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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없는 마을
몇 해 전, 어딘·이슬아 작가를 인터뷰할 때 첫 문장에 관해 이야기한 적이 있다. 슬아 작가는 “첫 문장만 봐도 얼마나 고수인지 바로 티가 나죠.” 하고 말했고, 어딘 작가는 “잘 쓴 첫 문장엔 확실한 끌림이 있어요.” 하고 말했다. 그 뒤로 나는 책을 읽을 때 첫 문장을 여러 번 곱씹는 사람이 되었다. 돌아보면 첫 문장은 의식할 때나 그렇지 않을 때나 마음에 남아 있는 것이었다. 그렇다는 것을 두 작가와 대화하면서 알게 되었다.
어릴 적 우리 집에는, 그 시절 아이 있는 집이 대개 그렇듯 그림책 전집이 여럿 있었다. 높다란 책장 위 아직은 읽을 수 없는 어른 책들을 궁금해하며 손 닿는 곳에 있는 내 책들을 아낌없이 꺼내 읽던 기억이 난다. 상상인지 실제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단단한 표지가 손에 닿던 감촉도 생생하다. 어린아이 책이다 보니 모서리에 다치지 않게, 조금은 둥글게 마감된 그 물성도 제법 선명하게 기억나는 걸 보면 거짓 기억은 아닌 듯하다. 나는 책이란 형태가 지닌 네모난 형태를 좋아했고, 책 속에 등장하는 동물들을 좋아했고, 부모님이 목소리를 바꿔가며 이야기를 읽어주는 시간을 좋아했다. 스스로 소리 내서 책을 읽을 수 있을 만큼 자란 후에는 ‘파란나라’라는 노래 또한 좋아하게 되었는데, 노랫말을 너끈히 외워 품고 다닐 수 있던 건 그림책을 좋아한 덕이 컸을 테다. “난 찌르찌르의 파랑새를 알아요 난 안델센도 알고요.” 하고 흥얼대고 있으면 친구들이 하나둘 몰려들어 ‘노랫말이 그게 맞느냐’고 물어왔다. ‘찌르찌르’가 뭐냐고, ‘안델센’은 또 뭐냐면서.
언젠가 일본 여행 중에 서점에 들렀는데 어린 시절 내가 읽던 그림책과 똑같이 생긴 전집을 발견했다. 판형, 디자인, 색깔까지 모든 게 꼭 같은 그것을 보아하니 일본 출판사 전집을 그대로 가지고 와 번역만 해서 낸 모양이었다. 엄마는 언어만 다를 뿐 우리 집에 있던 전집 세트와 꼭 같은 그림책들을 보며 “주연이는 염소랑 늑대 나오는 책을 가장 좋아했지.” 했는데, 어린 시절을 선명하게 기억하는 게 자랑이던 내겐 다소 생소한 이야기였다. 제일 좋아한 그림책이 《빨간 망토》가 아니라고? 엄마 말에 따르면, 그 책을 하도 좋아한 나머지 단단하게 사철 제본된 양장본 그림책이 다 너덜너덜해져 표지와 내지가 떨어져 버릴 정도였단다. 그 말을 듣고 보니 확실히 실밥이 튀어나온 책을 들고 다닌 기억이 난다. 그것이 《늑대와 일곱 마리 아기 염소》였는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라이너스의 담요처럼 내게도 꼭 끌어안고 다니던 애착 물건이 있었구나 생각하면, 그걸 기억해 주는 사람이 있다는 걸 생각하면 어쩐지 행복해지는 것이었다.
이 책의 첫 문장은 이렇다. “옛날에 일곱 마리 아기 염소가 엄마와 함께 살았습니다.” 문장을 읽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푸근해진다. 첫 문장이 마중물이 된 것처럼 금세 몇몇 장면이 떠오른다. 엄마인 척하기 위해 분필로 화장하는 늑대, 문틈으로 보이는 새카만 발로 엄마가 아님을 알아채는 아기 염소들, 밀가루로 손발을 하얗게 칠하고 다시 방문하는 늑대, 깜빡 속아 잡아먹혀 버리는 염소들…. 시계 속에 숨어 살아남은 막내 염소가 정각에 문을 열고 나가는 뻐꾸기에 올라타 늑대 머리를 콱 찧어버리는 그림까지도 분명히 떠오르는 것이 못내 재미있다.
기억은 선명한 반면 결말이 생각나지 않아 힌트를 얻고자 예의 그림책을 넘기는데, 엄마 염소가 배불러 자고 있는 늑대의 배를 가위로 잘라 아기 염소들을 구출하는 그림이 실려 있다. 그다음은 넘기지 않고도 알 수 있었다. 분명히 늑대 배에 단단하고 무거운 돌을 가득 넣고 실과 바늘로 꿰매고, 그다음 장에선 목이 말라 물을 마시려던 늑대가 무거운 배 때문에 우물에 빠져 죽게 되었지? 기억은 적확했다. 늑대 배를 꿰매는 엄마 염소 얼굴이 기이할 정도로 평화롭고 행복해 보인다. 책의 첫 문장처럼.
