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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신사·그래픽하·상록
우리는 쉽게 책을 손에 쥔다. 두어 장 넘겨보며 시선으로 페이지를 뛰어다니다가 가볍게 닫아 그 자리에 다시 내려둔다. 아주 간단해 보이는 행위 너머로 시선을 보탠 이를 떠올려 본 적 있는가. 별개의 의미로 존재하던 요소들을 하나로 묶어내고, 책이 어떤 모양새로 읽는 이와 마주할지 고민하는 이들이 있다. ‘북 디자이너’로 불리는 이들 중에서도 오롯한 모양새로 홀로 선 인물들을 만났다. ‘동신사’의 김동신, ‘그래픽하’의 이건하, ‘상록’의 함지은까지, 우리 손에 쉽게 들리는 책 안팎으로 섬세한 의도가 완성한 세계가 존재한다. 세 사람과 함께 그 세계를 힘껏 열어 보인다.
그에게 책은 온 세상이 바뀌어도 여전히 변하지 않을 즐길 거리 중 하나다. 기후위기로 파국을 맞게 될 미래에도, 더 이상 전기를 지금처럼 맘껏 사용할 수 없는 상황이 오더라도 다른 건 못 해도 책은 읽을 수 있겠다며 우스갯소리를 덧붙이는 김동신 디자이너는 출판사 ‘안그라픽스’, ‘나남’, ‘돌베개’를 거쳐 2020년부터 홀로 섰다. 기본을 고민하고 지키며, 문득 떠오른 충동을 거침없이 따라가는 그의 디자인 세계를 엿본다.
장르와 분야를 넘나드는 디자인 속에서 ‘책’을 고른 이유가 궁금해요.
디자이너로서 경력을 쌓아가던 시기에 인쇄물 전반을 두루 다루는 에이전시에 입사했는데, 노동 강도가 높아 일 년 남짓 근무하고 그만두었어요. 일상에서 내 시간을 확보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고, ‘출판사라면 가능하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기대에 구인 정보를 찾아보던 게 떠오릅니다. 그렇게 출판계에 발을 들여놓았고, 현재는 제 주요한 작업물로 책이 소개되곤 하지만 책 외에 다른 매체 작업에도 관심이 있어요.
1인 스튜디오로서의 독립은 어떻게 결정하게 되었나요?
디자인 업무 외에도 이것저것 하는 일이 많았는데 점점 회사 일과 병행하기 힘들어져 독립을 결심했습니다. 스튜디오 이름은 2015년 언리미티드 에디션에 처음 참가하기 위해 부스명을 정할 때 즉흥적으로 만들었어요. 제 이름 ‘동신’에다가 회사라는 단어에 쓰는 ‘모일 사社’를 붙인 건데, 들을 땐 뭔가 평범하고 오래된 회사 느낌인데 실은 이제 갓 생긴 1인 디자이너 부스라는 갭이 재밌었거든요. 인명스럽지 않은 이름 덕을 봤다고 생각합니다(웃음).
소속되었던 시절과 독립한 현재의 업무 방식은 어떻게 다른가요?
회사의 일원으로 있을 땐 사람들과 한 공간에서 꾸준히 대면하면서 책을 만들었다면, 독립 이후에는 의뢰부터 발행까지 한 번도 만나지 않고 서면으로만 소통하는 경우도 많아요. 아마 팬데믹 이후 더욱 강해진 경향일 듯싶은데, 요즘 사람들은 전화 같은 직접적인 소통을 어려워한다고도 하잖아요. 프리랜서 노동에서는 메일로 협업하는 게 구시대적이지 않은 합리적인 업무 방식이라는 분위기도 있지요. 저는 내향적인 편이라 이런 방식에 크게 불편함을 느낀 적이 없었는데 최근에는 전화나 대면의 중요함도 알게 됐어요. 만나서 이야기하면 훨씬 빠르고 간단하게 풀리는 것들이 있더라고요. 여전히 배울 게 많은 부분이네요.
