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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은정―작가
송은정 작가는 스스로를 ‘시작은 잘 하는 사람’이라고 말한다. 그녀에게 시작을 잘한다는 말은 결말을 상상하지 않는 것, 가능성이란 단어를 늘 곁에 두고 사는 것이다. 목적지 없는 걸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그녀는 오늘도 걷다가 멈추기를 반복했다. 멈춰서 발견한 것들은 우리에게 해사한 웃음을 건네주었다. 한적한 창경궁의 풍경, 수북하게 쌓인 낙엽, 잔잔한 호수의 물결. 여러모로 완벽한 오후였다.
《저는 이 정도가 좋아요》가 출간된 지 1년이 다 되어가요. 책속에 ‘출간 후 스트레스 후유증’에 관해서 이야기했는데요. 요즘은 어땠나요?
그 책을 쓸 당시 출간 후 스트레스에 시달리고 있었어요. 이번 출간 때는 나름대로 대비를 해야겠다고 생각했죠. 다른 집중할 수 있는 무언가를 찾아보기로 했는데, 그 출구가 비건베이킹이었어요. 수업도 듣고 공부를 꽤 열심히 했죠. 그런 시기에 책을 마무리하면서 집에서 하루 종일 빵만 구웠어요(웃음). 관심사를 다른 곳에 쏟다 보니 자연스럽게 출간 후 우울감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글 쓰는 행위가 나를 증명하는 유일한 수단이 아니라는 것을 의식적으로 느끼려 했어요. 계속해서 다른 나 자신에 집중하다 보니 더 이상 얽매이지 않게 됐고요. 그 덕에 늘 힘들었던 시기를 부드럽게 지나왔네요.
‘다른 나’에 집중한다는 말이 좋네요.
한 사람이 여러 정체성을 가지고 있는 게 좋다고 생각해요. 물론 하나의 ‘나’를 가지고 잘 살아가는 분들도 있지만 저는 오로지 글 쓰는 나 자신으로만 산다고 하면 마음이 옥죄어 와요. 왠지 더 대단한 것을 성취해야 할 것 같고 그러지 못했을 때 오는 좌절감이 아주 크고요. 특히 저와 비슷한, 제 또래 여성 작가분들이 너무 좋은 글을 썼을 때 놀라움도 느끼지만 그만큼 질투와 저 자신을 깎아내리는 감정에 힘들기도 해요. 그런 마음을 풀어내기 위해서 선택한 방법이 글이 나의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인지하는 거였어요. 저는 글을 쓰지 않아도 괜찮은 나이고 싶어요. 그게 요리든 베이킹이든 산책이든 글 이외의 더 많은 삶의 요소를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인터뷰 장소로 창경궁을 추천했어요. 이곳은 주로 언제 산책하나요?
회사가 이 근처에 있어서 점심시간에 산책할 때가 많아요. 창경궁 주변 골목길을 지나 혜화역까지 걷기도 하고요. 창경궁은 다른 궁과 비교했을 때 위압감이 덜해요. 공원에 가까운 느낌이 있죠. 그런 편안함이 좋아요. 평일 대낮에 궁을 걷는 사람들을 보면 마음에 안도가 되기도 하고요. 생각해 보면 궁을 걷는 사람들 중에 다급한 사람은 없어요. 뭔가에 쫓기는, 바쁜 사람들이 궁에 와서 걷지는 않는 것 같아요. 그런 사람들이 산책하는 풍경, 멋진 나무들, 고양이들까지. 모두 어우러진 창경궁을 걷고 있으면 여유로워져요.
여유 있는 사람들을 마주한다는 게 어쩌면 행운이기도 해요.
그렇죠. 마치 그런 기운이 저한테 옮겨 오는 것 같아요. 늘 회사에 있다가 산책을 나오는데 일하면서 생긴 긴장이 풀어지는 면도 있고요. 장소가 풍기는 호젓함에 감탄하기도 하죠.
