” 하면 아이가 고사리손으로 짐을 같이 들어줘요. 부모는 아이가 뭘 좋아하고 뭘 바라고 뭘 먹고 싶은지 파악하잖아요. 아이들은 그걸 못 한다고 여기는데, 아니에요. 아이들도 부모의 약한 점, 잘하는 점, 혼자 있고 싶은 순간, 좋아하는 걸 파악하고, 심지어 케어도 해요. 아이도 부모를 행복하게 할 때 기쁘거든요. 이런 마음을 먹은 건 돌아가신 엄마의 영향이 커요. 엄마가 너무 열심히 사셨어요. 저랑 동생 학비를 버신다고 1년에 두 번 쉬면서 힘들게 일만 하셨는데, 돌아가시기 1년 전 담배를 피우는 걸 알게 됐어요. 매번 숨어서 담배를 피웠을 엄마가 떠올라 너무 마음이 아팠어요. 늘 일만 하고 힘들다는 얘기도 안 하시고 좋아하는 것도 별로 없어서 제사상에 놓을 게 없어서 속상했어요. 미안함으로 한이 맺혀서 나는 절대 그러지 말아야지, 나도 행복해야지 마음먹었어요. 아이가 저 아니어도 기댈 수 있는 대상이 있으면 괜찮겠지만 이 아이는 저만 보고 있기 때문에 제가 무리하면 불행해질 거예요. 나중에 아들과 떨어져 지내도 엄마가 혼자 일하는 걸로 마음 아프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우리 엄마 좋아하는 거 하고 있겠지, 좋아하는 사람이랑 살고 있으니까 행복하겠지.’ 생각하길 바라죠. 내가 지금 좋아하는 것, 잘하는 것을 우선에 두니 마흔이 돼서 다시 나로 돌아온 느낌이에요. 

 

아들이 집에 오면 산책을 주로 나간다고요. 

집에 오면 남자친구 방에서 같이 놀고 게임하고 혼자 유튜브도 보다가 “엄마 밥 먹을까요?” 하고 물으면 같이 산책 가는 식이죠. 금요일은 남자친구도 같이 산책을 하고 주말은 보통 아들과 저, 강아지 셋이 산책해요. 보통 남산 주변을 걷다가 하얏트 호텔 옆쪽으로 돌아서 경리단길로 내려와요. 한 시간 정도 걷는데, 강아지가 30킬로이고 힘이 정말 세서 걷고 나면 만신창이가 되죠. 아들이 새로 생긴 카페에 가자고 하면 메뉴를 잔뜩 시켜 먹고, 길거리 구경도 해요. 친구네 가족과 같이 만나기도 하고요. 날을 정해 토요일은 아들이랑 편의점 빵 투어를 하고, 일요일은 제가 좋아하는 미술관에 가면서 번갈아 코스를 정해요. 특별할 것 없는 루틴이지만 처음으로 누려보는 안정감이에요. 

 

요즘 설레게 하는 일이 있다면요?

여행을 갈 수 있다는 거요. 결혼한 동생이 미국에 살고 있거든요. 방학마다 아들만 보내곤 했는데 조카도 태어났으니 같이 가서 보고 싶어요. 오랜만에 일본도 가고 싶고, 여행 다닐 생각만 해도 너무 설레요.

The Things That Make Me Myself

1. 빈티지 유리볼
손으로 모양을 낸 두꺼운 크리스탈로 프랑스 출장 중 택시를 타고 가다가 이 유리볼을 발견하고 차를 세웠어요. 유리를 아주 좋아하는데 특히 두껍고 무거워서 일반 유리에선 느낄 수 없는 질감과 투명한 색감에 매료돼요. 무게가 있어 앤틱 주인 할아버지가 극구 말리셨지만 무사히 한국으로 데려왔네요.

2. 코스타 브라질 인센스
전 캘빈클라인의 디렉터가 만든 브랜드로 브라질 정글에서 직접 채집한 수지로 만들었어요. 태우면 바스락거리는 나뭇잎과 순수한 지구 자연의 향이 나요. 아로마 효과가 있어 요가나 명상에서 잘 쓰이는 소재라고 해요. 심플한 스테인리스 용기와 인센스를 하나씩 올려놓는 타일 받침마저 시크하고 아름다워요.

3. 향수 콜렉션 트레이
수시로 향수를 뿌리고 기분 전환을 하기 때문에 다양한 브랜드와 콘셉트의 향수를 소장해요. 문 앞에 열 개, 방에 열 개 정도 두고 그날 기분에 따라 향을 선택하곤 하죠. 요즘 제일 좋아하는 향수는 카린 로이펠드Carine Roitfeld의 7 Lovers 시리즈예요.

4. 피카소의 빈티지 책
피카소의 서적은 계속 모으고 있는데 특히 해외에서 구입한 이 빈티지 서적은 보기 드문 피카소의 스케치가 가득 담겨 있어요. 소장 가치가 높아서 특히 곁에 두고 아끼는 책이에요.

5. 신라 토기
티컬렉티브 카페에서부터 눈에 보이는 곳에 두고 아끼던 토기예요. 단아한 형태와 비율, 컬러 어느 하나 빠지는 것 없이 아름다운 토기로, 주로 인센스나 숯 등을 넣어 두고 즐겨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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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디터 김현지

포토그래퍼 장수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