도서 작업 중 특히 ‘표지’는 시각적 요소가 다양하게 쓰이기에 디자이너의 개성, 의도가 뚜렷이 보이지요. 표지 작업에서 중요하게 여기는 게 있나요?
표지 작업은 할 때마다 정말 맨땅에 헤딩하는 기분이죠(웃음). 제 마음속에 있는 기준선을 넘는 게 제일 중요해요. 그래야 의뢰인한테 발신할 수 있으니까요. 그 선이 무엇인지 말로 정확하게 설명하기는 어렵지만, 아주 사소한 부분에서라도 전에 하지 않았던 ‘비틂’이 있어야 재미있다고 느끼는 것 같습니다. 작업을 진행하면서 그때그때 떠오르는 충동에 의한 판단도 중요하게 생각하고요.
그렇다면 북 디자인의 여러 과정 중 가장 흥미로운 단계는 무엇인가요?
본문 포맷을 완성하고 처음으로 조판하는 작업이 즐거워요. 제가 세운 지면 위의 질서를 전체 원고를 대상으로 처음 집행하는 작업이기 때문이에요. 해보면서 잘 안 맞는 규칙은 수정하고 필요한 규칙을 덧붙이기도 하죠. 시안에서는 안 보였던 전체적인 인상이 드러나는 순간을 아름답게 느낍니다. 가끔은 본문 포맷 디자인만 의뢰받는데 그때는 조금 아쉬워요. 제일 재밌는 작업을 다른 사람에게 양보해야 하다니!
자신에게 ‘좋은 책’이란 어떤 의미인지 정의해 주세요.
저에게 좋다고 느껴지는 글이 담기면 좋은 책이에요. 디자인까지 탁월하다면 더 좋고요. 독자로서 책을 읽을 때는 디자인을 크게 신경쓰지 않는 것 같아요. 잘 펴지기만 하면, 글자가 너무 작지만 않으면, 안쪽 여백이 너무 좁아서 글자가 먹어 들어가지만 않으면… 대체로 잘 읽거든요. 한 권의 책이 잘 완성되려면 디자인이나 편집, 번역 등에서 최소한의 기본을 지키는 성의가 중요해요. 모두가 합의할 수 있는 ‘기본’을 상상하는 게 점점 어려운 세상이지만, 그렇기 때문에야말로 나는 어느 선을 기본으로 생각하는지 스스로에게 늘 묻게 됩니다.
지금까지 자신에게 큰 영향을 준 책이나 디자이너가 있나요?
《책과 세계》와 《인문 고전 강의》를 꼽고 싶습니다. 학생 시절 이 책의 저자이신 강유원 선생이 구립 도서관 등에서 진행하는 강의를 열심히 들으러 다녔어요. 지금은 부지런히 공부를 하지 않는다는 생각에 부끄럽지만, 텍스트와 책을 대하는 제 태도에는 그때 배운 것들이 바탕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언제 죽을지, 어떻게 들려줄까》
요하나 헤드바 | 마티 | 2025
한국계 미국인이자 예술가이며 음악가, 점성술사, 논바이너리, 장애인인 요하나 헤드바Johanna Hedva 작가가 언제나 무언가가 필요한 ‘몸’에 대해, 오해되기 쉬운 장애에 대해 주체적으로 말하는 책이다. 저시력자의 접근성을 높이기 위해 한국장애인개발원에서 제작한 ‘KoddiUD 온고딕’을 본문 서체로 선택했으며, 보통의 쓰임보다 크게 적용했다고, 단락은 내어쓰기로 구분하고 글줄의 마지막 부분을 어절 단위로 끊어 시인성(모양이나 색이 눈에 쉽게 띄는 성질)도 높였다. 강렬한 노란색과 아마추어 인디진, 메탈 밴드 티셔츠가 더해진 표지에는 일부러 글자를 흐릿하게 넣거나 지면 전체에 노이즈를 깔았다. 제작 당시만 해도 인쇄소에서 “기본도 모르는 디자이너 아니냐.”며 무진장 걱정했다지만, “지저분하고 복잡하고 시끄러운 디자인”을 보여주고 싶었다는 디자이너의 코멘트처럼 목소리가 필요한 이 책에 이거야말로 알맞은 옷 아니었을까.
