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요일, 경칩, 서귀포 그리고

뜻밖의 다정함

이 글에서 매화 향기가 난다면 좋겠다.

꽃이 피었다는 연락

“이번 주 목요일에 날씨 좋으면 매화 차회 할래?”
“좋지!”
목요일은 개구리와 벌레 등 크고 작은 생명들이 겨울잠에서 깨어난다는 경칩이다. 따뜻한 남쪽 섬 제주 곳곳에 매화가 피기 시작했고, 이러다 매화가 훌쩍 지기 전에 서귀포의 한 공원에 가서 야외 차회를 하기로 했다. 하지만 막상 목요일이 되니 고민이 된다. 마감이 임박한 글과 쌓여 있는 일을 두고 지금 한가하게 차를 마시러 갈 때인가? 고민하다 자리에서 박차고 일어나 자동차 시동을 걸었다. 어떤 글은 바깥공기를 맡아야 완성되기도 한다, 고 내가 나를 설득했고, 설득당했다. 언제나 나를 꼬시는 게 제일 쉽지. 한 시간을 달려 공원에 도착했다.

와, 저기 매화! 아직은 겨울 냄새가 더 진한 황량한 공원 안쪽에 매화나무 군락이 있다. 화사하게 만개한 하얀 매화가 눈에 들어오자 곧 코로도 향이 들이닥친다. 매화에서 이런 향이 나는구나. 처음 맡아보는 것처럼 반가워하며 꽃에 코를 박고 킁킁거렸다. 역시 오길 잘했다. 글과 글 사이 매화 향을 맡고 왔으니 글에서 은은한 매화 향이 나면 좋겠네.

나무 아래 돗자리를 펴고 앉아 친구가 준비해 온 홍차와 우롱차, 백차를 차례대로 마셨다. 조금 쌀쌀했지만, 차를 마시니 속이 금방 따뜻해졌고, 더불어 햇살도 부드럽게 등을 데워주니 더할 나위 없이 좋았다. 이내 껴입고 간 겉옷을 벗었다. 간간이 불어오는 바람은 그때마다 살랑 매화 꽃잎을 날려 주어 오히려 좋다. 찻자리 위로 이리저리 날린 꽃잎을 굳이 손으로 쓸어내지 않고 그냥 두었고, 꽃잎 하나가 찻잔에 들어가기라도 하면 반가워 사진을 찍었다. 머리에 꽃잎이 떨어졌다며 서로 바라보며 웃기도 했다. 그 역시 굳이 털어내지 않았다. 두 시간 남짓 차를 마시는 동안 선생님 손잡고 나들이 온 어린이집 꼬마들을 만났고, 산책 나온 강아지를 열 마리도 넘게 봤다. 봄인가?

앙상한 나무들 사이, 작은 꽃이라도 만나면 ‘봄인가?’ 하는 마음이 급하게 들곤 한다. 겨울 지겨워. 봄이었으면. 꽃 하나에 희망을 갖는다. 하지만 아직 봄이라고 하기엔 이르다. 끝나지 않을 것 같은 겨울과 오지 않을 것 같은 봄 사이, 지독한 3월 환절기에 매화는 봄을 예고하듯 가장 먼저 핀다. 그래서 아주 오래전부터 사람들은 매화를 그리고, 매화에 대해 썼던 걸까. 끝나지 않을 것 같은 나의 겨울을 버티다 보면 꽃이 필 거라는 걸 매화가 말해주니까. 아직은 패딩을 벗지 못하는 계절 한라산을 넘어 매화꽃 향기 속에 앉아 있다가 온 일이 아무래도 비현실적이라 주절주절 겨울과 매화와 봄에 대해 쓰게 된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따뜻한 서귀포. 서귀포에는 봄이 성큼 와 있었다고. 목요일, 경칩, 서귀포… 그곳으로 봄을 마중 나가 차를 마셨다고.

봄을 가장 먼저 만나는 섬에 사는 건 꽤 멋진 일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봄은 어김없이 북쪽 방향을 향해 이동하고, 매화는 봄이 시작되려는 곳 어디에나 있겠지. 파주, 분당, 수원, 양평, 서울…의 다정한 이들이 매화 향기를 놓치지 않았으면.