어떨 때 산책이 필요하다고 느끼나요?
음…. 돌이켜 보면 일정한 패턴이 있어요. ‘일단멈춤’이라는 책방을 운영했을 땐 언제 찾아올지 모르는 손님들을 위해 같은 자리를 지켜야 한다는 것이 못 견디게 힘들 때가 있었어요. 그래서 잠시라도 문을 닫고 근처를 산책하고 왔죠. 프리랜서일 때는 일을 모두 마친 뒤에 한 시간씩 걸었고요. 그 시간들이 해방감을 주기도 하고 마치 근로자에서 생활인으로 돌아오는 과정으로 느껴지기도 했어요. 지금도 그래요. 어떤 상황이 버겁다고 느껴질 때 저 자신을 가볍게 하고 싶어서 걸음을 택해요.
저는 산책이 작은 여행과도 같다고 생각해요. 산책과 여행의 공통점을 찾아보면 모두 ‘우연한 발견’이 있다는 점이고요. 작가님이 걷고 여행하면서 우연히 발견한 것들은 무엇인지 궁금해요.
산책을 하다 보면 신기하게도 늘 실마리가 보였어요. 글을 쓰다 보면 막히는 시기가 있잖아요. 글 쓰는 이외의 순간에도 그렇고요. 어떻게 하면 좋을지 전혀 갈피를 못 잡고 있을 때 포기하는 심정으로 산책을 나갔는데 우연히 해답을 찾은 적이 많아요. 걷다 보니 자연스럽게 보이는 것들이죠. 그런 일은 시장에 가서 과일이나 채소를 고를 때, 핫도그를 사 먹는 사소한 때에 벌어져요. 장 그르니에Jean Grenier의 《일상적인삶》에 ‘결국 산책이란 우리가 찾을 생각도 하지 않고 있는 것을 우리로 하여금 발견하게 해주는 수단이 아닐까?’라는 문장이 있어요. 굉장히 와닿는 말이었죠. 바라지 않았고 기대하지 않았던 것들이 우연하게 찾아오는 순간, 산책을 넘어서 여행할 때도 마찬가지고요.
어떤 발견들이었는지 궁금해요.
걷는 행위를 머릿속 그림으로 상상했을 때 내가 나에게서 멀어지는 모습이 연상돼요. 나로 출발해서 타인이든 어떤 세계든 그 바깥으로 걸어가는 모습을 떠올리게 되죠. 그러면서 나자신과 얼마간 거리를 만든다고 생각해요. 오히려 지독하게 자신에게 골몰했을 때보다 많은 것들을 볼 수 있어요. 글을 쓴다는 것은 어쨌든 계속해서 나에 대해서 고민하고 쓰는 일의 연속이잖아요. 그러다 보면 어느 순간 나 자체가 너무 징그럽고 지겹게 느껴질 때가 와요. 결국 ‘나가 뭔데?’ 하는 지경까지 이르는 거죠(웃음). 그래서 저는 걷는 일을 신뢰해요. 나와 멀어져 자신을 객관적으로 볼 수 있는 상태를 만드는 과정이에요.
주로 혼자 걷기를 좋아하실 것 같아요.
맞아요. 남편과 산책하는 일이 잦은데 가끔 혼자서 걸어도 되겠냐고 물을 때가 있어요. 따라오지 말라며(웃음). 어쩌면 고독한 시간이 필요한 것 같아요. 혼자이고 싶은 순간이 늘 있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군가와 걷는다면 어떤 사람과 함께이고 싶어요?
제주도 여행을 했을 때 시험림을 같이 걸은 친구, 그리고 지금 다니는 회사 동료 과장님. 이렇게 두 사람이 떠오르네요. 둘의 공통점은 발견과 감탄을 잘하는 사람들이라는 점이에요. 함께 걷다 보면 수시로 걸음을 멈추게 돼요. 작은 것에 금방 감탄하고 놀라워하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저 혼자서는 발견하지 못하는 것을 찾을 때가 있어요. 같이 나무 이름, 꽃 이름 하나하나 알게 되는 것도 재미있고요. 삶에 큰 지식을 쌓고 있다는 생각도 들어요.
