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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세연 — 영화감독
오세연의 사랑에는 모서리가 없다. 그의 사랑은 멈출 수 없는 바퀴처럼 쉴 새 없이 굴러가고, 끝을 알 수 없는 우주처럼 거듭하여 팽창한다. “심장이 뛰고 있으니까, 어떤 대상을 향한 마음도 죽지 않고 이어지는 거겠죠.” 그의 맞은 편에 앉아 지난한 세계 속에서도 사랑을 지속할 수밖에 없는 이유에 대해 듣는 동안 시시각각 변하는 표정을 본다. 무언가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이렇게나 행복해 보이는구나 싶어진다.
종강하셨죠? 방학 라이프를 즐기고 있나요?
방학한 지는 얼마 안 됐어요. 연재 요청이 많이 들어와서 최근까지도 글 쓰면서 바쁘게 지냈어요. 틈틈이 영상 작업도 하고요.
<성덕>(2021)을 세상에 선보이고 난 뒤 시간이 조금 흘렀어요. 몇 년간 영화를 만들고 상영하면서, 과거의 오세연을 이해하고 행복을 빌어주는 시간을 보냈을 것 같은데요. 회고해 보자면 어떤 시간이었는지 궁금해요.
<성덕>을 만드는 과정도 굉장히 길었고, 개봉까지도 꽤 오랜 시간이 걸렸거든요. 대부분의 감독님들께선 개봉하고 나서 한두 달 이후에 극장에서 영화를 내리는 시점에 복잡미묘한 감정을 많이 느낀다고 하더라고요. 저는 오히려 개봉 전날 뒤숭숭했어요. 그때 많이 울었거든요. <성덕>이 개봉까지 하고 나면 더 이상 이 영화로 할 수 있는 일이 끝나는 것 같았어요. 영화를 찍을 땐 미션이 계속 주어지잖아요. 그날까지 잘 살아서 달려가야지 하는 생각이 들었는데 개봉을 앞두고 나니 이제 진짜 끝이다, 싶었어요.
뭔가 자식 다 키운 부모의 마음처럼 느껴져요.
그 비유가 딱 맞는 것 같아요.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처음 상영할 때부터 물가에 내놓은 애 보듯이 제 영화 뒤를 졸졸 따라다녔거든요. 매번 영화관에 가서 관객들과 함께 영화를 보면서 ʻ사람들이 어떻게 반응할까?’,ʻ이 장면에서 사람들이 웃을까?’ 하고 궁금해했어요. 그렇게 지내다 보니까 떠나보낼 때가 오더라고요.
걱정이 무색하게도 <성덕>은 많은 사람의 사랑을 받았죠.
개봉하고 나서 엄청 많은 일들이 일어났어요. 사실 지금 하는 모든 일들이 <성덕> 덕분에 시작하게 된 거거든요. 저한테 많은 기회를 열어준 영화니까 너무 고맙죠. 때로는 두렵기도 해요. 제가 <성덕>을 만든 오세연이 아니라 ʻ성덕’ 그 자체가 되어버린 것 같아서요. 저도 메일 보낼 때 “안녕하세요, 성덕 오세연입니다.”하고 보내게 되더라고요.
내가 만든 영화를 뛰어넘어야 하는 상황이 왔군요.
맞아요. 영화의 존재감이 저보다 더 커진 거죠. 제가 가보지 못한 데에도 자기 혼자 가 있고요. 때로는 성덕 오세연이라고 소개하는 게 부담도 되고 영화가 미울 때도 있지만, 그럼에도 이 모든 게 이 영화가 저한테 가져다준 행운이라고 생각해요. 애증의 관계죠.
내 이야기가 많은 사람에게 사랑받는 걸 보면 어떤 기분이 들어요?
고맙다는 말에 대해서 깊이 생각하게 됐어요. 저는 하루에도 몇 번씩 고맙다는 인사를 하거든요. 버스를 탈 때도, 누가 자리를 비켜줄 때도, 편의점에서 물건을 사고 나올 때도요. 그만큼 제게 일상적인 인사나 다름없었는데, 이 영화를 만들고 나서 고맙다는 이야기를 정말 많이 들었어요. 영화에 출연해 준 친구들도 우리 이야기를 해줘서 고맙다고 말해주고, 영화를 본 관객들도 이런 이야기를 만들어줘서 감사하다고 이야기해 주시는데 그 말의 무게가 정말 무겁게 다가오더라고요. ʻ내가 만들고 싶어서 만든 영화인데 이런 말을 들어도 되나?’ 싶긴 했지만, 큰 울림이 느껴졌어요.
