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멀리 달아나며 늘 함께]

내가 있을 곳

하고 있는 일과 지내는 공간을 통해 설명하게 되는 지난 몇 년간의 생활. 일기 같은 것임을 알지만, 매일을 꿋꿋이 살아내는 이들에게 조용히 알은 채 하고 싶은 마음으로 적어나간다.

침대가 있던 곳

대학교에 다닐 때까지 누워서 잠들던 작은 침대가 부모님 댁에 아직 그대로 있다. 깨끗하게 세탁된 침구와 부푼 베개는 다른 누가 나 대신 눕지 않고 언제든 애틋하게 비워진 채다. 그 풍경을 상상하면 정말로 어딘가 누운 것처럼 깊은 회복의 숨을 한번 쉴 수가 있다. 이제 자식들이 제 할 일을 찾아 집을 떠나 더 이상 쓸 사람이 없어서이기도 하지만, 빈자리에는 부모의 신비로운 기다림이 가득 채워져 있다. 가끔씩 집에 들러서 예전처럼 거기에 누워 천장을 바라보면, 식탁에서 나는 소리들을 방문 너머로 듣고 있으면 알 수가 있다.

서울에 나와 살면서 서너 번의 이사를 겪었다. 밥솥과 그릇들을 옮기고 화분과 옷가지를 옮기지만, 늘 잘 곳을 옮기는 일이 가장 중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내가 나를 지켜보지 못하는 동안 편안한 마음으로 누워 있을 곳이 바로 집이라는 생각에서다. 눕기 전에 일어난 수많은 일이 어째서인지 누워서부터 제 의미를 찾아가는 것만 같다. 잠을 무어라고 딱 집어 말하면 좋을까. 빈 침대를 단정히 정리하던 엄마는 대답할 수 있으려나.

액자 제작소를 만들어 일하기 시작한 지 어느덧 4년이 넘었는데, 나는 그동안 거기서 일도 하고 잠도 잤다. 가진 돈이 적어서 일터와 휴식처를 합쳐 생활한 것이다. 목공소에 사는 사람이 세상에 몇이나 될까. 가끔 나뭇가루에 지친 날에는 친구에게 넋두리할 때도 더러 있었다. 한편으로 적응이 되어 무던한 기분이 들던 날도 물론 있었고, 청소를 잘하는 인간으로 거듭난 스스로를 칭찬하는 날도 있었다. 어떤 생활이건 해볼 만하겠다는 생각이 뿌리내린 것이 그간 생활의 소득일까. 심심한 위로로 결론을 내본다. 얼마 전엔 작은 집을 하나 빌려 생활용품을 모두 옮겼다. 일터는 일터로, 집은 집으로 쓸 수 있게 된 것이다. 이제는 출퇴근이라는 단어도 쓰고, 자다가 못다 한 일이 생각나더라도 어쩔 수 없이 계속 누워 있는 생활의 시작이다. 첫 자취 생활 때부터 부모의 혼수 이불을 얻어 와 이사 때마다 들고 다녔는데, 이제는 허락 하에 그걸 버렸고, 침대도 더 큰 사이즈로 마련했다. 작업실에서 만들어 사용하던 나무 침대는 분해해서 깨끗이 닦아 정리해 두었다. 침대가 있던 자리가 별안간 텅 비었다. 여기 이 두 평 남짓한 자리에서 잠들며 모든 것을 받아들이고 또 회복했다고 생각하니 문득 고마운 마음이 일었다. 만약 주인이 없는 들판이나 숲속이었다면, 그대로 두고 종종 찾아오고 싶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나는 묘 주변을 관리하듯, 침대가 있던 자리를 구석구석 깨끗하게 청소했다. 그러고 나서 다른 물건을 놓기 시작하면 그 자리는 금세 없던 일이 되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액자가 있는 곳

