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멀리 달아나며 늘 함께]

어설퍼도 계속되는 대답들

자주 있는 일이 아니지만, 오래된 친구들을 만나면 이따금 서로에게 묻는 질문이 있다. 사랑이 뭘까. 민망하고 한편으로는 조심스럽기도 한 질문에 처음에는 그게 뭐냐고 웃다가도, 누군가 따뜻한 술기운으로 대답하기 시작하면 다들 가만히 들어주곤 했다.

대답 1

몇 해 전 처음 그런 질문이 내게 왔을 때, 그 한 문장이 너무 크고 낯설어서 당황했다. 우리가 하는 질문이라는 게 유행이 있다면, 언어를 배우고 나서 한 번 말해보고 그 뒤로 전혀 안 쓰다가 이제 두 번째로 해보는 것만 같았다. 사랑이 뭘까. 너부터 말해봐. 멍하니 생각에 빠진 나에게 친구는 다시 물었다. 내 몇 년간의 사정을 대충 아는 친한 친구들 앞에서 무얼 말해야 할까. 할 말이 없기도 하고 또 너무 많기도 했다. 삶의 커다란 사건들만 성큼성큼 되짚기 시작한 나는 조금은 속상한 마음으로 대답했다. 잊히는 것.

그 무렵, 헤어진 지 5년도 넘은 한 친구의 집 앞에 찾아간 적 있었다. 얼굴을 보려고 간 것도, 불러내려고 간 것도 아니었다. 다만 예전에 숱하게 오가던 것이 내 삶에 일어났던 일이 아닌 것만 같아서, 그런 기분이 낯설어서 한번 가본 것이다. 이제 와 생각해 보면 그 친구도 아니고 우리도 아니고 또다시 나를 만나러 간 것이 아니었을까. 씁쓸한 마음이다. 금세 건물 앞에 도착해서 위를 올려다보는데 4층인지 5층인지, 왼쪽인지 오른쪽인지 헷갈렸다. 401호였나, 402호였나. 그것도 확실하지 않았다. 그런 걸 또렷이 기억했다면 담담히 돌아왔으려나. 나는 흐려지고 지워진 기억들 때문에 그 앞에서 울 것 같았다. 30분쯤 앉아 있다가 이제 안 울 것 같아졌을 때 소리 없이 일어나 집으로 돌아왔다. 그래도 선명한 기억이 하나둘쯤은 있잖아. 내 얘기를 듣고 있던 한 친구가 물었다. 나는 그렇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사실 그런 건 없다고, 여전히 고개를 끄덕이며 한편으로 생각하고 있다. 또렷하면 또렷할수록 스스로 꾸민 기억일 때가 많았다는 걸 경험하며 사는 중이다. 너무 오랜만에 만난 옛 친구, 옛 연인과 지난 이야기를 해보면 서글퍼질 뿐이어서 추억을 오래 붙들고 있기가 어려운 적도 있었다. 어른이 되어 가는 것인지, 하나의 사건에 머리 수만큼의 진실과 머리 수만큼의 기억이 있다는 걸 담담히 믿으며 나아간다.

대답 2, 3

이 글을 쓰며 예전 일들을 떠올려 보니, 어떤 분위기라는 게 몰아치는 술자리가 있는 것 같다. 사랑이나 우정, 가족, 꿈 같은 종류의 뼈저린 주제들을 무턱대고 말하고 싶게 만드는 분위기 말이다. 평소에는 다루기 부담돼서 안 보이는 곳에 두던 주제들을 용기 있게 꺼내 놓는다. 자주 그러면 피곤할 텐데, 다 읽은 열매가 나무에서 무겁게 툭툭 떨어지는 것처럼, 1년에 한두 번쯤은 그런 자리에 있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요즘은 뭐라고 생각해? 몇 해 지나 또 질문이 찾아왔을 때 나는 돕는 것이라고 말했다가 또 몇 년이 지나서는 기다리는 것이라고 말했다. 누가 또 사랑을 물어올까. 그런 적이 잘 떠오르지 않는 걸 보면, 살면서 이렇게 세 번 대답한 것 같기도 하다.