<성덕>은 ‘덕질’하던 최애가 성범죄자가 된 이후 하루아침에 무너져 버린 그의 팬들에 대한 이야기죠. 위에서 말씀하셨듯 세연 씨의 자전적인 이야기가 담겨 있기도 하고요. 제목은 기획 단계 때부터 성덕이었나요?
맞아요. 이 제목이 되게 재미있었거든요. 전 친구들을 사귈 때마다 매번 제가 성덕이었다는 이야기를 자주 하고 다녔어요. 그런데 모두가 알고 계시는 ʻ그 사건’을 겪고 난 뒤 처음으로 그 수식이 부끄럽게 느껴지더라고요. 아시다시피 성덕은 계를 탄 팬을 의미하잖아요. 분명 어제까지만 해도 성덕이라는 사실이 영광스러웠는데, 하루아침에 내가 좋아하던 오빠 때문에 ʻ실패한 덕후’가 돼버렸으니 그 단어에 의문이 들 수밖에요. 그때부터 <성덕>에 대한 고민이 시작된 것 같아요.
구성하는 단계에서 시행착오를 많이 겪었다고 들었어요. 사적인 이야기에서 대중이 공감할 만한 이야기로 변한 시점은 언제였어요?
그 지점이 영화를 만들면서 제일 어렵게 느껴졌어요. 내 분노로 시작된 영화지만, 제 영화가 저 혼자 보는 일기장은 아니잖아요. 나의 호기심과 질문들을 따라가기는 하되, 관객 또한 제 여정에 동참할 수 있어야 한다고 처음부터 생각했어요. 그러려면 제가 겪은 일들을 객관적으로 보려고 노력해야 했죠. 저는 영화를 만들면서 여러 기록을 많이 남겨두는 편인데요. 노트에 보면 온갖 고민이 다 적혀 있어요. ʻ사람들이 나를 이해할 수 있을까.’ ʻ내가 이 사람을 얼마나 좋아했는지 어디까지 설명해 줘야 할까.’ 같은 것들요. 그 정도로 보는 사람들을 계속해서 의식하려고 했어요.
그럼 어떤 사람들이 이 영화를 볼 거라고 생각했어요?
안 그래도 타기팅 고민이 정말 컸어요. 아이돌 산업을 이해하고 있는 사람들만 노려야 할지 그런 것에 전혀 관심이 없는 사람들도 설득해야 하는지 갈피를 잡지 못했죠. 영화에 참여한 모두가 다양한 사람들이 봐주길 바랐지만, 저는 ʻ누군가를 좋아해 본 적 있는 사람들이 이 영화를 보고 공감해 줬으면 좋겠어.’라는 마음으로 영화를 만들었어요.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팬들한테는 꼭 인정받고 싶었거든요.
만들면서 욕심이 커지진 않았어요?
되게 웃긴 게, 상영하기 전까지만 해도 ʻ모두를 만족시킬 수는 없다.’고 스스로 많이 다독였거든요. 그런데 영화가 세상 밖에 나오고 나니까 팬들뿐 아니라 덕질을 해보지 않은 분들도 재미있게 봐주시는 거예요. 국내 관객들 사이에서 그런 반응이 들려오니, 괜히 평론가나 해외 관객한테도 인정받고 싶어지더라고요. 그 마음이 저를 꽤 힘들게 했어요. 한창 고민이 많던 시기에 아는 다큐멘터리 PD님께 ʻ이게 영화적으로 좋다고 말할 수 있는진 잘 모르겠다. 아무리 생각해도 별로인 것 같다.’고 털어놓은 적이 있어요. 그때 그 감독님께서 묻더라고요. 이 영화를 만들 때 목표가 뭐였냐고요. 그래서 처음의 마음을 말씀드렸더니 곰곰 생각하다가 “그럼 성공하신 거 아니에요?”라고 말씀해 주시더라고요(웃음).