종종 “시는 어떻게 읽어야 하는지 모르겠어.” 하는 이야기를 들을 때가 있다. 시집을 좋아하지만 그런 이야기에는 마땅한 대꾸를 찾기 힘들다. 시뿐이랴, 소설도, 산문도, 심지어는 SNS에 적힌 누군가의 하루도 어떻게 읽어야 하는지에 관해서는 쉬이 설명할 수 없는데. 나는 그저 눈에 보이는 글자를 읽고, 단어를 줍고, 문장을 몇 번쯤 다시 읽어보면서 어딘가에 기록을 한다. 성급하게 요약하거나 음절 몇 개를 건너뛰어 다시 돌아봐야 할 때도 있다. 그러다 생각나는 사람이나 장면이 생기면 책 바깥에서 오래 머물기도 한다. 그게 나의 읽는 방식의 전부다.
안미옥 시인의《저는 많이 보고 있어요》를 읽으면서 어떤 마음에 관해 많이 생각했다. 나를 향해 쓰는 마음과 누군가를 향해 쓰는 마음. 거짓되지 않은 마음, 꾸밈없는 마음에 관해. 아주 약하고 순한 마음을 생각했다. 그러나 절대로 부러지지 않고, 누구든 쉽게 꺾을 수 없는 마음에 관해. 대체로 선을 향해 있지만 너무 착하지만도 않은, 그래서 부담스럽지 않고 일순 안심하게 되는 어떤 마음에 관해. 책장을 덮고 마음들이 흩어질 때 얼굴이 하나 떠올랐다. 읽는 내내 나를 관통하던 H의 얼굴이. H는 과연 ‘그런’ 사람이었다. 이 시집을 읽으며 내내 생각한 ‘그런 마음’을 지닌 사람. 무턱대고 선과 행복만을 부르는 마음이 아니어서 오히려 진짜 선하고 바른 것처럼 느껴지는 마음을 지닌 사람. H는 그 마음을 절대로 부러뜨리지 않고, 누구든 쉽게 꺾을 수 없도록 단단한 울타리를 채울 줄 아는 사람이었다.
H와는 매일 한 공간에서 얼굴을 맞대고 지내던 사우였다. 함께 일하지 않아도 하루에 서너 번씩 말을 섞고 눈을 맞췄다. 함께 일할 때면 하루에 열댓 번씩 말을 섞고 눈을 맞췄다. 가끔 장난을 치고, 실없는 이야기를 하며 나의 한 시절을 같이 수놓곤 했다. H가 일터를 떠나던 날, 크게 고민하지 않고 이 시집을 선물하겠노라 마음먹었다. 누군가에게 책을 선물하는 건 옷을 선물하는 것과도 비슷한 일이다. 읽히지 않을 수 있다는 의미다. 취향에 맞지 않는 옷을 선물 받았을 때 난감해지는 것처럼, 책 또한 취향의 영역이기에 그렇다. 어쩐지, 시집이란 더욱 그렇게 느껴진다. 그런데도 건네고 싶었다. 내가 이 시집을 읽으며 너를 떠올렸다고, H에게 말한다면 조금은 이해해 줄 거라는 믿음도 있었다.
책을 선물하고 얼마나 지났을까, H가 일터를 떠나고 나서 만나게 된 어느 여름날이었다. H는 내 몫의 선물이라며 곱게 포장한 참외 한 알과 노오란 편지봉투를 들고 나타났다. 제철의 기운을 한껏 안은 참외에선 다디단 냄새가 풍겼다. 그걸 안고 회사로 돌아갔고, 그걸 안고 또 다른 모임에 갔으며, 그걸 안고 집으로 왔다. 그날은 내내 나에게서 다디단 여름의 냄새가 함께였다. 그날, 내게 여름을 한껏 안겨준 H가 이런 이야기를 건넸다. “근데요, 선물해 주신 시집 있잖아요. 저 퇴사 선물로 O에게 그거랑 똑같은 시집을 받았어요. 그 친구도 읽으면서 제가 생각났대요.”
시의 첫 문장은 반드시 시인의 말일 테다.《저는 많이 보고 있어요》의 시인의 말은 다음과 같다. “손에서 손으로 열리는 것을 봅니다.” H에게 O 이야기를 들었을 때, 나는 손에서 손으로 열리는 것을 보았다고 생각했다. 그 경험은 이루 말할 데 없이 특별했다. 처음으로 알맞은 책을 선물했다는 기분. 나는 여전히 시 읽는 방법에 관해 알지 못한다. 어떤 시집에서, 어떤 시편에서 간간이 떠오르는 얼굴들을 머릿속에서 그려보고 만져보는 식으로 읽을 뿐이다. 그런 방식으로 시 읽는 법을 터득해 나가는 것이 좋다. 읽히지 않을 각오를 하고서라도 선물하고 싶어지는 마음이, 간간이 찾아오길 바라면서 시집을 펼친다.