종종 목적지 없는 걸음에 관한 이야기를 하기도 해요.
처음부터 목적 없이 떠나거나 걷는 일을 즐기지는 않아요. 여행이든 산책이든 언제든 목적지가 예상과는 달라질 수 있고 길을 잃을 수도 있고 또는 갑자기 변경될 수도 있잖아요. 저는 그런 상황을 마주했을 때 잘 받아들이는 사람인 것 같아요. 오히려 그 순간을 즐기는 면이 있죠. 처음엔 당황스러워서 길을 찾으려고 애쓰던 시간들도 있었어요. 오히려 그런 경험을 반복하면서 새로운 곳을 우연히 발견하는 기쁨에 대해서 배웠어요. 원래 가려고 했던 곳은 아니지만 저에겐 이미 그곳이 목적지가 되었고 너무나 완벽한 여행이 된 거죠. 영화 <런치박스>(2013)의 “잘못된 기차가 결국엔 우리를 목적지로 데려다줄지도 모른다.”는 문장을 자주 생각해요.
뜬금없지만 어릴 때 어떤 아이였는지 궁금해요. 어릴 때도 산책을 즐겼나요?
처음 받아보는 질문인데요(웃음). 오히려 반대였어요. 아주 어릴 때, 남동생이 태어나기 전까지 집 밖을 못 나가고 무서워했다고 해요. 엄마 옆에 찰싹 붙어서 유년기를 보낸 거죠. 산책과 여행을 좋아하는 지금의 제 모습을 보면 그러기 위해서 부단히 노력했다는 생각이 들어요. 주변에서 종종 제가 여유가 많은 사람이라는 이야기를 듣곤 하는데요. 저는 사실 그 여유를 갖기 위해 꾸준히 연습해 왔어요. 원래 그런 기질을 가진 사람이 아니었죠. 의식적으로 내 시간과 공백을 만들며 연습한 결과가 지금의 저라고 생각해요.
필요한 것을 무의식적으로 느끼고 자연스럽게 쌓아온 거네요.
어느새 그런 어른이 된 것 같아요(웃음). 그렇다고 생각하고싶고요.
‘일단 멈춤’이라는 문장에 관해서 묻고 싶어요. 예전에 열었던 책방 이름이기도 하고 지금 SNS 계정 이름이기도 해요.
처음 ‘일단멈춤’이라는 책방 이름을 지었을 때가 가물가물하네요(웃음). 벌써 6년 전 이야기니까요. 지금 생각해도 신기할만큼 그 문장에 완전히 사로잡혔어요. 정말 나에게 필요했고 나 자신에게 하고 싶은 말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책방 테마는 ‘여행’에 맞춰져 있었지만 일단 멈춤이라는 문장은 좀더 포괄적인, 삶의 태도에 더 가까운 이름이었죠. 사실 ‘잠깐 멈춤’, ‘잠시 멈춤’ 등 여러 틀린 이름들로 불리기도 했는데요(웃음), 저에겐 반드시 ‘일단’이어야 했어요.
왜 ‘일단’이었나요?
저에게 ‘일단’은 너무 많은 걸 계산하지 않는 표현이에요. 일단 멈춘 다음에 생각해 볼 수 있다는 의미가 있어요. 늘 그냥 움직이기만 하면 그 상태로 쭉 나아가기만 할 뿐 다른 변화를 기대하기 어렵잖아요. 일단 멈추고서 한 템포 숨을 골라보는거죠. 당시 회사 일에 너무 지쳐 있어서 저한테 필요한 말이기도 했어요. 직장을 다니기 전에 북아일랜드에서 살다 와서 그 괴리감에 더 힘들었거든요.