최초 목표를 달성했으니까요. 저도 누군가의 덕질을 해본 사람으로서 <성덕>을 정말 재미있게 봤는데요. 영화 중간중간 공감되는 포인트도 정말 많았지만, 말미에 나오는 세연 씨만의 해석이 정말 좋았어요. 그 사람을 덕질한 추억을 오래오래 웃으며 간직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성덕이 될 수 있다는 이야기가 마음에 남았어요. 이 이야기의 결론은 언제쯤 지어졌어요?
영화를 처음 기획할 땐 ʻ우상화’라는 단어에 조금 더 집중해 보고 싶었어요. 자신이 좋아하는 사람이 범죄자가 되었는데도 여전히 남아서 추종하는 팬들을 보면서 기이한 기분을 느꼈거든요. 그 의문점을 파고들기 위해서 저처럼 떠난 팬들만 만나는 게 아니라, 아직 남아서 그 사람을 지지하는 팬들 이야기도 들어보려고 했어요. 그런데 영화를 만들다 보니 그 사람들을 만나야겠다는 생각이 잘못된 것처럼 느껴졌어요.
왜요?
그분들을 만나 뭔가를 찍고 이야기를 들은 뒤 제가 그 이야기를 가지고 뭘 만들 수 있을까를 생각해 보니 남은 팬들을 놀림감으로 만드는 건 아닌가 싶더라고요. 애초에 ʻ아직도 왜 좋아해? 이해할 수 없어.’라는 마음으로 시작한 거니까요. 그런 마음으로 그들을 만나는 건, 그 사람들한테도 예의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어떤 프레임에 가둬놓고 누군가를 재단하고 싶지 않았던 거군요.
네. 스타가 범죄를 저질렀을 때 사람들 반응이 갈리잖아요. 욕하는 사람이 있고, 그래도 좋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죠. 물론 세상에 두 가지 반응만 있는 건 아니지만, 전자가 후자를 마구 비난하는 장면을 보면서 여러 생각이 드는 거예요. 그 사람이 정말 잘못한 걸 알고 있지만 한순간에 등을 돌리기엔 쉽지 않을 수도 있잖아요. 그런 복합적인 마음에 관해 이야기를 해보고 싶었어요. 그렇게 주변 친구들과 인터뷰를 진행하다 보니, 내가 잘 알고 있는 이야기는 이들한테 있는데 왜 알지도 못하는 이야기를 하려고 하나 싶었어요. 영화에도 나오지만, 사실 친구들 모두 어떻게 보면 아직도 좋아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어느 정도는 이해하고 있더라고요. 그 정도만 담겨도 충분하다는 걸 인터뷰하면서 많이 느꼈어요. 다만 그 결정을 내리는 데 시간이 생각보다 오래 걸렸죠.
만드는 과정에서 우연한 상황이 계속 개입하기도 하고, 촬영본이 쌓이면서 이야기 방향이 새롭게 뻗어나가다 보니 이래저래 고민이 컸나 봐요.
조연출이었던 캠 촬영을 한 언니랑 긴급회의할 때도 둘은 태연한데 저 혼자서만 난리인 거예요. 근데 두 친구가 입을 모아서 “지금 만들고 있는 대로 계속 가면 되는데 뭐가 문제냐?”고 말하더라고요. 그때 제가 그 자리에서 선포했거든요. 아무래도 이 영화에서 좋아하는 마음에 대한 정확한 답을 내리는 건 불가능할 것 같다고요. 그건 논리의 문제가 아니라 마음의 문제 잖아요. 그러니 그저 누군가를 좋아했던 팬들에 대한 이야기로 가는 게 최선일 것 같다고 말하니까, 둘 다 심드렁하게 “원래 그렇게 할 거 아니었어?”라고 반응하더라고요. 저만 바보 된 거죠, 뭐.
다들 어렴풋하게 알고 있었나 봐요. 이 영화가 해야 할 이야기가 뭔지를요.
