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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1월의 특별한 여행 이야기
제 작년 이맘때 나는 중고 필름 카메라 한 대를 샀다. 직장을 그만두며 받지 못할 거라 여겼던 한 달 치 월급을 몇 개월 뒤에 받았는데, 그때 통장 잔고를 보며, 돌연 ‘이때다’ 싶은 마음이 들었던 것이다.
이미 사고 싶은 카메라가 있었기 때문에 더 이상 인터넷 검색 같은 건 하지 않았다. 월급으로 받은 돈에 얼마를 더 얹어 그대로 판매자에게 넘겼다. 그가 돈을 받고 내게 건네준 종이 가방엔 카메라와 렌즈 세 개, 플래시, 렌즈 필터 그리고 필름 한 통이 들어 있었다. 필름이 있었다는 걸 알았다면 물론 그가 가져갔겠지만, 카메라 안에 말려 있어서 우리는 둘 다 모른 채로 헤어졌다.
카메라를 팔아넘길 때까지 몰랐으니 그는 아마 영원히 모를 것이다. 나중에 내가 발견한 건 빨간색 아그파 필름이었다.
1년이 지나, 나는 요 며칠간 찍은 필름들을 사진관에 맡기면서 그 필름도 함께 맡겼다. 수납장 한쪽에 놓아둔 필름은 언제나 눈에 띄는 빨간색이었고, 필름을 볼 때마다 자연스레 그 안의 사진들도 궁금했는데, 내게는 모르는 이의 사진을 궁금해할 작은 여유가 없었다. ‘정말 작은 여유였는데.’ 필름을 주머니에 넣어 사진관으로 향하는 길에 나는 잠시 생각했다.
스캔 된 사진은 홍콩인지 대만인지 아무튼 그런 느낌의 풍경들이었다. 사람은 없고, 온통 차와 건물들이 담긴 사진들. 가만히 보고 있자니 카메라를 사던 날 우리가 만났던 강남대로의 풍경도 떠오르고 그의 외모와 간단히 나눴던 대화들도 떠올랐다. 그는 홍콩에서 일하는 덩치가 큰 남자였다. 입술이 두껍고 눈이 움푹 들어가 있어 첫인상이 제법 거칠게 보였지만, 얘기를 나눠보니 의외로 말끔한 태도가 두드러졌다.
기대하지 않았던 편안한 분위기가 이어지고, 우리는 근처 카페에 들어가 차도 한 잔 마셨다. 그는 카메라를 어떻게 지니게 됐는지, 언제부터 쓰지 않고 있었는지 얘기했다. 그럴 필요까진 없었는데, 팔게 된 진짜 이유도 솔직히 말해주었다. 나는 그 앞에서 괜한 고마움에 웃고 있었다. 헤어지기 직전에 ‘홍콩에서 사다 줄 물건이 없는지’ 묻는 바람에 우리는 그만하자며 웃었고, 그렇게 각자의 방향으로 향했다. 어쨌든 그런 기억의 끝에서, 중국인지 대만인지 헷갈리던 사진들은 이제 홍콩이라고 여길 수 있었다.
자신의 사진이 없는 걸 보니 홍콩에서 그는 내내 혼자 다녔던 모양이다. 왜 이렇게 건물들만 잔뜩 찍어 놓았을까. 시시한 감이 없지 않았지만, 어쩐지 그의 시선이 싫지는 않았다. 오히려 이유 없이 가방에 카메라를 넣고 다니던 예전 내 모습이 떠올라 생각이 꼬리를 물기도 했다.
지금은 먼저 머릿속에 그림을 그리고 난 뒤 사진을 찍는 경우가 많다. 물론 손이 가는 대로 찍기도 하지만 여느 기자들이 그렇듯, 나도 펜과 카메라를 내려놓고 떠나는 여행을 종종 바라게 되었다. 아쉽다고 할 만한 것은 아니다. 다만 어떤 날엔 대뜸 허전한 기분이 들기도 한다.
어쨌든 다시 빨간 아그파 필름 얘기를 하자면, 나는 결국 사진의 풍경 속을 한참이나 여행했다. 비행기를 타지도 않고, 계획도 세우지 않았는데 ‘어쨌든 지금 홍콩의 거리를 걷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와 함께 걷는 느낌은 아니었고, 마치 내가 그 사람이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어처구니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사실 비슷한 경우가 종종 있다. 쉬운 예로, 영화나 책 속의 한 인물이 나와 너무도 닮은 탓에, 한동안 얽매여 지내게 되는 것처럼 말이다.
모니터 속 사진을 멍하니 보던 날에도 나는 그가 찍은 골목과 골목 사이를 내 상상으로 이어가며 이정표를 읽으려고, 또는 신경 쓰지 않으려고 노력도 했다. 그리고는 여행을 처음 하는 사람처럼 체력을 생각하지 않은 채 오래 걸었다. 택시를 탈까 그냥 걸을까 고민도 하고, 현지 날씨를 미뤄보거나 갑판의 물건들을 구경하며 앞으로 나아갔다. 주머니에 넣은 손으로 홍콩의 동전을 조몰락거리기도 하고 거리에 떠다니는 음식냄새를 피해 공원 쪽으로, 호수 쪽으로 발걸음을 돌리기도 했다.
내가 구경한 홍콩은 건물의 도시였다. 불편하게 숨을 쉬듯 건물 외벽은 부서졌다가 다시 단단해지고 있었다. 사람들은 그 아래를 아슬아슬 지나다녔다. 그리고 그곳은 모두가 불빛으로 이야기 나누는 도시였다. 하지만 많은 불빛이 영원히 켜져 있어도, 무언가를 밝게 비출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몇 시간 걸었을까, 눈이 피곤해지는 기분이 들어 그만 호텔로 들어갔다. 아니 어쩌면 허름한 한인 민박집일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담담한 마음으로 여행을 끝냈다.
‘항공사에 요금을 지불하지 않고 엉뚱한 필름을 현상소에 맡기는 방법.’ 수많은 여행의 방법 중에, 어쩌면 몇몇 사람들만 알고 있을 이 방법은, 우연이라는 필수조건 때문에 아무 때나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열심히 돈을 모으거나 가이드북을 완독해도 여행은 우리에게 오질 않는다. 그저 무료함을 잘 견디고, 주변을 언제나 새로운 것으로 여기는 것만이 방법이라면 방법일지 모르겠다.
나도 언젠가 필름을 잃어버린 적이 있다. 초록색 후지 필름이었을까, 노란색 코닥 필름이었을까. 이제는 어떤 사진 때문에 아쉬워했는지 기억조차 나질 않는다. 아쉬움도, 미련도 당연히 없다. ‘누군가는 나처럼 우연히 티켓을 쥐었겠구나.’ 그런 생각만 잠시 할 뿐이다.
누군가의 여행을 대신 하기도 하고, 나의 여행을 까맣게 잊으며, 우리 모두는 언제나 여행 중이다.
글 전진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