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멀리 달아나며 늘 함께]

개의 메모

한 번도 본 적 없는, 하지만 매일 적어 나가는 완두의 메모들.

― 봄의 씨앗

내가 살고 있는 곳에서 멀지 않은 곳에는 인적이 드문 뒷산이 있다. ‘궁동공원’이라는 이름의 남가좌동과 연희동을 가르는 나지막한 언덕인데, 요즘처럼 날씨가 좋아 홍제천에 사람이 북적일 때도 그곳에서는 사람 마주치는 일이 잘 없다. 지칠 때까지 뛰어다니고 여러 냄새 맡길 좋아하는 완두를 잠시 풀어 놓기에 그만인 곳으로, 우리는 계절에 상관없이 일주일에 두세 번씩 찾아간다. 일단 줄에서 풀려나면 완두는 길과 길이 아닌 곳을 딱히 구별하지 않고 나다닌다. 다른 동물 냄새를 쫓는 건지 갑자기 방향을 틀어 덩굴 사이로 파고들기도 하고, 높은 나무 꼭대기만 보며 다닐 때도 있다. 그러고서 집에 돌아와 보면 몸 여기저기에 이름 모를 씨앗들이 붙어 있다. ‘이걸 흙에 심으면 싹이 나오려나?’ 나는 몇 계절 동안 아무 생각 없이 떼어서 버리곤 했는데, 한 번은 산책을 함께 갔던 친구가 씨앗을 작은 봉투에 모아 놓았다. 아직 심어 보지는 않았지만, 어쩐지 봄에 묻혀 온 씨앗에서는 그리 어렵지 않게 싹이 터져 나올 것만 같다. 씨앗들을 잘 모아서 모양에 따라 분류해 놓고, 나중에 가짓수가 좀 되면 한꺼번에 심어 봐야겠다. ‘개의 정원’ 작은 팻말도 세우고 말이다. 완두는 자신이 그 정원의 주인인 줄도 모르고 옆에서 또 낮잠을 자고 있을 텐데. 잠든 완두와 작은 정원을 잇고 있는 상상 속 내 얼굴에서 고요하게 생기가 돌고 있다.

― 인형의 위치

어릴 때는 물건을 죄다 찢어 놓기만 하더니, 성견이 돼서는 무엇 하나 망가뜨리지 않고 오래가지고 논다. 튼튼한 이빨을 이용해 살짝만 물려고 힘 조절하는 걸 보면 참 귀엽다. 친구들도 그 귀여움을 아는지, 이 집에는 선물 받은 인형이 아주 많이 있다. 평소에는 무신경하다가 집이 어지러워서 신경이 곤두서면 널려 있는 인형들을 하나씩 주워 담으며 완두 머리를 한 대씩 쥐어박는다. 장난감이 얼마나 많은지 개수대로 다 못 때릴 정도다. 다 치웠다고 생각하고 지내다가, 어떤 인형은 시간이 한참 지나 발견된다. 절대 인형이 있을 만한 곳이 아닌 곳에서, 먼지가 조금 쌓인 채로. “여기가 이 집의 비밀 공간.” 완두가 물어다 놓은 물건들이 자주 발견되는 곳에는 이런 메모가 적혀 있다. 이번에는 완두 머리를 때릴 마음이 전혀 들지 않고, 이 공간에 쌓인 것들을 늘 못 본 채 해주며 살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 목소리의 창문

문장으로는 표현하기 어려운, 완두를 부르는 내 목소리가 있다. ‘완두’라는 두 음절을 이어서 부를 때 생겨나는 높낮이와 길이, 음색 같은 것들. 한 번 들려주면 바로 이해할 수 있지만, 글자로 쓰려면 어쩐지 아주 어려운 단어들까지 필요할 것만 같다. 그리고 가끔은 ‘완두’라고 부를 때 위치와 거리가 중요할 때도 있다. 외출을 마치고 집에 돌아오는 길에, 건물 아래에서 3층에 난 창문을 향해 외칠 때가 그렇다. 차들이 지나는 소리, 이런저런 가게가 영업을 하며 내는 소리, 홍제천 농구 코트에서 들리는 공 소리까지 잘 얹어서 내가 완두를 부르면, 몇 초 후에 창가로 뛰어오른 완두의 얼굴이 보인다. 창가에서 나를 계속 기다릴까 봐 가끔씩만 부르는데, 가끔이라도 그렇게 인사할 수 있는 구조여서 행복하다. 안 그래도 반가운데, 그러고 나면 조금 더 격렬하게 반가운 기분이 드는 것이다. 내가 집에 함께 있을 때, 가끔 밖에서 누군가 큰 소리로 서로를 부르는 소리에 완두가 반응할 때가 있다. 잠결에 창가로 달려가 그게 어디서 난 소린지 눈을 크게 뜨고 아래를 살핀다. 귀엽기도 하고 한편으론 안쓰럽기도 한 모습. 이 작은 집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며, 완두는 귀가 점점 커지고 있다.

― 몸에 눌린 이불

창가 인사를 마치고 나는 3층까지 달려 올라간다. 문을 열자마자 달려든 완두는 나를 밀어서 넘어뜨리고 얼굴 핥기를 다섯 번 반복한다. 가방을 가까스로 내려놓고 손도 얼른 씻고 와 이제 여섯 번째 인사까지 하고 나면 그제야 흥분이 가라앉는다. 집에 있는 동안 어땠는지 나는 메모들을 확인한다. 인형들의 위치, 줄어든 물과 사료의 양 같은 것들. 외투를 벗고 침대 쪽으로 가보면 거기에는 몸으로 눌러 쓴 긴긴 메모가 적혀 있다. 동그랗게 몸을 말고서 오래 누워 있었을 이불 위. 손을 대보면 아직 따뜻할 때도 있다. ‘나 잘 자고 있었어요.’라고 읽어야 할까, ‘나는 외로웠어요.’라고 읽어야 할까. 보이지 않는 그 메모는 늘 나를 괴롭히고, 아름답게 돕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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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사진 전진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