저는 늘 걱정하고 불안해하거든요. 아마 같이 영화 만드는 친구들도 저와 같았다면 솔직히 무사히 완성하진 못했을 것 같아요. 그런데 친구들이 볼 땐 이미 제가 저도 모르는 사이에 맞는 방향으로 가고 있었던 거죠. 그걸 확실하게 말해주고 응원해 주는 사람들이 있어서 안정감을 많이 느꼈어요. 항상 그렇게 제 주변 좋은 사람들한테 영향을 많이 받아요. 제가 한창 힘들어할 때 조연출 친구가 이런 이야기를 해줬거든요. “네가 너를 못 믿겠으면 너를 믿고 있는 나를 믿어라.” 그 이야기를 들었을 때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감동이었어요. 덕분에 저도 그런 마음으로 다른 사람들을 대하려 하고, 용기를 내려고 해요.
서로서로 덕질하듯 응원하는 사이네요. 영화와 책의 관전 요소 중 하나는 덕질을 하며 겪게 되는 ‘양가감정’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성덕>의 제작기가 수록된 《성덕 일기》에서 특히 눈에 띈 대목이 있다면 “너를 너무 좋아했던 나는 네가 되고 싶었다.”와 “나는 네가 너무 밉다. 밉다. 제발 잘못한 만큼 벌 받았으면 좋겠다.”라는 문장이 하나의 글 안에 공존한다는 것이었어요.
저는 누군가를 좋아하면 그 사람을 닮고 싶어지더라고요. 그 사람이 좋아하는 영화나 음악이 있으면 따라 보고 듣고 싶어져요. 이걸 들으면서 무슨 생각을 할까, 헤아리다 보면 그 사람을 좀 더 잘 이해하게 되는 기분이 들거든요. 그런 식으로 어떻게든지 공통분모를 많이 만들려고 하는 편인데요. 그렇게 따라 하다 보면 그 사람의 취향을 저도 좋아하는 순간이 와요. 그런 점에 있어서 저는 누군가를 닮고 싶다는 이야기가 매우 아름답게 느껴져요. 사랑한다는 말이랑 똑같은 이야기인 것 같아요.
“나는 네가 너무 밉다.”도 그만큼 사랑했던 사람만이 할 수 있는 말처럼 들려요.
맞아요. ʻ싫다’랑 ʻ밉다’는 완전히 다른 이야기잖아요. 싫어한다는 이야기는 아무한테나 할 수 있지만, 밉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별로 없는 것 같아요. 정말 사랑해야지만 할 수 있는 말이니까요.
덕질할 때의 감정 이야기가 나와서 생각난 건데, 세연 씨가 주변 친구들을 인터뷰하신 대목을 읽다가 한 친구분이 “덕질은 주접과 착즙이 전부다.”라고 말씀하신 걸 보고 밑줄을 그어뒀어요. 너무 맞는 말 같아서요.
저도 그 말에 공감해요. 덕질을 할 땐 어떤 사람의 매력 포인트를 찾아서 즙 짜내듯이 좋아해야 하잖아요. 그걸 착즙이라고 부르는데, 전 착즙을 하고 있다는 의식 없이 착즙을 하는 편이긴 해요. 내 최애가 머리부터 발끝까지 매력적이라고 생각하고, 그게 미치도록 좋아서 앓는 것일 뿐이죠. 저는 덕질할 때 이런 발언도 서슴없이 해요. “발가락 좀 봐. 너무 귀여워.” 이 문장도 결국 주접과 착즙으로 구성된 거잖아요(웃음).
(웃음) 세상에나, 그럼 그 외에는 어떤 감정으로 구성된 것 같아요?
아, 망상도 포함할 수 있지 않을까요? 그리고 동기 부여도! 저는 덕질하면 진짜 열심히 살고 싶어져요. 열심히 살아야 그 사람을 볼 수 있으니까요. 또 뭐가 있을까요?
동기 부여랑 같은 선상에 있는 감정이라는 생각이 드는데, 덕질하면 좀 용감해지는 것 같아요. 가본 적 없는 곳까지 데려다주는 게 덕질 아닐까요? 그런 의미에서 궁금해졌는데, 혹시 덕질 때문에 이런 것까지 해봤다 싶은 게 있나요?
