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AROUND
CLUB ONLY
SERIES
MEET AROUND
SUBSCRIBE
SHOP
탈로 제주
제주시 애월읍 하귀리. 육지 사람에게는 그 이름이 영 낯설게 느껴지다가도, 마을 어귀에 다다르면 풍채 좋게 서 있는 나무들 덕분에 마음이 놓인다. 작은 마트 하나 곁에 없는 동네를 거닐다가 낮은 대문 너머로 따뜻한 불을 켜둔 집을 바라본다. 탈로 제주, 머물던 이들을 기억하는 그곳에서 하루를 보낸다.
제주의 오래된 동네를 거닐 때마다, 괜스레 가슴을 잔뜩 부풀리며 숨을 들이마시고 내쉬어본다. 투박한 현무암으로 쌓은 돌담과 그 너머로 한눈에 들여다보이는 이웃의 마당과 집. 모든 것이 높고 네모난 도시의 것과 달리, 시야가 한껏 내려가 편안하고도 평화로운 풍경을 만끽할 수 있기 때문이다. 섬의 오랜 전통과 이웃 간의 신뢰가 어우러져 만들어진 풍경을 보는 육지 사람의 마음에는, 부러움도 조금 피어난다.
살림집만 모여 있는 조용한 마을 하귀리, 즉 학원동에 자리한 탈로 제주는 그곳에서 나고 자란 집이다. 탈로 제주를 이끄는 고광수 대표의 증조할아버지가 손수 터를 닦아 집을 올렸다고. 1930년대에 지어진 농가 주택은 한 가족이 대를 넘고 넘어오면서 조금씩 옷을 갈아입었다. 새마을 운동의 일환으로 지붕을 초가에서 슬레이트로 바꿔 얹었고, 집 외벽에는 시멘트를 발라 궂은 날씨에도 끄떡없도록 만들었다. 바람이 세게 불어 빗물이 들이치기 쉬운 제주 날씨 때문에, 툇마루는 집 안쪽으로 들이기도 했다.
한때는 마당에 심어둔 과일나무에서 열매가 통통하게 차오르면, 증조할아버지가 한 아름 따다가 손주들에게 쥐여주기도 했다. 그러나 세상에서 가장 무거운 것은 시간이라 했던가. 가족들이 각자의 자리에서 바삐 일상을 보내는 동안 집은 시간의 흐름을 따라가지 못하고 여기저기 앓기 시작한다. 잠시 세를 내고 살던 사람들이 험하게 쓴 탓도 있었다. 고광수 대표는 가족의 손길이 닿은 집을 지키기 위해 동업자 지치구 대표와 함께 팔을 걷어붙였다.
1년여 간 새로 단장한 집에는 제주 토박이 문화와 북유럽의 지혜가 스며들었다. 두 대표의 관심사를 한데 풀어놓은 결과다. 섬이 마련한 자리에 보기 좋게 놓인 북유럽 가구들은 아늑한 쓰임까지 제공한다. 디자이너 ‘알바 알토Alvar Alto’와 ‘브루노 마트손Bruno Mathsson’의 정교하고도 편안한 가구들, 오래전 핀란드에서 만든 손잡이와 체코에서 온 스위치까지 허투루 달린 것 하나 없이 아름다움이 머문다.
농가 주택이 탈로 제주라는 새로운 이름을 얻고 난 후에도 시간의 흔적은 여전히 집에 기록되어 있다. 집을 처음 지을 때 쌓아 올렸을 현무암 바깥벽, 억새 짚과 흙을 섞어 처마 아래 틈을 채운 곳곳, 모래 섞인 시멘트를 바르거나 슬레이트 지붕을 얹으며 처마 끝을 목재로 덧댄 흔적까지. 두터운 지층을 들여다보는 것처럼, 겹겹이 쌓인 시간의 흐름을 관찰하게 된다.
시간의 무게를 지탱하기 위해, 거스르기보다 등을 맞대기로 택한 집은 새로운 옷을 입은 채 다시금 자연스러운 표정을 띤다. 침실에서 내다보이는 45년 된 귤나무뿐 아니라 뒷마당 주변에는 하귤나무, 댕유지나무, 무화과나무가 여럿 심어져 때마다 그 결실을 감상할 수 있다. 손주들에게 달큰한 열매를 안겨주던 증조할아버지처럼, 탈로 제주로 걸음 하는 손님들을 챙기는 마음이다.
탈로 제주의 식탁 한편에는 언제나 섞음차를 올려둔다. 레몬밤과 루이보스 등이 섞여 향긋하고도 달큰한 맛이 맴도는 차로, 한 잔의 여유에 몰입하기에 알맞다. 곳곳에 놓인 책들을 넘겨보는 것도 빼놓지 말아야 할 재미다. 제주를 상징하는 변시지 화가의 그림 도록, 1980년대 제주의 모습을 담은 이갑철 작가의 사진집뿐 아니라 오래된 것의 가치를 풀어둔 에밀리 스피백의 《낡은 것들의 힘》 등 제주와 북유럽, 빈티지라는 주제 아래 문장들을 모아두었다.
집에 담긴 이야기를 한바탕 풀어두었지만 정작 그곳에서 보내는 시간이 충만하지 않다면 모두 그른 것 아닐까. 탈로 제주에서의 휴식이란 나를 고요히 보듬어주는 것과 같은 말이다. 안채와 바깥채를 잇는 통로에는 큰 창이 있는데, 그 너머로 우거진 나무와 한라산, 하늘이 그림을 만든다. 머무는 이가 한 폭의 그림을 놓치지 않도록 블라인드도 달지 않았다고. 조용한 동네와 푸른 풍경은 작은 무언가에 연신 집중을 뺏기던 일상의 번잡함을 지운다.
나고 자란 터전을 끊임없이 보듬는 이의 걸음을 따라간다. 그들의 애틋함을 알아채고 또 한 번 기나긴 시간을 지탱해 낼 집의 모습도 헤아려본다. 머문 자리를 기억하는 탈로 제주에서의 휴식, 마음에 오래 머무는 장면을 챙겨 매듭지은 채 오래된 동네로 다시 나선다.
글 이명주
사진 박자은 자료 제공 탈로 제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