낭만의 조건

친구는 이렇게 종종 연락을 한다. 친구를 처음 알게 된 후부터 지금까지 몇 년간, 벚꽃이 한창인 4월이면 벚나무 군락지인 골체오름에서 벚꽃 차회를 하고, 5월 귤꽃이 피면 무농약 농사를 짓는 귤밭에 가서 귤꽃 차회를 하고, 초여름이면 선흘리 습지에 가서 연꽃 차회를 했다. 보름달이 뜨는 추석에는 테라스에서 달빛 차회를 한다. 아니, 신선들의 이야기 아니고 진짜 경험한 일이냐고? 네. 진짜로, 우리는 계절마다 계절과 가장 가까운 곳으로 가서 차를 마십니다. 어려운 일이 아니다. 아니 몹시 어려운 일이다.

“와, 이 차는 차실보다 오히려 밖에서 먹으니까 더 좋네.”
“차는 바깥에서 마시는 게 항상 맛이 좋아. 좋은 장소에서.”

차를 가장 맛있게 마시기 위해, 친구는 귀찮아하지도 않고 끓인 물과 다기, 찻상과 돗자리 등을 어디든 들고 간다. 친구의 수고로움 덕분에, 제주에 살면서도 바깥나들이를 잘 하지 않는 나도 계절을 좀 더 가까이에서 능동적으로 만나고 있다. 친구 덕에 삶에 낭만이 더해졌다. 낭만이라니. 그리고 알게 되었다. 낭만은 나에게 잘해주는 일이고, 나에게 잘해주는 일에는 수고로움이 동반된다. 그러니 실은 부지런한 자만이 낭만을 누릴 수 있지. 혹은 친구 잘 만난 사람이거나.

다산 정약용의 문예 모임 ‘죽란시사’ 규약이 떠오른다.
“살구꽃이 피면 한 번 모이고, 복숭아꽃이 처음 피면 한 번 모이고, 한여름에 참외가 익으면 한 번 모이고, 초가을 날씨가 서늘할 때 서쪽 연못에서 연꽃 구경을 위해 한 번 모이고, 국화가 피면 한 번 모이고, 겨울철 큰 눈이 내리면 한 번 모이고, 세모에 화분의 매화가 피면 한 번 모이는데, 모일 때마다 술과 안주, 붓과 벼루 등을 준비하여 술을 마시며 시를 읊는 데 불편이 없도록 한다.”
친구와 함께하는 찻자리가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정약용이 부럽지 않다.

언제나 생각해 왔다. 제철 음식을 가까운 이들과 나누며 살 수 있다면 그것이 성공한 인생이라고. 내가 동네에 맛있는 빵집이 생기면 갓 나온 빵을 사 들고 친구에게 가는 것처럼, 친구는 꽃이 피면 그 꽃과 어울리는 제철 차를 꺼내 들고 연락을 하는 거겠지. 찻자리는 다정한 마음이기도 하네.

새로운 언어

친구는 중국인이다. 친구를 처음 만난 건, 제주 중산간 어느 요가원에서였다. 여의도 증권가에서 일을 하다 최근 그만뒀다는 친구는 쉬면서 요가를 하고 싶어 제주에 ‘한달살이’를 왔다고 했다. 내가 다니던 요가원은 한 동작을 오래오래 하는 편이었다. 가령 ‘부장가’라는 아사나를 30분씩 했다. 놀랍게도 30분 동안 회원들 모두 부동으로 버텼다! 고요한 공기 속에서 오로지 나와 친구만 팔을 내리고 동작을 멈추곤 했다. 그래서 친구랑 자꾸 눈이 마주쳤다. 나는 버티고 버티다 어쩔 수 없이 내려온 거고, 친구는 무리하지 않고자 스스로 내려온 거라 사정은 조금 달랐지만, 어쩐지 동질감이 느껴졌다.