이걸 용감하다고 말할 수 있을진 모르겠는데요. 저 정말 별짓을 다 했어요. 기억에 남는 일화가 하나 있는데, ʻ그분’ 덕질하던 중학생 때 일이에요. 어느 날 그분이 출연 중인 <1박2일>이 부산으로 촬영을 왔다는 소식이 팬카페에 올라온 거예요. 저 부산 사람이잖아요. 감천문화마을에서 촬영한다는 걸 알자마자 난리를 치면서 덕질하는 친구한테 전화했어요. 어린 마음에 먼발치에서 구경이라도 해보고 싶어서 한 시간이나 걸리는 거리를 찾아갔거든요. 그런데 어디 있는지 모르겠더라고요. 그때 저희 앞으로 봉고차 한 대가 지나갔는데, 혹시 촬영 차량일까 싶어서 택시를 잡아타고 따라갔어요. 근데 그냥 봉고차였던 거예요(웃음).
(웃음) 택시비는 있었어요?
아뇨. 저 고등학생 때도 한 달에 5만 원씩 용돈 받아서 썼거든요. 그런데 중학생이 돈이 얼마나 있었겠어요. 택시비가 3만 6천 원 정도 나왔는데, 친구랑 저랑 있는 돈 없는 돈 탈탈 털어서 냈죠. 당시엔 제가 좋아하는 사람이 촬영하러 이 먼 곳까지 내려왔으니 너무 보고 싶은 마음에 그랬지만 되게 무모한 짓이었죠. 하마터면 사생팬으로 몰릴 뻔했으니까요. 헛발질해서 다행이죠, 뭐.
일찌감치 덕후 기질이 있다는 걸 아셨다면서요. 그 대목을 읽으며 궁금해졌는데, 덕후는 선천적으로 타고나는 걸까요, 후천적으로 만들어지는 기질일까요?
선천적인 게 큰 것 같긴 해요. 감정의 폭이 넓은 사람들이 무언가를 광적으로 좋아하는 것 같거든요. 덕질도 열정이 있어야 할 수 있잖아요. 관찰력도 좋아야 하고요. 티브이를 틀면 나오는 수많은 사람들 중에 이 사람의 이런 부분이 너무 마음에 든다 싶어야만 마음에 품게 되니까요. 물론 그럴 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다가 어느 날 우연히 뭐 하나에 미쳐버리는 사람들도 있긴 하죠.
사랑은 늘 사고처럼 찾아오죠.
맞아요. 그렇게 생각해 보면 혹시 그런 경험이 없는 분들은, 아직 상대를 못 만난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해요. 그분이 그런 감정을 못 느끼는 게 아니라, 아직 운명의 상대가 그분께 오지 않은 거 아닐까요? 아직 내게 닿지 못한 사랑이 지금 열심히 달려오는 중이어서 조금 늦어지는 것뿐이죠. 팬 활동뿐만 아니라 연애 감정 또한 마찬가지라고 생각해요.
세연 씨는 덕질하는 마음과 연애 감정이 같다고 생각하나요?
아뇨, 좀 다른 것 같아요. 덕질 할 땐 그 사람과 대화를 주고받지는 않잖아요. 멀찍이서 그 사람이 자기 인생을 열심히 살아가는 걸 바라보고 응원할 뿐이죠. 반면 연애할 땐 서로의 관심이 얼마나 통하는지를 보게 되는 것 같아요. 제가 재작년부터 올해는 연애할 거란 얘길 하고 다녔거든요. 저만의 기준을 두고 탐구 중이에요. 첫째는 자격지심이 없는 사람, 둘째는 친구 없는 사람, 셋째는 영화 좋아하는 사람. 이 세 가지 기준으로 제 미래의 남자친구를 찾고 있습니다. 구인 광고 하나 내주시겠어요(웃음)?
잘 정리해 볼게요(웃음). 그럼 그냥 좋아하는 마음이랑 덕질하는 마음은 어떤 차이가 있다고 생각해요?