《왼손의 투쟁》
정한아 | 안온북스 | 2022
정한아 시인의 시산문집에는 시 외에도 다양한 장르의 글이 묶여 있다. 서로 다른 성격의 글이 모인 점과 동시에 한 권으로서 뚜렷한 콘셉트를 고민하던 디자이너는 책에서 ‘왼손’과 ‘오른손’이라는 은유가 중요하게 등장하는 것을 떠올렸다. 책을 펼치면 왼쪽과 오른쪽이라는 두 지면이 존재하는데, 디자이너가 생각하기에 ‘왼손’으로 쓰인 글은 왼쪽 페이지에, ‘오른손’으로 쓰인 글은 오른쪽 페이지에 배치한 것이다. 출판과 가까운 이들은 왼쪽 페이지를 ‘좌수’, 오른쪽 페이지를 ‘우수’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그 말 자체가 왼손, 오른손과 같은 소리니 더더욱 무릎을 탁 칠 수밖에 없었다고. (다만 출판 작업 과정에서 언젠가부터 불현듯 쓰였을 ‘은어’이기에 좌수와 우수의 ‘수’가 ‘손 수手’인지는 알 수 없다.) 지면 구조 전체를 적극적인 디자인의 대상으로 다룬 작업물로 꼽는다.
《말하는 눈》
노순택 | 한밤의빛 | 2022
구름이 매달린 하늘을 달리며 바라본 듯, 휘몰아치기 시작한 눈보라를 포착한 듯, 표지가 아름다운 이 책은 노순택 사진가의 사진론을 담은 것이다. 오롯한 사진집이나 글밥이 수북한 에세이집이라 분명히 명명하지 않고 글과 사진을 유기적으로 연결하는데 집중했다고. 그만큼 사진 배치 순서와 크기 등을 편집자와 오랜 기간 고민하며 결정했다. 본문에서 인상 깊은 점은 글의 제목처럼 언제나 상단에 등장하던 요소를 지면 하단에 배치했다는 것인데, 중요한 것을 앞이나 위에 둔다는 타이포그래피의 전통적 위계를 디자이너만의 방식으로 살짝 비틀었다. 작업 전, 원고를 가장 먼저 읽어본 디자이너는 의뢰자이자 출판사 ‘한밤의빛’에게 독자로서 우려되는 부분을 조심스레 전했는데, 그걸 들은 노순택 작가가 짚어주어 고맙다며 흔쾌히 의견을 반영해 원고를 가다듬었다는 인상 깊은 에피소드가 담긴 책이다.
《하필 책이 좋아서》
김동신, 신연선, 정세랑 | 북노마드 | 2024
‘책’을 직업으로 삼은 이들의 이야기를 작은 책으로 만들고 싶던 정세랑 작가는 좋아하는 동료 두 사람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들은 바로 신연선 작가와 김동신 디자이너. 모두 경력 10년 차에서 20년 차를 향해 가는, 출판계의 허리쯤 자리할 세 사람은 책에 대한 여전한 애정과 머뭇거림, 생각을 한데 써 내렸다. 세 사람이 모였으니 세 개의 서체, 세 개의 기호 등 ‘3’을 시각적 키워드로 의식했는데 표지 글자도 얼핏 검은색처럼 보이지만 사이언, 마젠타, 옐로 세 가지 잉크를 겹쳐 인쇄한 것이다. 언젠가 미술 시간에 수채화를 그리던 경험을 떠올려보자. 팔레트에 이 물감 저 물감 섞다 보면 단순히 까맣다고 하기 어려운 요상한 짙은 색이 나오는 것처럼, 서로 다른 직군에서 지긋이 책을 만들어온 이들이 한 권에 모였다는 재미있는 은유로도 보인다. (정작 디자이너는 자신의 글이 책으로 남는다는 게 부담스러워 만드는 과정 내내 무척 힘들었다고.)