하타 요가는 수련이 끝나면, 두런두런 모여 앉아 보이숙차를 나눠 마시곤 한다. 친구는 그때마다 먼저 자리를 떴다. 그때만 해도 나는 보이차가 중국 차인지 몰랐다. 아니, 마시던 차가 보이차인 줄도 몰랐던 것 같다. 어느 날, 친구가 집에 초대해 차를 내려주었다. ‘이게 보이숙차고 이게 보이생차야.’ 친구는 생전 처음 보는 아름다운 다기로 차를 내려주었다. 그때부터 틈만 나면 같이 차를 마셨다. 제주에 좀 더 머물기로 한 친구는 ‘일년살이’ 집을 구했고, 집 한편에 작은 차실을 차렸다. 중국차를 사람들과 제대로 나누고 싶은 것 같았다. 그 마음이 어떤 마음인지 알 듯했다. 나는 덕분에 자연스럽게 차와 가까워졌다.

요가 하다 만난 우리는 이제 요가는 하다 말다 하지만, 벌써 6년이 넘도록 차는 같이 마신다. 친구는 ‘일년살이’가 끝난 후, 집을 짓고, 현재 제주 선흘리에서 차실을 운영 중이다. 그러는 동안 나는 친구와 함께 찻잎을 따러 윈난성에 다녀왔고, 백차와 홍차, 녹차, 우롱차, 황차, 보이차 등등을 맛과 향과 잎으로 구분할 수 있게 되었다. 커피보다는 차로 하루를 시작하는 일이 많아졌다. 나에게 새로운 언어가 생겼다.

차를 가운데 두고

최근 친구와 같이 유튜브를 시작했다! 친구는 차에 대한 이야기를 좀 더 많은 사람들과 나누고 싶다며, 차 콘텐츠를 같이 만들자고 했다. 하지만 아직 영상 촬영도 편집도 경험이 미천해 자신이 없다. 내가 머뭇거리자 친구는, 영상을 잘 만드는 사람보다 차를 잘 아는 사람과 함께 일하고 싶다고 말했다. 그래, 그러자. 차와 천천히 친해진 것처럼, 하다 보면 영상과도 친해지겠지.

채널을 만들었다. 재생 목록은 두 개다. 하나는 ‘절기 찻자리.’ 절기마다 어울리는 차와 다기를 가지고 차를 마신다. 그것뿐이다. 타닥타닥 숯불 피우는 소리, 사락사락 찻잎 더는 소리, 보글보글 물 끓는 소리, 꼴깍 차 마시는 소리만 들린다. 동지부터 시작한 찻자리가 절기마다 차곡차곡 쌓이고 있다. 고요한 찻자리를 바로 곁에서 숨죽여 지켜보면서 차에 대해 조금 더 알아가고 있다. 찻자리에서 나는 향기, 찻자리가 내는 소리… 그런 것들이 내 안에 쌓여간다. 언어를 체화하는 시간이다. 다른 하나는 ‘100명의 한국인 친구와 찻자리.’ 차를 가운데 두고 다양한 이야기를 나누는 대화 콘텐츠다. 지금까지 두 명의 한국인 친구를 만났다. 첫 번째 친구는 요가와 차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었고, 두 번째 친구는 세계를 여행하며 만난 차 문화에 대해 이야기했다. 아직 아흔여덟 명이 남았다.

내 오랜 작은 꿈은 다큐멘터리 감독이 되는 것이다. 간절함이 없는 흐릿하고 막연한 꿈이지만, 그 꿈을 꾼 지는 꽤 오래되었다. 잠시 간절했던 시절 캠코더를 하나 사두기도 했다. 하지만 그것뿐이고 아직 다큐멘터리를 찍은 적은 없다. 다큐멘터리는 아니지만 유튜브 영상을 찍고 편집하며 어쩌면 꿈에 가까워지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을 종종 한다. 내가 영상 편집을 하게 될 줄이야! 이건 어쩌면 나에게 겨울 견디고 핀 매화 같은 게 아닐까.

그 사람을 알게 되기 전으로 결코 돌아갈 수 없는 만남이 있다. 친구 덕분에 중국에 대해 가지고 있는 모든 편견이 깨졌고, 차를 만났으며, 영상 콘텐츠를 제작하게 되었다. 차가 나를 영상으로 데리고 올 줄은 상상도 못 했으니, 이 영상은 나를 또 어디로 데려다줄지 지금은 누구도 알 수 없다. 그 끝에 매화가, 벚꽃이, 백일홍이, 연꽃이 있었으면 좋겠다. 뭐, 매화로도 충분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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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정다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