둘 다 마음으로 하는 일이긴 하지만 덕질에는 숙제가 따라붙는 것 같아요. 의무감이 필요하다고 해야 할까요. 이를테면 한국 아이돌 덕질을 한다고 치면 할 일들이 많잖아요. 앨범 구매나 음원 스트리밍, 문자 투표 같은 거요. 덕후로서 해야 할 일이 있고 시간과 돈을 써야 하죠. 그게 가장 큰 차이 같아요.
<성덕> 이후에 “최근에는 어떤 덕질을 하고 있냐?”는 질문을 굉장히 많이 받았던 걸로 기억해요. 그때마다 지금은 그렇게까지 좋아하는 게 없다고 말씀하시더라고요. 그걸 보고 덕질의 기준이 높은 게 아닐까 하고 짐작해 봤어요.
저는 좋아하는 게 정말 많은 사람이에요. 매일매일 무언가를 좋아하면서 살고 있어요. 좋아하는 마음이 습관이 되어버린 거죠. 일상을 살아가는 것처럼 당연한 일인 거예요. 반면에 제게 덕질은 뭔가 하나에 꽂혀서 그것만 파고드는 시간이 확보되어야 해요. 이를테면 제가 요즘 4세대 걸그룹을 굉장히 좋아해서 에스파나 아이브 무대 영상을 자주 찾아보거든요. 하지만 그들의 전 생애사를 다 찾아보고 모든 무대를 하나하나 살펴보진 않아요. 저는 덕질을 시작하면 하나부터 열까지 다 알아야 하는 사람이거든요.
연구하듯이 하는군요.
네. 어떤 대상에 완벽하게 몰입해서 관련된 모든 걸 다 섭렵해야만 하는 상황까지 가야 덕질한다고 여기는 거죠. 가볍게 좋아하는 건 시간이 날 때만 즐기는 것, 덕질은 시간이 없어도 틈을 내서 하는 것.
근래 들어서 새롭게 찾아온 사랑이 있나요?
정말 얼마 안 되긴 했는데, 요즘 황인찬 시인의 시를 읽고 너무 좋아서 열성적으로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어요. 시인님이 한 인터뷰 닥치는 대로 다 읽고, 그분이 쓰신 책도 다 사고, 책 읽으면서 음미하고, 인스타그램 모조리 훑어보고…그러면서 지냈어요. 친구들한테도 시인님이랑 언젠가 한번 만나 뵙고 싶다고 혼자서 막 난리 쳤어요. 저는 무언가에 관심이 생기면 저 혼자 생각하거나 일기를 쓰고 마는 편인데, 열렬하게 좋아하는 대상이 생기면 꼭 누군가한테 말하고 싶어져요.
무언가를 사랑하는 사람들은 왜 자신이 품은 애정을 말하지 못해서 안달일까요?
좋아하는 마음이 엄청날수록, 그 마음이 내 안에만 있기에는 너무 거대해서 나도 모르게 자꾸만 밖으로 삐져나오는 거죠. 그래서 그걸 어딘가에 털어놓고 발설해야지만 내 마음에 담아놓을 만큼의 크기가 되는 게 아닐까 싶어요. 어떤 분들은 내가 누군가의 덕후라는 걸 티 내지 않으려고 ʻ일반인 코스프레’를 하잖아요. 저는 그걸 잘 못해요. 좋아하면 마구마구 말하고 싶어서 안달해요. “나 이 사람 진짜 좋아해!” 하고 세상에 소리치고 싶어져요.
황인찬 시인에겐 어떻게 빠진 거예요?
(숨을 들이켠다.)
(웃음) 표정부터 달라지네요.
제가 원래도 시 읽는 걸 좋아해요. 기형도 시인의 시를 정말 좋아했어요. 그분 시를 읽으면 정말 미친 듯이 고독해지는 거예요. 그런데 황인찬 시인의 시집을 읽다 비슷한 감각을 느꼈어요. 두 분 시 쓰는 스타일이 완전히 다른데도요. 제가 사실은 외로운 사람이었다는 걸 알게 되는 느낌이랄까요. 시집을 읽다 보면 사랑에 관한 시가 많이 나오는데요. 한 줄 한 줄 곱씹다 보면 사랑이란 게 너무 아름다운데, 부질없게 느껴져요. 시 속 화자들도 단단해 보이면서도 굉장히 나약한 사람 같기도 하고. 그런 포인트들이 저 자신처럼 느껴지는 것 같아요.