북아일랜드요?
20대 중후반이었을 때 이야기예요. 출판사 편집자로 일하고 있었는데 20대를 일만 하고 보내기에는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어요(웃음). 그때는 마지막이라는 생각에 조급하기도 했고요. 회사를 그만두고 당장 떠나야겠다는 결심을 했죠.
결심이 어렵지 않았나요? 일상에 너무 큰 변화잖아요.
결심은 빨랐어요. 오히려 너무 많은 것들이 계획되어 있다는 사실이 더 공포스러웠죠. 일을 하면 경력은 계속 쌓일 테고 남자친구랑도 문제가 없으면 결혼하게 될 예정이고요. 어떤 그림이 착착 그려지는 게 더 무서웠어요. 너무 빤하게 내 삶이 흘러가게 될 거라는 생각에 겁이 났죠. 제동을 걸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계속 멈추고 다시 걷는 일을 반복한다는 생각이 들어요.
맞아요. ‘일단멈춤’이라는 책방 이름처럼 살고 있다고 생각해요(웃음).
대단해요. 퇴사를 하고 책방을 열었던 것도 용기가 아니었다고 말했는데요. 아무리 생각해도 저는 용기라는 말밖에 설명할 표현이 없는 것 같아요.
정말 이 정도의 용기였다고 밖에 이야기를 할 수 없어요(웃음). 만약에 제가 더 큰 용기가 있는 사람이었다면 대출도 받았겠죠. 더 규모 있게, 많은 걸 버리면서 책방을 열었을 거예요. 그런데 저는 빚을 지면서까지 사업에 도전할 만한 용기는 없었어요. 감당할 수 있는, 책임질 수 있는 만큼이 책방 일단멈춤의 정도였어요. 단순히 용기만의 문제가 아니에요. 모든 사람들이 어떤 큰 도전을 했을 때 단순히 용기를 냈다고 말할 수 있는 건 아니라고 생각해요. 각자의 환경이 지대한 영향을 준거죠. 당시의 상황, 여윳돈, 염리동 소금길의 그 공간, 모든 것이 잘 맞아서 제가 낼 수 있었던 용기의 결과물이 일단멈춤이었어요.
아, 맞아요. 일단멈춤은 염리동 소금길에 있었죠. 어떤 동네였나요?
처음 갔을 때 굉장히 놀랐어요. 지금은 문을 닫았지만 그 당시 40년 된 문구점이 있었고, 한곳에서 오래 터를 잡고 살아간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동네였어요. 책방을 운영하는 2년동안 좋아하는 장소들이 많이 생겼어요. 어느 길에 올라서 어느 집 앞 골목으로 올라가면 신촌 일대가 내려다보이는 장소가 있었어요. 노을이 잘 보이는 자리였죠. 지도로 명확히 찍을 수 없는, 단순히 길을 걷다가 발견할 수 없는 곳들을 찾는 재미가 있었어요. 그렇게 산책하면서 좋아하는 길을 걷고 다시 책방으로 돌아오면 약간 다른 내가 되어 있다는 느낌을 받곤 했어요. 고민과 스트레스는 그대로였지만 조금은 다른 내가 된 기분에 위로를 받았죠.
책방에 다녀간 손님들도 많았어요. 지금 떠오르는 사람이 있나요?
저는 기억력이 좋지 않은 편인데, 절대 잊히지 않는 사람이 있어요. 책에도 썼던 연애 상담을 하셨던 분이요. 제 인생을 통틀어 굉장히 신기한 경험이었어요. 전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죠. 봄이 막 시작될 무렵이라 햇살이 엄청 들어오고 있었고, 저는 분갈이를 하며 정리를 하는 중이었는데 저에게 말을 거시더라고요. 한참을 앉아서 그분이 겪은 사랑 이야기, 마음의 풍랑들을 듣게 됐어요. 저도 뭐라도 이야기를 해야 할 것 같아서 조언을 한답시고 주절주절 제 이야기를 했죠(웃음). 정말 신기했어요. 책방 주인이란 건 대체 뭘까, 질문도 던져보게 됐고요. 종종 손님들이 저에게 진로 고민이나 일종의 인생 상담을 하셨거든요.
