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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다는 것에서 그 너머로
왜곡의 한복판에서 껴안는 기분을 느끼기.
언젠가 시각 처리에 관한 영상을 본 적 있다. 눈을 가지고 있고, 늘 잘 사용하고 있는 내가 그간 알지 못했던 내용이 담긴 것이었다. 기본적으로 본다는 것은 사물에게서 반사된 빛이 눈으로 들어온 후에 뇌에서 이를 해석한 ‘내용’이었다. 우리의 장기들은 사람마다 조금씩 다른 능력을 가지고 있고, 뇌에서의 해석과 판단의 차이도 있기에 늘 서로 다른 것을 보고 있다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니었다. 무엇이 정확히 이렇다, 정의 가능한 것이 아닌 해석의 영역이었던 것이다. 한 드레스 사진을 보며 서로 다른 색으로 해석해 웃음을 자아내던 한때의 이슈가 떠오르기도 했다.
시각 처리의 원리에 관한 그 영상은, 흥미로운 사례들이 늘 그렇듯, 나를 더 깊은 지점까지 안내했다. 이번에는 망막에 맺힌 정보를 뇌에서 어떻게 처리하는지에 관해 자세히 다룬 내용이었다. 두 눈에서 수집한 빛의 정보들은 각막과 홍채, 수정체를 통과해 망막에 맺히는데, 이때 상하좌우가 복잡하게 바뀌며 초점이 맞는 부분은 중요하게 다뤄지고 중심부 주변의 나머지 부분은 제대로 다뤄지지 않는다는 내용이었다. 초점 주변부의 정보들은 거의 ‘재구성’되는 것이다. “진실이 아닙니다.” 영상 속 진행자는 다소 흥분한 말투로 이렇게까지 표현했다. 시각을 통한 정보 처리의 70퍼센트가 초점이 맞은 곳에서 대부분 사용되는 시스템. 이 흥미로운 내용에서 진행자는 이렇게 말했다. “이걸 알고 나면 우리는 생각을 뒤집어 볼 수도 있습니다. 뇌가 세상을 인지하는 방식을 보면 우리가 얼마나 편협한 시각으로 살아가는지 알 수 있는 것이죠. 우리는 접싯물에 코를 박고 살아가고 있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그는 내가 본다는 것에 갇히지 말라고 얘기하고 있었다.
내가 무엇을 보고 있는지 생각해 보게 되었다. 그 생각은 내가 무엇을 믿고 있는지, 무엇에 갇혀서 생각하고 살아가고 있는지 돌아보게 하는 힘이 있었다. 패러다임을 넓히기 위해 노력해야겠다는 생각을 하다가 나중에는 패러다임 자체를 없애는 것에 관해 생각하게 됐고, 나아가서는 모든 게 변하고 있으며 내가 결국 이해하지 못하는 방식으로 세상이 구성되고 연결되어 있다는 생각까지 해보게 되었다. 그럼 나는 무엇을 봐야 할까. 매일 보는 것 너머에는 무엇이 더 있을까. 결국에는 생각이 다시 제자리로 돌아온 것이나 다름없었는데, 어쩐지 알 수 없는 가벼움이 마음에서 느껴졌다.
‘모른다.’ 나는 언젠가부터 이 말을 믿고 사랑하게 되었다. 포기와 회의의 감정은 아니었다. 내가 어쩌지 못하는 것에 대한 인정이랄까. 악착같이 살아가는 내 생활은 변함 없었지만 마음만은 편안했다. 모른다는 말은 여전히 호기심과 같은 말이었다. 분명 더 복잡하고 아름다운 무엇일 텐데, 하고 생각하게 하는 암호였다. 한 번이라도 제대로 이해하고 싶다고 말하는 과학자의 순수 의지, 한 번이라도 닿고 싶다, 포함되고 싶다는 종교인의 간절한 기도 같은 것. ‘알고 싶다.’라고 쓰면 더 이해가 쉬었을 말을 나는 왜 ‘모른다.’라고 쓰며 긴 설명을 붙이고 있을까. 그게 더 정확할 것이라는 나의 직관 때문인 것 같다.
이 글을 써야 한다고 생각만 하고 있을 때 나는 멀리 이동하는 비행기 안이었다. 가만히 앉아 별달리 할 게 없어 휴대폰에 저장된 지난 사진들을 훑어보게 됐다. 거기엔 가을 아침을 구경하는 며칠 전 완두의 동영상도 있었다. 잠에서 깬 지 얼마 되지 않아 눈꺼풀이 무거워 보이고 움직임도 느렸다. 신기하게도 씻기지 않은 털이 어제보다 더 부드러워 보였다. 창가에 있는 접이식 테이블로 뛰어 올라간 완두는 창밖을 바라보고 있다. 초점은 카메라에서만 맞추고 있는 게 아니었는지, 직접 촬영한 영상 속에는 내가 촬영 당시 보지 못했던 것들이 많이 담겨 있었다. 냄새를 더 잘 맡고 싶은지 완두는 허공에 대고 코를 킁킁거리며 눈도 살짝 감는다. 이마에 난 털들이 가라앉지 않고 한 가닥 한 가닥 서서 바람에 흔들려 움직이고 햇볕을 받아 빛난다. 1분가량의 영상을 남기고 나서 따뜻해진 털을 실제로 쓰다듬고 물렁한 배에 코를 묻어 냄새를 맡던 내가 기억났다. 아침 내내 완두를 보고 있을 수 있을 것 같은 기분도 떠올랐다. 매일 무언가를 그렇게까지 느낄 수는 있을까. 나는 그럴 수 없다고 생각한다. 이토록 사랑하는 존재임에도 대부분의 시간 동안 나는 완두를 스쳐 보내며 살아간다. 완두가 내 의식 속에서 자주 재구성되는 배경인 것을 인정해야 하는 것이다. ‘내가 무언가를 제대로 보고 있는 걸까?’ 사랑하는 관계들 속에서만 이 질문이 탄생한다고 믿으며, 못내 안심하며 지낸다.
꿈. 꿈이라면 이런 꿈을 꾼다. 가끔이더라도, 초점이 맞춰지는 것보다 더 정확히 완두를 볼 수 있기를. 70퍼센트가 아닌 100퍼센트를 사용해서. 그리고 그보다 더. 완두에게 보이는 것 너머까지 볼 수 있다면 좋겠다. 할머니 할아버지의 결혼식을 직접 본다면, 갓난아기였던 아빠가 이불에 폭 둘러싸여 잠든 모습을 내가 볼 수 있다면, 나는 그 존재들을 내 삶에 새롭게 들여놓을 수 있을지 모른다. 완두에게서 나는 무엇을 볼 수 있을까. 완두가 베를린이나 바르셀로나 같은 도시에서 뛰어노는 모습과 노견이 되어 뛰지 못하는 모습들도 볼 수 있기를. 한 번도 본 적 없는 완두의 아빠 개, 하얀 진돗개라고만 알고 있는 그 개를 만나 쓰다듬어 주는 나도 볼 수 있기를. 완두가 흙이 되어 풀을 키우면 내가 그 위에 누운 모습, 우리의 몸이 사라지고 나서 분자들이 어딘가에 둥둥 떠다니는 상상도 해본다. 나는 완두를 그렇게 껴안고 싶다. ‘신비’ 아인슈타인은 인간이 경험할 수 있는 가장 좋은 것이 이것이라고 말했다.
글·사진 전진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