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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이 없는 세계에서
중요한 것은 말이 아니라는 걸 안다. 네 시선은 어디에 담겨 있을까.
상석 씨는 일하다가 만난 인연이다. 사진을 찍는 사람, 나는 액자를 만드는 사람. 성격이 다른데도 둘 다 술을 좋아해 일 년에 두세 번 액자 핑계를 대고 만나서 꼭 취한 채로 헤어지곤 한다. 언젠가 정말로 일 얘기가 할 게 있어서 이것 좀 해볼 수 있겠냐고 물었더니 일단 할 수 있죠 대답했다가, 수량이 많다고 하니까 다시 못 하겠다고 하는 상석 씨. 그처럼 욕심 없고 또 느릿느릿 말하는 건 내가 할 줄을 몰라서 덜컥 호감이 가는 사람이었다.
조금 서둘러서 만들어 줄 수 있어요? 그런 그가 얼마 전 내게 이런 부탁을 했다. 나에게 건넨 사진 속에는 쿠션에 가만히 앉아서 똘망한 눈을 하고 있는 개가 한 마리 찍혀 있었다. 친구와 함께 살던 아이인데, 가을에 죽었어요. 사진은 여름에 찍었고요. 우리는 두꺼운 패딩을 입고 겨울에 만난 것이었다. 어떤 시기에 맞춰서 친구들에게 전해주고 싶어 하는 것 같아서 나는 알겠다고 짧게 대답한 뒤 사진을 받아 왔다. 액자를 의뢰하는 사람 모두에게는 저마다 사연이 있다. 모두 중요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내가 전부 기억할 수 없는 것들. 나는 대부분의 이야기를 액자 만드는 동안에만 떠올려 보고 마는 편이다. 상석 씨가 전해준 사진도 분명 그랬었는데, 액자를 완성하고 나서 사진을 차분히 들여다보다가 그만 울어버리고 말았다. 일하다 눈물을 흘린 꼴이었지만, 생각해 보니 그 자체로 아주 오랜만이라는 걸 알았다.
흑백사진 속에는 놀랍게도 털이 얼마나 빛나는지, 자세가 얼마나 편안한지도 모두 찍혀 있었다. 렌즈를 보고 있다고 생각한 개의 눈에는 맞은편에 시선을 끌고 있었을 주인분들 모습까지 담겨 있는 것 같았다. 나를 울렸던 건 쿠션의 얼룩들이었다. 완두가 좋아하는 쿠션이나 이불에도 비슷한 자국이 늘 생긴다. 장난감을 물고 와서 놀거나 산책 후에 스스로 발 청소를 오래 하는 동안 묻어나는 침의 얼룩들. 그걸 발견하고 나자 사진 촬영을 하러 간다고, 개가 좋아하는 쿠션과 장난감, 담요 같은 것들을 챙겨서 집을 나섰을 견주분들 모습이 눈앞에 그려졌다. 상석 씨 말로는 개의 건강이 좋지 못해서 사진을 찍어 놓으려 했다는데, 한동안 그런 마음을 가지고 지내왔을 사람들을 떠올리다가 내 얼굴과 나이 든 완두 모습까지 상상하게 되었던 것이다.
혼자 조용히 울었더니 기분이 개운해졌다. 다시 태어난 것처럼 완두를 안아볼 수도 있었다. 말이 없는 개들. 말하는 걸 좋아해서 빨리 말하고 많이 말하는 나는 어쩌다가 말이 안 통하는 한 마리 개의 평생을 지켜보게 되었을까. 한 시기에만 느낄 수 있는 처음 겪는 일들의 답답함을 지나 이제는 우리에게 무엇이 필요한지 따져보지 않는 시절을 보내고 있다. 자려면 누워야 하는 것처럼, 어두우면 불을 켜는 것처럼 완두가 내 삶에 들어와 있다. 다른 건 몰라도 여기가 아프다는 한마디는 할 줄 알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적 있었는데, 이제는 그마저도 바라지 않는다. 여태 말없이 살아온 우리 관계에서 얻은 것들이 소중해서 그게 혹여나 깨질까 두려운 마음이 든다. 완두가 모르는 내 아픔도 그런 면에서 대수가 아니다. 우리는 말 없는 세계에서 꿋꿋함을 저절로 배워가는 게 아닐까. 인간의 언어가 끝없는 깊이를 갖는 것이라든지 멀리 비행하는 새들의 울음, 박쥐나 고래들이 미지의 데시벨로 대화를 하는 것도, 당장에는 서로 아무것도 나누지 못하는 존재들끼리의 동거보다 아름다울 수는 없는 것 같다. 제대로 통하는 것은 늘 아무것도 통하지 않는 것에 진다. ‘같이 있음’이라는 문장은 그 앞에 ‘그러니까’라는 수식어 대신 ‘그래도’가 붙어야 더 좋다고 나는 믿고 있다.
말이 없는 세계에서 말이 통하는 세계로 이동하지 않아도 괜찮다고 말해 본다. 완두와 살아보니 또 다른 동물과도, 그간 미워했거나 피했던 사람들과도, 낯선 현상이나 상황에도 다가갈 용기가 생긴 것 같다. 어쩌면 통하지 않는 세계가, 단순하게도, 통하는 세계보다 넓을지 모르겠다.
좋은 사진이 뭘까요. 언젠가 상석 씨와 술자리에서 내가 물었다. 다른 친구도 한 명 더 있었는데, 그도 마침 사진을 전공한 사람이어서 민망한 질문이 통과되었다. 꿈속의 장면이나 유년의 기억을 떠올리게 하면 무조건 좋은 사진이라고 내가 말했다. 사진뿐 아니라 그림의 경우에도 나는 그러리라 생각하고 있었다. 창작자가 누군가에게 선물할 수도 겨냥할 수도 없다는 얘기여서 다소 매정하게 들리는 대답이었다.
다른 한 친구는 색色을 잘 포착하고 표현하는 것이 좋은 사진 같다고 말했다. 우리는 서로의 대답에 끄덕이는 방식으로만 대화했다. 시선이 있는 사진이 좋은 사진인 것 같아요. 상석 씨가 말했다. 그런데 상석 씨 어쨌든 시선이란 게 모든 사진에 있는 것 아닌가요? 내가 말하자, 나머지 두 사람이 일제히 대답했다. 아니야. 없는 사진이 더 많아요. 나는 신기하게도 대답을 듣자마자 그들이 옳다는 생각을 했다. 말이 없는 세계 속에서 어떻게 살아가고 있나,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 질문해 봤더니, 시선이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내가 어디에 시선을 두고 있는지 떠올려 보면 어렵게 느껴지던 질문의 실마리가, ‘마음’이라는 단어로 바꾸자 잡힐 것도 같았다.
글·사진 전진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