돕는 것의 전제는 상대가 간절히 원하는 것이다. 오래 누군가를 알다 보면 숨기지 못하는 지점에 관해 알게 된다. 절대로 섣불리 다가가면 안 되는 개인적인 공간. 친한 관계더라도 평생 다가가지 못하기도 하고 그걸 꼭 알아야 관계를 지속할 수 있는 것도 사실 아니다. 그저 사람마다 그런 구석이 있기 마련이다. 그래서 그랬을까. 누군가 그런 공간에 문을 열어줄 때면 나는 강렬한 무언가를 느꼈던 것 같다. 그걸 사랑이라고도 생각했다. 타인의 욕망이나 아픔을, 이룰 수 있게 돕고 편안하게 해주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다. 처음엔 그를 위해서라고 했지만, 알고 보니 내가 그렇게 살고 싶었을 뿐이었다. 그래서 돕는 일에는 비록 내가 포함되지 않더라도 하겠다는 마음이 추가로 필요했다. 좋은 선물을 하는 마음으로 대가를 바라지 말아야 했다.

기다리는 것. 가장 최근에 이렇게 대답한 이유는 완두 때문이었다. 집에 둘이 있을 때 늘 완두가 나를 바라보고 있는데, 어느 날은 나도 오랫동안 가만히 마주 본 것이다. 완두는 무언가를 기다리고 있다. 눈을 보면 알 수 있다. 먹이를 기다리고 내가 곁에 오길 기다리고 산책과 쓰다듬는 손길을 기다린다. 10년 가까이 봤더니 대부분 알 수 있을 것 같고 실제로 꽤나 척척 잘 지내고 있지만, 역시 완두의 눈 속에는 더 깊은 너머의 공간이 있다. 설명을 해보고 싶지만 아무래도 내 말은 그 세계를 손바닥만 하게 만들고 말 것이다. 무척 넓은 것 같다. 이렇게만 쓴다. 그 넓은 공간에서 완두는 늘 혼자다. 우리가 모두 그런 것처럼. 거기서 무언가를 기다리는 것. 누가 찾아올 수 없는 곳이니까, 기다리는 마음이라고 해야 맞을까?

다시 또 질문

“질문과 대답을 계속하게 된다는 게 잘 생각해 보면 사랑 바깥에 있다는 얘기 같아.” 얼마 전 대화에서 친구가 말했다. 나는 그 말을 두어 번 곱씹고 나서 고개를 끄덕였다. 완전한 동의였다. 맞아. 이제껏 들은 대답들 중에 가장 정확한 말인 것 같아. 내가 말했다. 숨을 잘 쉰다는 것이 사실은 숨을 잊는 일인 것처럼, 사랑에 관해서도 마찬가지일 것이었다. 그 또렷한 대답 위에 어떤 말을 더 올려놓을 수 있을까. 잠시 동안은 이제 질문과 대답의 세계가 문을 닫는 것 같았다.

그런데도 어쩐 일인지 머릿속에 질문과 대답이 멈추질 않는다. 사랑이 뭘까. 이제 나는 혼자 있을 때도 가끔 묻곤 한다. 엄마라면 뭐라고 대답할까. 죽은 이들의 사유도 궁금하고 나와 헤어져 버린 친구의 대답도, 매일 만나는 친구의 대답도 궁금하다. 그리고 완두. 완두의 마음도. 정확한 대답, 변치 않는 마음보다는 그저 오늘의 마음을 묻고 싶다고 생각한다.

나는 사랑을 발견하고 싶은 걸까, 사랑 속에 살고 싶은 걸까. 오늘은 그 두 가지를 모두 포함하는 개념에 관해 생각해 본다. 무언가를 잡고서 놓지 못하는 나, 무언가를 제대로 쥐어줘도 또다시 투정 부리는 내가 마치 성가신 꼬마 같다. 조금은 무겁지만 누가 안아주는 것 같은 유년의 이불이 사랑이라면 어떨까. 나의 이 잠투정 같은 생활을, 밉고 그리운 사람들과 나이 든 개 완두가 기다리는 넓디넓은 세계까지 모두 덮어줄 만큼 큰 이불 말이다. 그런 게 사랑이라고 믿어보면 답답함과 포근함, 무더움과 안전이 동시에 느껴진다. 나중에 친구들을 만나면, 이불에 관해서 말해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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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사진 전진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