아침마다 낯선 곳에서 눈을 뜨는 기분은 이사 초반의 작은 기쁨이다. ‘어디지?’ 하며 놀랐다가 이불 위에서 편히 쉬고 있는 개와 반바지 입은 나를 발견하는 것. 따뜻한 물 한 잔을 마시면서 천천히 집을 구경한다. 나무도 기계들도 없다. 이전의 환경과 대비가 심하기에 약간의 여행 기분마저 드는 요즘이다. 할 일 없는 집에서의 시간을 보내다가 개와 함께 작업실로 향한다. 십여 분 거리밖에 되지 않는 곳이고 그간 지내면서 다녀본 길이지만, 출퇴근하며 반복적으로 걷는 길은 또 새로운 형식으로 인식되는 것 같다. ‘출근길’ 같은 제목이 생긴달까. 은연중에 여러 번 보게 되는 간판들, 어느 한 집의 특이한 창틀, 매일 닫혀 있는 미스터리한 가게가 있다는 것도 알게 되고, 어느 건물의 공사 진행 상황을 무심결에 매일 체크하게 되기도 한다.

생활의 흔적이 이제는 거의 사라져 버린 작업실에 들어선다. ‘액자 만들기.’ 언젠가부터 이런 제목이 내 생활의 일부분이 되어, 그저 그것을 계속해 나가는 것만으로도 별 탈 없이 삶이 유지되고 있다. 이런저런 사연이 담긴 그림과 사진과 물건이 액자에 담기기 위해 작업실 한편에 모여 있고, 액자가 될 나무들도 조용히 숨 쉬고 있다. 이곳에서의 생활이 고단하기는 했어도 문을 열면 풍겨오는 나무 냄새가 나는 참 좋았다. 

나름의 순서로 분류해 놓은 것들을 펼쳐 놓고서 하나하나 어떤 액자를 만들지 고민해 본다. 확신이 들면 노트에 계획을 적고, 몇 번 되뇐 뒤 작업을 시작한다. 툭툭, 이제는 꽤나 자신감을 가지고 팔다리를 부린다. 반듯함을 이루고 두께를 맞추고 나무가 휘는 방향을 하나로 정리하고 잘라내고 잇는다. 이 일을 어떻게 시작하게 되었는지, 액자를 맡기러 온 사람들이 종종 내게 묻는다. 제대로 된 답변을 잘 못하고, 그때마다 조금씩 다른 뉘앙스로 말하는 걸 보면 나조차 이유를 모르거나 혹은 찾고 있는 중인지도 모르겠다. 지금의 기분으로 대답해 보자면, 나는 그저 오래 할 수 있는 일을 찾았던 것 같다. 일을 하는 사람에게는 말 거는 것도 편하고 누군가 계속 찾아와 부탁을 하니까. 성격이 둥글지 못한 나는 사람들과의 자연스럽고 옅은 연결감을 일을 통해 안정적으로 느끼고 싶었다. 그리고 일이라는 게 한편으로는 혼자서도 잘 있게 돕는다는 생각도 했다. 혼자 잘 있는 것이 관계의 시작 아닌가. 그러고 보면 나는 사람을 무척 좋아한다. 

오래 일하려면 매일 조금씩이라도 능숙해지는 기술이어야 했고, 유행을 탄다거나 너무 복잡한 상호작용 속에 있으면 곤란했다. 클래식한 물건이어야 했다. 마침 목공 기술을 몸에 익혔으니, 액자를 만들기 시작했던 것이다. 자정 무렵에 조용히 나무를 다듬으며 라디오를 듣고 있으면, 세상을 더 구경하고 싶은 에너지가 차오르는 걸 느낀다. 완성된 액자들에는 나름의 메시지가 각각 담겨 있다. 나만 알고 있는 작은 문제점들이나 아름다운 점들이 내게 말을 건다. 액자를 받아보는 순간의 표정, 시간이 지나 액자가 걸려 있다는 걸 잊고 지내는 사람들의 표정까지 한번 상상해 본다. 액자라는 물건의 특징은 어딘가에 걸려 자꾸만 노출된다는 점이다. 가끔 내가 만든 액자를 전시장이 아닌 카페나 숙소, 누군가의 인터넷 게시물에서 우연히 볼 때가 있다. 수다스러운 새처럼, 소나기처럼 이따금씩 만나게 된다. 물건을 만드는 사람으로 느끼는 큰 기쁨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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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사진 전진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