《우리 중 그 누구도 돌아오지 못할 것이다》
샤를로트 델보 | 가망서사 | 2024
프랑스에서 레지스탕스 활동을 하다 1942년부터 4년간 아우슈비츠 강제 수용소에 수감되었던 샤를로트 델보Charlotte Delbo 작가의 회고록을 의뢰받을 당시, 출판사 ‘가망서사’ 김우진 대표는 “책이 너무 쉽게 읽히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요청했다. 한 사람의 생애에 깊은 존중을 표하는 비장한 그 말은 디자이너가 프리랜서가 된 이후 처음으로 들어본 주문이었다고. 어둠 속을 문장으로 한 걸음씩 뚫고 나아간다는 이미지를 상상하며 수용소 생활 시절은 검은 바탕에 흰 글줄로, 수용소에서 나온 이후에는 흰 바탕에 검은 글줄로 색상을 반전했다. 책등을 쥐고 옆면을 보면 종이가 흑에서 백으로 바뀌는 구성이 더욱 또렷이 보이는데, 첫 장에 쓰인 문장이 뒤이어 떠오른다. “역사는, 끝났다. 다른 사람처럼 행복하라.”
좋은 책의 기준을 묻는 질문에 그는 ‘단단함’이라 답한다. 그저 두껍고 커다란 책을 말하는 게 아니라, 전반적인 만듦새와 완결성, 나아가 제작 과정, 제작자의 의도가 조화로이 맞물리는 것을 이르는 거라고. 글자와 그림, 사진과 디자인, 매무새처럼 책을 이루는 요소들이 치밀하고 섬세하게 하나를 이루었을 때 이건하 디자이너는 주저 없이 한 권을 내보인다. 책을 만드는 행위에서 비롯된 순수한 즐거움을 만끽하는 그를 넘겨본다.
책의 모양새를 만드는 이 일을 왜 시작하게 되었어요?
종이라는 물성을 실험적으로 매만지며 책을 만드는 행위가 즐거웠어요. 책이 완성되기까지 선택의 폭이 매우 넓잖아요. 페이지 수에 따라 분량과 호흡을 펼쳐 나가는 디자인도 제각기 다를 테고, 종이 종류와 두께 선정부터 제본 방식, 인쇄, 후가공 여부까지 과정마다 어떤 방향으로 가야 할지 고민해야 해요. 그 결과가 책이라는 물리적인 형태로 구현되는 게 신기하고 기뻐서, 무수한 고민을 거듭하는 것도 즐겁게 느껴져요. 책 만드는 일이 적성에 잘 맞나 봐요.
다양한 과정 중에서 유독 흥미롭게 생각하는 작업이 궁금해요.
아무래도 디자인하는 과정 아닐까요? 모니터에서 제가 기획한 지면이 어떻게 구현될지, 어떤 방식으로 제작될지 머리에 그려 나가며 작업하는 게 재미있거든요. 단순한 공정으로 제작된 책이라도 머릿속에 떠오르던 것과 직접 손에 쥐고 펼쳐보는 책은 완전히 다른 형태로 다가와요. 제 취향을 반영한 아주 사소한 요소를 넣거나, 아무도 신경 쓰지 않을 법한 디테일을 추가하기도 합니다.
디자이너를 꿈꾸던 시절부터 지금까지 기억에 남는 책이 있다면요?
한 권이 바로 떠오르는데요. 2016년 제11회 광주비엔날레 도록입니다. 메타헤이븐이 디자인했고, 대학원 지도 교수님도 디자인과 인쇄 커뮤니케이션에 참여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처음 그 책을 봤을 때 독특한 판형에 굉장히 놀랐습니다. 조판부터 그래픽 요소, 내지 구성, 인쇄까지 그간 생각했던 통상적인 도록 편집물과 너무 달랐거든요. 그걸 보며 ‘이렇게 해도 되나?’ 싶은 건 그렇게 해도 된다는 걸 배웠습니다. 디자인과 구성이 일반적이지 않아도 강렬한 아름다움이 느껴지고 이를 설득할 근거와 역량이 있다면 다양한 방식으로 책을 만들 수 있다는 걸 그때 어렴풋이 느꼈어요.
