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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영화에는 언제나 일상적인 장면이 있다. 먹고 마시고 요리하는 사람들의 평범한 시간들은 고요함을 안겨 준다. 왠지 모를 안심으로 남았던 순간들. 이곳에 모아 마음 두둑이 채워본다.
Movie —실뱅 쇼메 <마담 프루스트의 비밀 정원>(2013)
말 못 하는 피아니스트 폴. 오래된 빌라 계단 사이 얼핏 보면 벽으로 착각할 만한 문에 ‘Proust’라는 글자가 적힌 초인종을 누른다. 기척 없는 너머에 끌려가듯 문을 열어본다. 어둡고 좁은 복도를 지나 도착한 곳은 푸른 식물이 가득한 프루스트 부인의 비밀 정원이다. 꼭꼭 숨겨진 정원에 빛은 어디서 드는 것인지, 정원은 낯설지만 이상한 만큼 아름답다. 폴은 프루스트가 건넨 차를 마신다. “뒷맛을 없애려면 마들렌을 먹어요. 버섯 향이 좀 나죠? 걱정 말아요. 진짜 허브차니까.” 눈이 풀리고 정신이 몽롱해지는 폴. “우쿨렐레를 칠 때 중요한 건 생각이거든.” 프루스트가 우쿨렐레를 치자 폴의 의식은 어딘가로 떠나버렸다. 폴이 정신을 놓은 건, 프루스트 부인의 아스파라거스 때문이었다. 이건 그냥 아스파라거스가 아니었다. 기억을 씻어낸 다음 오줌으로 내보내는, 조금 이상한 아스파라거스다.
두 살 때 부모님을 잃고 말도 함께 잃어버린 폴에겐 떠올릴 수 없는 아픈 기억이 있다. 기억의 파편이 악몽으로 남아 그를 괴롭게 한다. 깊은 기억의 무의식으로 향하듯 허락도 없이 들어간 프루스트의 정원에서 폴은 조금씩 실마리를 찾는다. 프루스트가 내어주는 홍차와 함께 꽉 잠겨 있던 기억들을 스스로 꺼내기 시작한다. 프루스트는 폴을 떠올리며 말한다. “죽음이 그 애를 못 살게 하는 게 아냐. 쳇바퀴 도는 삶이 문제지. 당신 레코드판처럼.” 사람은 망각할 수 있어 다행이지만 깊은 무의식 속에 있는 기억은 찌꺼기처럼, 반드시 남아 있는 법이다. 무의식에서 건져낸 슬픔이 이유 없이 몰려올 땐 잠시 바라봄이 필요하다. 오줌으로 흘러가 버린 기억 속에는 반드시 좋은 것도 있을 테니까.
Movie —노라 애프론 <줄리 & 줄리아>(2009)
2002년 뉴욕의 줄리는 무료한 퇴근길에 퐁듀를 보고 초콜릿 크림 파이를 떠올린다. “요리가 왜 좋은지 알아? 직장 일은 예측불허잖아. 무슨 일이 생길지 짐작도 못 하는데 요리는 확실해서 좋아. 초코, 설탕, 우유, 노른자를 섞으면 크림이 되거든. 맘이 편해.” 줄리는 다정한 남편과 안정적인 직장이 있지만 정작 소중한 한 가지를 잃은 듯 답답한 일상을 보내고 있다. 작가가 되고 싶지만 기회는 없고, 잘나가는 친구들 사이에서 한없이 작아지기만 한다. 1949년 프랑스의 줄리아도 다르지 않다. 주변은 평화롭지만 자신 안의 중요한 한 가지를 찾아 헤매고 있다. 영화는 두 사람이 삶의 돌파구를 찾아가는 여정을 그리며 이야기의 중심에 줄리아의 레시피를 두었다. 그녀의 레시피를 소재로 블로그 연재를 시작한 줄리는 결코 순탄치 과정을 시작한다. 재료를 사느라 월급의 반을 탕진하고 닭다리를 묶다가 바닥에 요리를 엎질러 버리기 일쑤다. 고군분투하며 요리를 하고 글을 올리지만 블로그엔 아무런 반응도 돌아오지 않는다. 하지만 기회는 늘 가까이에 있는 법. “난 닭다리도 못 묶어.” 줄리가 주방 바닥에 앉아 울며 절망하고 있을 때 뜻밖의 행운이 찾아왔다.
줄리는 블로그에 버터에 관한 이야기를 쓴다. “버터만 한 게 있나요? 생각해 보세요. 아주 환상적인 요리를 먹고 안에 뭐가 들었지? 하면 영락없이 그 안엔 버터가 있죠.” 훌륭한 요리에 버터가 있다면 줄리와 줄리아에게 있던 것은 뭘까. 나의 버터는 어디에 있을까나.
Movie —오기가미 나오코 <안경>(2007)
휴대전화가 터지지 않는 곳을 찾은 ‘타에코’는 남쪽의 조그만 바닷가 마을에 도착했다. 느리고 엉뚱한 사람들, 이곳 사람들은 어딘가 이상하다. 느긋한 아침 식사를 함께 하고, 바다에 모여 진지한 얼굴로 우스꽝스러운 체조를 하고, 아무 말도 없이 나란히 앉아 우쿨렐레를 치는 일상. 관광할 곳을 찾는 타에코에게 민박집 주인 유지와 또 다른 손님 사쿠라 씨는 사색을 제안한다. 타에코는 어딘가 낯선 이들을 피해 다른 민박집을 찾았다가 길 거리에 나앉지만, 결국 사쿠라 씨의 자전거를 타고 다시 돌아오게 된다. 돌아올 때는 질질 끌고 다니던 여행 가방도 거리에 버려 두고 온다.
“사색하는 거에 무슨 요령이라도 있는 건가요?” “요령이라, 예를 들면 옛 추억을 그리워한다든지, 누군가를 곰곰이 떠올려 본다든지 하는 거죠.” 유지는 다시 돌아온 타에코에게 사색에 대해 일러주고 사쿠라 씨가 만드는 빙수를 권유한다. 경계를 조금 허문 타에코는 그녀의 가게에 가서 빙수를 부탁한다. 투명한 접시에 팥을 담고 얼음을 천천히 갈아 넣는 사쿠라 씨. 시럽을 부어 타에코에게 건넨다. 빙수를 한 입 먹고 문득, 깨달은 표정을 짓는 타에코. 무언가 사색할 거리를 찾은 듯 하다. “이거 얼마죠?” 사실 사쿠라 씨의 빙수는 가격이 없다. 얼음 아저씨는 그녀에게 얼음을 냈고, 작은 꼬마는 직접 접은 종이 인형을 건넸다. 우리는 사쿠라 씨에게 무엇을 건넬 수 있을까. 영화가 흐를수록, 사람들이 빙수를 함께 먹는 장면이 쌓일수록, 타에코가 바다에 점점 더 스며들수록, 이 섬의 이상한 사람들이 사랑스러워진다. 타에코처럼 이곳에 있을 재능을 지닌 사람이 되고 싶어진다. 빙수에 들어갈 팥을 끓이던 사쿠라 씨는 말한다.
“중요한 건 조급해하지 않는 것. 초조해하지 않으면 언젠간 반드시.”
글 김지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