황인찬 시인의 시 속 화자들도, 세연 씨도 사랑이 너무 많아서 외로운 게 아닐까요?
맞아요. 주변 친구들도 제게 그런 이야기를 정말 많이 해요. 너는 진짜 사랑이 많은 사람이라고. 그게 저를 외롭게 만든다고 생각한 적은 별로 없었는데, 황인찬 시인의 시를 읽으면서 때때로 그런 생각을 하게 돼요. 제가 보기엔 시인님도 저처럼 사랑 중독인 것 같거든요. 시인의 말에 그런 문장이 적혀 있어요. “사랑 같은 것은 그냥 아무에게나 줘 버리면 된다.” 이 문장이 제 마음을 울렸어요.
어떤 점에서요?
사랑이 가볍고 하찮은 거라고 생각해서 그렇게 말하는 게 아니니까요. 저는 저 말이 사랑이 무한히 샘솟는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이야기처럼 느껴졌어요. 저도 사랑을 아끼지 않는 편이거든요. 그런 점에서 동질감을 느꼈나 봐요. 이런 사람과 같은 시대를 살고 있어서 너무 행복하다는 생각 자주 해요. 제가 요즘 SBS에서 <덕업정거장>이라는 팟캐스트를 진행 중인데, 저희 PD님께 섭외 요청하자고 계속 추진하고 있어요. 재미있게 대화할 수 있을 것 같아서요.
<덕업정거장>을 진행하며 ‘덕업일치’의 삶을 살고 있는 직업인들을 만나고 있죠. 그분들과 대화하면서 덕후에 대한 정의가 더욱더 넓어졌을 것 같아요.
저는 영화감독이기 전에 영화 덕후이기도 했으니, 이미 덕업일치를 했다 싶긴 해요. 그렇다고 해서 매일 덕질하는 마음으로 일하지는 않거든요. 영화를 좋아해도 그와 관련된 모든 일을 좋아할 수는 없으니까요. 이를테면, 제가 영화 제작비를 정산하면서 ʻ영화 하는 나 정말 멋져.’ 이렇게 생각하진 않잖아요. 그래서 덕업일치에 대해 이런저런 고민을 많이 하던 시기에 DJ를 맡게 되면서 많은 분을 만났고 좋은 영향도 받았어요. 저희 팟캐스트에 나오신 분들은 저보다 인생 선배이고 모두 오랜 시간 동안 자기가 정말 좋아하는 일을 하고 계신 분들이다 보니까, 이야기를 듣다 보면 일을 대하는 태도에 대해서 점검해 보게 되더라고요.
어떤 생각을 하셨는지 구체적으로 듣고 싶어요.
저희 공식 질문 중 하나가 있는데요. “지금 만약 이 직업에서 환승할 수 있다면 내릴 것인지, 아니면 계속 타고 갈 것인지.” 물어보거든요. 99퍼센트가 그대로 타고 갈 거라고 답하세요. 지금 직업이 너무 좋아서 굳이 내릴 필요가 없을 것 같다고요. 그 답을 들으면서 정말 좋아하는 마음이란 건 뭘까, 싶었어요. 덕업일치를 하면서도 분명 힘든 일이 많을 텐데, 결국 그걸 이겨내는 것도 모두 애정 때문인 거잖아요. 그 마음을 생각하면 아름다워 보여요. 좋아하는 마음으로 하는 일엔 한계가 없나 봐요.
그 마음을 오래 간직하고 지속하려면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저도 이 일을 오래 한 건 아니라서 잘 모르겠는데요. 요즘 제가 느끼는 건 잠시 떠나 있는 시간도 필요하다는 거예요. <성덕> 이후에 사람들이 저한테 영화는 언제 만들 거냐고, 요즘 도대체 뭐 하냐고 이런 이야기를 많이 물어봐요. 저도 사람이기 때문에 그런 이야기를 들으면 불안할 수밖에 없어요. 젊을 때 좀더 왕성하게 창작해야 하는데 뭘 하는 건가, 싶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국 이 모든 경험이 제가 만들 영화에 다 포함될 거란 걸 알고 있어요. 다시 영화를 만들고 싶다는 마음이 들 때까지 덕심을 충전하는 시기인 거죠.