왜 그랬을까요?
책방이 주는, 그 공간 자체가 주는 분위기에 답이 있지 않을까요? 저는 모르겠지만 비밀을 털어놔도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만드는 어떤 힘이 있던 게 아닐까 생각해요. 정작 저는 ‘내가 뭐라고’라며 속으로 말하곤 했죠(웃음). 너무 소중한 경험이에요. 어떻게 처음 보는 저를 신뢰하고 솔직한 이야기를 들려준 걸까, 아직도 미스터리해요.
작가님이 호감을 주는 인상이었던 거죠(웃음). 책방을 닫을 때 했던 이야기도 기억에 남았어요. 좋아하는 것을 좋아하는 대로 두기로 한 건가요?
그랬다기보다는 인정을 했던 것 같아요. 좋아하는 일은 잘하지 않으면 너무 괴롭더라고요. 좋아하는 만큼 어떤 수준에 오르지 못했을 때 오는 자괴감이 너무 컸어요. 내가 책을 정말 좋아하는 사람이지만 책방 주인으로서는 부족했다는 것을 인정하기로 했어요. 좋아하는 것과 잘하는 것은 별개 일인 거죠. 알고 인정하니 저 자신에 대한 실망과 부끄러움이 서서히 누그러졌어요. 어려운 결정에 스스로 설득이 되었던 것 같아요. 그렇게 마음 편하게 책방을 닫을 수 있었고요.
또 책방을 열 생각이 있나요?
없어요(웃음). 최근에 지인에게 같은 질문을 받기도 했는데요. 물론 아예 없지는 않아요. 실은 좋은 아이디어가 떠오르기도하고 이제는 좀더 잘해볼 수 있다는 생각도 하고요. 그런데 저는 읽고 쓰는 삶이 더 잘 어울리는 사람인 것 같아요.
책 속에 실린 사진들도 참 좋아요. 어떤 순간에 카메라를 드나요?
그 질문을 받고 지금까지 찍은 사진들을 쭉 열어봤는데요. 이상하게 혼자 있는 어떤 사람의 사진이 많았어요. 홀로 뭔가에 골몰해 있는 사람, 의연하게 혼자서도 잘 살아갈 것 같은 느낌을 풍기는 사람들이었죠. 실제 그 삶은 잘 모르지만요. 어쩌면 그런 사람이 되고 싶어서 담으려 했는지도 몰라요. 혼자서도 씩씩하게 여행도 잘하고 밥도 잘 먹고(웃음). 무의식적으로 원했기 때문에 그런 사람들과 마주했을 때 카메라를 들었을 거라고 생각해요.
지금 떠오르는 사람이 있나요?
칠레 여행 중 만난 할머니인데요. 아타카마 사막에서 노을을 볼 때였어요. 아주 높은 언덕에서 해가 지는 멋진 풍경을 바라보는데 엄청나게 많은 관광객이 몰려와 있었어요. 모두 집중하면서 카메라를 들고 있었고, 저도 그중에 일부였죠. 치열하게 사진을 찍고 있는데 할머니 한 분이 사람들 무리에서 한걸음 물러나 평화로운 표정으로 노을을 바라보고 계시더라고요. 그 장면이 아직도 안 잊혀요. 순간 저 자신이 아주 작아졌어요. 그 시간을 제대로 누리고 있는 사람은 할머니뿐이었죠. 얼굴에 드리운 노을빛, 떠들썩한 사이에 그분만의 세계가 완성된 느낌이었어요. 저런 사람이 되어야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정말 아름다웠어요.
