멋쟁이라 불렸던 사나이

《아빠는 오리지널 힙스터》

볼록 솟은 뱃살은 몇십 년째 함께. 새치 염색은 필수. 휴대폰 화면은 멀찍이. 벨 소리는 쩌렁쩌렁. 이제는 너무나 귀여워져 버린 우리네 아버지들의 멋쟁이 시절에 관하여.

내가 왕년에는 말이지

우리 아빠의 패션 철학은 확고하다. 신발은 안 신은 듯 가볍고 편한 것, 여름엔 칼라티셔츠나 리넨 셔츠, 겨울엔 강추위를 막아낼 방한 바지. 쇼핑을 가도 손에 잡히는 물건은 늘 남색이나 검은색뿐이다. 새로운 스타일을 시도해 보라는 권유에도 나는 편한 게 최고라 하신다. 아무리 예쁜 옷이라도 실용성과 합리적인 가격을 갖춰야만 장바구니에 넣는다.

그런 아빠도 나한테 늘 하는 말이 있다. 어릴 때는 자기도 멋 낼 줄 알았다는 것. 셔츠는 종이도 벨 만큼 날렵하게 주름을 다렸고, 청바지만 입으면 만나자는 여학우들이 줄을 섰단다. 피식 웃고 넘기지만 먼지 쌓인 앨범 속 남자는 정말이지 근사하다. 청춘이라는 단어가 척 들어맞는 장면들, 그 속에 아빠와 똑 닮은 청년이 멋진 포즈로 웃는다.

샌프란시스코에 사는 카피라이터 브래드 게티Brad Getty는 아버지들의 젊고 잘나가던 시절 사진을 기부받아 블로그에 게시했다. 프로젝트명은 ‘아빠는 오리지널 힙스터Dads are the original hipsters’. 촌스러운 아저씨로만 여겼던 아버지들이 사실은 힙스터의 시초였다는 이야기. 개성을 드러내는 옷으로 한껏 자신을 표현하며 자유로운 생활을 만끽할 줄 아는, 젊은 시절의 어느 날.

“진짜 힙스터는 네 아버지였단다. 그들은 싸구려 맥주를 멋진 것으로 만들고, 픽시 자전거를 타고, 몸에 짝 달라붙는 스키니 진을 입고, 티셔츠 브이넥은 깊이 파여 있었지. 게다가 너는 상상도 못 할 신나는 파티를 즐겼어. 그들은 힙스터라는 말이 생겨나기도 전에 힙스터였고, 이미 한참 전에 그런 건 또 진즉 때려치웠지.”

저자는 사진을 모아 한 권의 책으로도 펴냈다. 스키니 진, 꽁지머리, 보타이처럼 과감한 패션부터 영화 제작, 세계여행, 비주류 악기 연주 같은 라이프스타일이 낡은 사진첩을 채운다. 지금은 도통 이해할 수 없는 스타일이라지만 아버지들은 그때의 자신이 퍽 마음에 드는 것 같다. 저자는 이제는 중년이 된 필름 속 주인공의 삶을 상상해 아이에게 건네고 싶은 말도 덧붙였다.

“네 아버지는 자신만의 스타일을 가진 사람이었어, 정말이야. 너의 덜떨어진 패션 대뇌피질로는 네가 꼬마였을 때 그가 간직했던 세련미를 이해하지 못하겠지. 그러니 무지몰각하게 아버지의 옛날 옷을 비웃기나 했지. 하지만 그는 그때 당시에도 옷을 어떻게 입어야 하는지 알고 있었어. (중략) 언제나 말쑥하니 최고의 멋쟁이였어.”

우리 아빠도 엄마를 만나러 가는 날에는 제일 마음에 드는 셔츠를 골라 입었을까. 마음에 들 때까지 머리를 매만지고 거울 앞에서 여러 번 자신을 비춰봤겠지. 유행가는 외우려고 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알고 있었을 테고, 때로는 친구들과 춤도 추러 갔을 거야. 빛바랜 필름으로 가득한 책장을 넘기며 우리 아빠의 그 시절을 그려본다.

운동용 헤드밴드

“네 아버지는 너보다 훨씬 예전에 헤드밴드를 사용했어. (중략) 그의 존재 자체에서 쏟아져 나오는 어마어마한 에너지를 이마에 두른 섐와우(Shamwow, 흡수력이 뛰어난 다용도 타월 제조업체)가 빨아들여서, 지하에서 한창 공연을 할 때도 흘러내린 땀에 시야가 흐려지는 법이 없었지.”