중학생 때는 추리소설을 좋아했다. 어릴 때, 맥락 없이 귀신이 출몰하던 공포 소설 읽던 세포가 남아 있는 채로 자란 영향일 테다. 터무니없이 귀신이 나타나는 소설에 혀를 찰 줄 알게 되었을 무렵, 논리와 근거가 있는 추리소설이란 장르를 알게 되었다. 빠져드는 건 삽시간이었다. 아서 코난 도일과 애거사 크리스티를 찾아 읽으며 클라이맥스에서 심장이 뛰는 걸 느끼는 게 좋았다. 범인을 추리해 보거나 그 방법을 상상하며 뇌세포가 팽글팽글 돌아가는 기분을 느끼는 건 짜릿한 일이었다. 뭔가를 성취해 내기 전의, ‘될 것 같다’는 고양감과 비슷한 감각. 딱 하나 장애물이 있다면 줄거리를 속도감 있게 따라가다가 외국인 이름이 등장하면 제동이 걸린다는 거였다. 셜록 홈즈나 왓슨 같은 이름마저도 ‘존 H. 왓슨’이라고 적혀 있거나 ‘Watson’ 등으로 표기되어 있으면 어쩐지 거리감이 생기면서 몰입이 한순간 깨져 버렸다. 그나마 중학생 때는 책 귀퉁이에 메모해 가며 읽을 여유가 있었지만, 고등학생이 되고 나니 필기할 거리가 그것 말고도 산더미였고, 공부의 틈바구니에서 정신을 차려보니 나는 자연스럽게 추리소설과 멀어져 있었다.
추리소설과 다시 만난 건 대학교 도서관에서였다. 동기와 친목을 쌓는 대신 거대한 도서관에 틀어박히는 쪽을 택한 나는 그 안에서 거의 처음 일본 추리소설과 조우하게 되었고, 메모하지 않고도 속도감 있게 따라갈 수 있는 기이함과 스릴에 금세 폭 빠져들게 되었다. 추리소설이란 무릇 스토리에 흠뻑 빠져 잽싸게 완독하는 재미지,라며 하루에 한 권씩, 두 권씩 추리소설을 해치우던 시절이다.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는 작가와 환상적인 분위기를 자주 연출하는 작가, 사회 풍자를 반드시 곁들이는 작가 등 여러 스타일을 살피면서 내가 좋아하는 이야기들 사이를 마음껏 부유하던 시절. 중학생 때와 다른 점이 있다면 일본 추리소설은 유럽 것에 비해 조금 더 빠르게 읽혔다는 것이고 그 덕에 빠른 속도감에 가속을 붙여 정신없이 내달릴 수 있었다는 점이다. 중학생 때는 빠르게 나아가고 싶어도 발맞추기가 어려워 멀어지게 됐다면, 이번엔 너무 빠르게 달려 나가는 통에, 삽시간에 지나치게 많은 추리물을 접해 버리는 까닭에 추리소설에서 다시 한발 멀어지게 되었다. 내게로 와 진득한 감정을 남기고 홀연히 떠나버리는, 추리소설은 내게 바람 같은 첫사랑이었다.
오랜만에 추리소설과 다시 만난 건 불과 얼마 전 일이다. 쉼을 갈구하던 때 불현듯 추리소설 생각이 났다. 아름다운 문장, 새로운 단어, 편집 방향성, 책의 만듦새 등을 생각하지 않은 채 그저 줄거리에 빠져들고 싶던 날이었다. 아직 읽지 않은 추리소설을 책장에서 검지만을 이용해 살포시 빼내었고, 그것은 나를 오랜만에 오싹한 공포로 인도했다. 정통 추리소설보다는 미스터리에 가깝다고 해야 할까. ‘이 호러가 대단하다!’ 1위에 선정된 《긴키 지방의 어느 장소에 대하여》는 이런 문장으로 시작한다. “도쿄에 거주하는 24세 회사원 A씨는 대학 졸업 후 한 시스템 회사에 엔지니어로 입사했다.” 등장인물 정보를 얼마간 얻은 채 읽어 내려가기 시작한 이 책은 오랜만에 ‘다음’이 궁금해서 책 읽을 시간이 기다려지는 조바심을 선물한 책이었다. 그림 요소와 분위기, 내용을 설명하며 제안했던 이전과 달리 첫 문장만을 건네며 삽화를 부탁하면서 나는 휘리의 손길로 다시 탄생할 첫 문장들이 몹시 궁금했다. 앞서 말한 인터뷰에서 슬아 작가는 이런 이야기를 했다. “어디에선가 이런 글을 읽은 적이 있어요. ‘작가란 첫 문장과 마지막 문장을 준비하는 사람’이라고요.” 이번 글의 마지막 문장은 휘리의 그림으로 완결될 테다. 첫 문장을 접하곤 회사원 A씨 성별을 고민 중이라던 그의 말에 ‘아!’ 하고 허벅지를 살짝 꼬집던 순간, 나는 그가 이 글을 멋지게 맺어줄 것임을 확신할 수 있었다.
글 이주연(산책방)
일러스트 휘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