“새로운 것을 창작하는 사람이 되어야 미래로 갈 수 있을 것 같다.”고 했어요. 가까운 미래 속 오세연 감독은 어떤 영화를 만들고 있을까요?
하고 싶은 이야기들은 자잘하게 많은데, 그중에 무엇부터 만들면 좋을지 고민이 커요. 어쨌든 웃기고 사랑스러운 이야기를 좀 하고 싶어요. 원래 코미디 영화를 별로 좋아하는 편은 아닌데, <성덕>을 만들면서 유머 감각이 굉장히 중요하구나 알게 됐어요. 저는 제가 정적인 영화를 훨씬 좋아한다고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웃긴 영화를 좋아했더라고요. 슬며시 미소 지으면서 보는 영화들 말이에요.
<성덕>에 이런 문장을 적었죠. “영화를 완성하는 마음, 사람들에게 보여주는 마음에 대해서 또 한 번 생각했다.” 세연 씨에게 영화 하는 마음이란 뭘까요?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을 보이게 하는 거요. 그게 저한테는 영화를 만드는 마음인 것 같아요. 제가 에드워드 양Edward Yang 감독의 <하나 그리고 둘>(2000)이라는 영화를 굉장히 좋아하는데요. 거기서 그런 이야기가 나와요. “왜 사람들은 자신의 뒷모습을 볼 수 없을까요?” 그 대사가 너무나도 와닿더라고요. 저는 영화가 사람들의 뒷모습을 보여줄 수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평상시에는 안 보이잖아요, 자기 뒷모습이. 그런데 영화를 통해선 볼 수 있다는 생각을 해요. 누군가에게는 시야 너머에 있는 걸 보여주고, 또 다른 사람에게는 그걸 보고 있는 이의 뒷모습을 보여주는 영화를 만들고 싶어요.
오세연표 극영화는 어떨지 너무 기대되네요. 마치기 전에 짓궂은 질문 하나 해볼게요. 덕질 없는 삶 상상해 봤나요? 세연 씨가 덕후가 아니었다면 지금쯤 어떤 삶을 살았을까요?
청소년기에 누군가를 좋아하면서 영향을 많이 받았기 때문에 덕질 없는 삶은 어땠을지 상상이 잘 안 되긴 해요. 확실한 건 사는 게 좀 덜 재미있었겠죠. 예전에 어떤 분이 “오세연은 조심해야 한다. 어릴 때부터 덕질하면서 일찌감치 사회생활을 배워서 애가 너무 능글맞다.”고 하시는 거예요. 저보다 나이가 많은 분이었는데, 나보다 더 아줌마 같다고(웃음). 그런데 정말 그 시절에 덕질하면서 수많은 사람과 교류하며 세상에 대해 많이 배웠어요. 그런 걸 보면 뭔가를 계속 좋아하면서 살 수밖에 없는 사람이구나 싶어요.
아직 덕질의 세계에 입문하기 전인 사람들에게 열렬한 사랑의 이로움에 대해 영업해 보자면요?
일단 덕질을 시작하면요, 길을 걷다가도 웃음이 나오고요. 가만히 있다가도 소리를 지르게 되고, 세상이 아름답게 보이고, 밥을 안 먹어도 배부르고, 피부도 좋아지고, 사람들이 예뻐졌다고 하고….
(웃음) 만병통치약이네요.
그럼요. 그런 실질적인 이득이 있다는 걸 먼저 말씀드리고 싶고요. 무엇보다도 나를 무조건 행복하게 만들 수 있는 어떤 대상이 존재한다는, 그 기쁨이 정말 커요. 사는 게 쉽지만은 않잖아요. 삶에 치일 때도 그 사람을 생각하면 힘이 나거나, 잘해봐야지 하고 일어설 수 있게 되고, 혹은 마음이 따뜻해지기도 해요. 그게 삶을 살아가는 데 좋은 영향을 많이 주는 것 같아요. 그러니, 무언가의 팬이 되는 일은 정말 아름다운 것이랍니다.
에디터 오은재
포토그래퍼 임정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