아빠는 종종 ‘7080’ 시절의 노래를 틀고 운전했다. 필수 곡은 이문세의 ‘야생마’나 이글스Eagles의 ‘호텔 캘리포니아Hotel California’. 나는 중2병에 제대로 걸려 이어폰으로 귀를 꽉 틀어막고 자는 척을 했지만 명곡은 명곡이라고, 가사가 저절로 외워져 나도 모르게 흥얼거렸다. 언젠가 아빠는 고등학교 시절 그룹사운드, 요즘 말로는 밴드를 하고 싶었다고 했다. 할아버지의 반대에 부딪히지 않았다면 아빠도 머리를 기르고 가죽 재킷을 입었을까? 도로를 무대 삼아 열창하는 뒷모습을 보며 열기로 가득한 라이브 공연을 상상해 본다.

데님 반바지

“그는 삶의 흔적으로 만신창이가 된 청바지의 다리 부분을 잘라 스타일이 멋진 핫팬츠로 재탄생시켜 도로 옷장에 넣고 재활용했어. (중략) 한때 즐겨 입다가 낡아버린 바지들은 모두 반바지로 다시 태어나 새로운 삶을 살았지.”

내 주변 패션광들의 공통점은 의류를 직접 리폼해 입어본 경험이 있다는 점이다. 원하는 핏대로 옷을 줄이거나 늘이고, 때로는 자르거나 무언가를 덧대기도 한다. 옷을 마음대로 바꾸어 나를 표현하는 건 사진 속 주인공도 마찬가지. 파격적인 차림새에서 어색함보다는 여유가 느껴진다. 그가 착용한 아이템은 ‘조츠Jorts’, 데님을 뜻하는 ‘Jean’과 반바지를 뜻하는 ‘Shorts’의 합성어란다. 오늘날은 짧은 바지를 여성의 전유물로만 여기지만 아버지의 자유로움은 시대를 거스르는 것만 같다. 우리 아빠에게도 이런 날들이 있었을까? 남들의 시선은 뒤로하고 원하는 옷을 골라 거리로 나선 주말 오후. 아빠도 그 기분을 분명 느껴봤을 것이다.

탱크톱

“탱크톱은 무더운 여름에 상의를 입을까 말까 하는 고민 끝에 나온 어정쩡한 타협안으로, 데이지 듀크(미국 드라마 <듀크스 오브 해저드The Dukes of Hazzard>(1979)의 주인공. 항상 데님 반바지를 착용했다.)처럼 입은 대학생의 그을린 엉덩이로 흘러내리는 땀줄기보다 더 여름을 대변하는 옷이었어.”

아빠의 여름을 목격한 적 있다. 고등학생인 아빠는 친구들과 해변에서 머리를 맞대고 누웠고 그 모습은 필름에 담겼다. 어촌 마을에서 자란, 삐쩍 마른 그 남자애는 더운 날이면 아무 때나 웃옷을 벗고 바다로 뛰어들었다. 그리고 허기가 지면 아버지의 배 위에서 라면을 끓이거나 홍합을 삶아 먹었단다. 이제는 체중 관리에 심혈을 기울이는 귀여운 중년이 되었지만. 우리가 민소매라고 부르는 사진 속 옷은 북미에서는 탱크톱이라고 부른다. 옷장을 정리하다 우연히 이 옷을 꺼내 들면 여름날의 한 장면이 펼쳐지지 않을까. 미지근한 맥주, 파라솔 아래 작게 드리운 그늘, 그날 처음 만난 어떤 여자애 같은 존재들이.

우리 아빠도 멋쟁이

엄마는 아빠가 품 안에 쏙 들어올 만큼 날씬한 데다 멋진 사람이었다고 했다. 낡은 앨범을 펼쳐 그 말을 검증해 보기로 한다. 어디 보자. 우리 아빠도 멋쟁이 시절이 있었으려나?

체크 셔츠

큰 체크무늬는 소화하기 어렵다는 게 나의 지론이다. 하지만 아빠에게는 늘 잘 어울렸다. 아무리 ‘Y2K’가 유행이라지만 내가 입는다면 도를 아냐고 물어봐야 할 것만 같은 옷인데…. 조그만 나를 안고 환히 웃는 아빠가 아름답다.

브래드 게티
샌프란시스코에 사는 카피라이터. 아버지들의 젊은 시절 모습을 수집한 텀블러Tumblr 블로그를 운영해 ‘이 주의 텀블러’로 선정된 바 있다. 《아빠는 오리지널 힙스터》에 이어, 멋진 아기들의 사진을 모은 《I Was an Awesomer Kid》를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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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차의진

자료 제공 벤치워머스(푸른숲)