1인 스튜디오 디자이너로서 나다운 작업을 하기 위해 어떤 마음가짐으로 임하나요?
대학원, 출판사, PaTI를 거쳐 오며 크고 작은 의뢰를 받았는데, 이후에도 계속 저를 찾아주셔서 1인 디자인 스튜디오를 운영하게 되었어요. 꾸준함과 묵묵히 버티는 마음으로 지금에 이르렀네요. 작업 과정이나 기획에서 최소한의 근거는 꼭 만들어두는 편입니다. ‘최소한’이라고 한 이유는 책을 조금 가볍게 만들고 싶어서인데요. 기획과 제작을 가볍게 여기는 게 아니라, 작업에서 촘촘하게 무장된 논리나 학술성보다는 재미와 감각에 더 치중하는 편이기 때문이에요. 모든 책을 그렇게 만들 수는 없겠지만, 가끔은 논리적인 사고보다 미감으로 해결하는 게 더욱 수월할 때가 있거든요.
그렇다면 원활한 협업과 소통을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한가요?
디자이너에겐 ‘제3자 끼어들지 않기’가 필요합니다(웃음). 디자인에서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비교적 쉬운 편인데, 서로 바라보는 방향이 다른 이와 함께 가야 하는 건 굉장한 피로감을 주거든요. 결과물도 아쉬운 편이고요. 실제로 이런 상황에 대비하려고 때에 따라 클라이언트에게 미리 당부하기도 합니다. 사공이 많다고 느낄 땐 의뢰 과정에서 정중하게 거절하기도 해요.
《아트나우》, 《월간한옥》, 《pot》 외에도 직접 발행하는 《Q.t》까지 매거진을 다양하게 작업하셨지요. 이유가 있나요?
매거진은 읽는 이와 호흡을 함께하는 데 최적화된 매체라고 생각해요. 특정한 주제 아래 출판사와 제작자의 시선이 독자에게 닿는다는 점에서 큰 매력을 느낍니다. 하나의 주제를 한 이야기로만 끝내지 않고 여러 면을 관찰하거나, 저마다 다른 꼭지 구성을 통해 전달하잖아요. 여러 지면을 한 권의 매거진으로 엮을 때 느슨하다가도 속도감이 느껴지고, 화려하거나 복잡한 구성 외에 여백을 한껏 살려 정적인 지면도 있겠죠. 이러한 구성의 흐름을 지배하고 통제하거나 조절하는 일련의 과정이 작업자에겐 아주 재미있어요.
책이라는 물성이 가진 의미가 무엇이라 생각하세요?
소유에서 소장으로 이어진다는 게 특별한 점이죠. 단순히 정보가 저장되어 있고 언제든 열람할 수 있는 장치적인 기능만 하는 매체가 아닙니다. 여러 사람의 고민과 해석, 의도를 거쳐 만들어진 지면을 직접 손으로 넘겨보며 접할 수 있는 행위를 제공해요. 그리고 이 행위를 완료했을 때 물리적으로나 정서적, 감각적으로도 비로소 내 것이 되는 경험을 하게 되고요. 구조상 필연적으로 겪어야 하는 이 모든 경험이 책이 지닌 물성을 바탕으로 비롯된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디자인뿐만 아니라 섬세하고 치밀한 물리적 구성이 분명한 책이라면 내지를 열어보지 않고 구매하기도 해요. 사실 그렇게 구매한 책이 너무 많아서 읽는 건 엄청나게 밀려 있지만요(웃음).
《Q.t》
그래픽하 | 2021-2025
‘Question to’의 줄임말인 《 Q . t 》 는 스튜디오 그래픽하에서 비정기적으로 발행하는 디자인 매거진이다. 그 시작을 더듬어 올라가 보면 PaTI가 보이는데, 날개(안상수 디자이너) 와 스승들의 도움을 받아 재미있는 일을 벌이고 싶던 친구들과 1호에 이어 2호까지 제작했다. 디자이너가 제작을 전담하기 시작한 3호부터는 매 호 한 가지 주제를 정해 PaTI 의 여러 창작자나 업계 실무자, 학생들을 모아 그곳에서 이루어지는 다양한 활동과 실험적인 시도를 기록해 나간다.