사진이 궁금하네요. 요즘 읽은 책들에서도 유난히 할머니가 등장하는 글이 많았다고 들었어요.
맞아요. 신기하게도 화자가 할머니거나 할머니라는 존재가 등장했어요. 사노 요코의 《친애하는 미스터 최》, 유진목의 《디스옥타비아》, 정세랑의 《시선으로부터,》, 무루의 《이상하고 자유로운 할머니가 되고 싶어》까지. 이 책들이 올해 저에게 아주 좋은 영향을 주었어요. 윗세대 중년 여성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기회가 늘 부족하다고 생각했는데 근래에 이런 갈증을 해소하게 돼서 좋았어요. 그전에는 저의 늙음을 상상하는 게 무척 어려웠어요. 항상 외적인 모습만 상상했죠. 주름이 있고 허리를 펴지 못하고 신체적으로 어떤 불편함이 있거나 노화된 여성의 모습을요. 늘 너무 두렵기만 했는데 앞에 얘기한 책들을 읽으면서 겉으로 보이는 늙음보다는 내면의 나이듦, 어떻게 내 윤곽을 잡아가야 할지 고민하는 계기가 됐어요. 뭐랄까, 내가 노력한다면 원하는 모습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 기뻤어요. 노화는 막을 수 없는 거잖아요. 시간이 지나면 나는 늙어버리는 건데 언제나 수동적으로 받아들여왔다면 지금은 좀더 주체적으로 나의 늙음을 준비해야겠다는 생각을 조금씩 하고 있어요.
책에서 쓰고 지우는 일을 반복할수록 좋은 사람이 되어 간다고 말하는 구절이 있어요. 어떤 의미일까요?
쓰고 지운다는 게 결국 다시 생각한다는 의미잖아요. 단언하지 않고 섣불리 판단하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거죠. 그 일련의 과정이 저를 좀더 나은 사람으로 만드는 것 같아요. 오만하지 않게 만들어 주는 거죠. 글을 쓰고 지우는 일은 너무 어려워요. 제가 쓴 서툰 문장을 바라보는 건 큰 고통이죠. 다른 책들도 많이 읽고 여러 문장을 참고해 고쳐 가면서 저 자신이 긍정적으로 변화한다고 느끼는 순간들이 있어요.
글 쓰는 건 정말….
어렵죠(웃음). 글 쓰는 과정도 어렵지만 더 어려운 건 글을 고치기 위해서 내 생각을 의심하는 시간이에요. 내가 맞는 건가, 혹시 누군가를 속이고 있는 건 아닐까, 누군가를 혐오하고 있는 건 아닐까, 실례를 범하는 것은 아닐까, 대상화하고 있는건 아닐까…. 다시 쓰기 위해서 나를 점검하는 과정이 정말 두렵더라고요. 그런 것을 하나씩 잡고 고쳐갈 때마다 그래도 내가 민폐를 덜 끼치겠구나(웃음), 어떤 사람들에게 상처를 줄 가능성을 줄이겠구나 생각하고 있어요.
이제 마지막 질문이에요. 나중에 어떤 산책을 하는 할머니가 되고 싶어요?
음…. 산책을 하는 할머니의 모습보다는 그 산책길을 가꾸는 할머니의 모습이 상상 돼요. 교토에서 집 앞을 비질하는 할머니들을 보면서 누군가의 산책길을 정돈하는 일도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북아일랜드에서도 크리스티나라는 할머니가 본인 집 앞에 튤립을 열심히 심고 계셨는데 그 모습이 무척 아름답더라고요. 가든 작업복에 운동화를 신고 흙을 만지며 정원을 가꾸는 풍경이 아주 멋졌어요. 나이가 들면 많이 걷지는 못하더라도 누군가가 걷는 길을, 또는 우리 집 주변을 잘 가꾸는 사람이 되면 좋겠다고 생각해요.
에디터 김지수
포토그래퍼 최모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