지금까지 출간된 모든 호를 모아놓고 보면 《 Q . t 》 의 특별함이 한눈에 들어온다. 바로 판형과 제본 방식, 물리적 구조까지 달라 똑같은 책이 단 하나도 없다는 것. 참여자의 이름을 아주 작게 새겨넣은 노출 제본 책등 ( 3호) , 스프링 제본에 싸개를 씌운 긴 표지 ( 4호) , 일반적인 책보다 훨씬 큰 판형 ( 5호) 외에도 신간인 7호에서는 표지 안쪽에 내지를 접착해 열어보는 구조와 렌티큘러(보는 각도에 따라 도안이 변화하는 인쇄물) 활용으로 소장하고 싶은 한 권을 완성했다. 디자인 면에서는 그때그때 떠오르는 아이디어나 손이 가는 대로 시도하는 게 중요하다고. 큰 틀은 짜여 있지만 세밀한 조판이나 페이지 구성은 감각에 따라 움직이고, 이후 조금씩 다듬어 나가며 완성한다.
《Q.t》를 살펴봤다면, 만드는 이의 알맹이도 들여다볼 차례. 디자이너가 매거진을 본격적으로 제작하고 유통하게 된 이유는 ‘내 것’을 갖기 위함이었다. 의뢰받은 책으로만 나라는 사람을 표현하는 게 아쉬웠기에, ‘이런 걸 해보고 싶다.’는 작은 욕망이 끊임없이 샘솟았다고. 스튜디오와 출간을 동시에 이끌어 가야 하니 밤낮, 새벽 구분 없이 작업에 매달릴 때도 있지만 디자이너는 잡지나 출판 분야에서 어떤 사명감과 신념을 가지고 작업을 하진 않는다고 짚는다. 특별한 이유를 붙이기보다 그저 이 일이 흥미롭고 즐겁기 때문에, 단순히 자신이 좋아하기 때문에 마음이 이끄는 쪽으로 걸음을 내딛는다.
이건희컬렉션 한국 근현대미술 특별전
〈사계〉 도록
경기도미술관 | 2023
김환기, 나혜석, 이중섭, 박수근… 한국 근현대 미술을 사로잡은 이들의 그림을 한데 모아 열린 해당 전시에서, 디자이너는 도록 외에도 아이덴티티부터 영상, 홍보물 등 전시와 관련된 모든 그래픽을 총괄했다. 때로는 작업실 책상에서 모니터를, 때로는 현장에서 공간을 아울러 보던 그는 도록 작업 시 전시 콘셉트 ‘사계’의 구성을 충실히 따랐다. 작가와 작품이 많이 알려졌다고 해서 이미지를 크게 싣거나 강조하는 것을 피하고 작가의 개성, 화풍, 실제 작품의 크기와 형태, 배치를 세심하게 고민하며 지면에 옮긴 것이다. 국립현대미술관에 기증된 이건희컬렉션 46점과 경기도미술관 및 공사립 미술 기관 열한 곳의 소장품을 모은 큰 규모의 전시였기에, 과하거나 또는 부족하지 않게 디자인의 뉘앙스를 잘 조율해 냈다.
《겨울에게》
로만 페르미코프 | 스튜디오에세이 | 2019
로만 페르미코프 사진가의 고향을 담은 의뢰받을 당시, 디자이너는 몇 가지 요청을 받았다. 중철 제본된 책이지만 책등이 존재해야 했고, 글이 들어가는 페이지는 영화 내레이션처럼 독백으로 보이길 바란다는 것. 러시아에 가본 적도, 사진가와 같은 풍경을 바라본 적도 없었기에 디자이너는 그곳을 배회하며 둘러본다면 어떤 겨울 풍경을 마주할지 상상의 나래를 펼쳤다. 디자이너의 관점을 활용하여 요청에 답하기로 한 그는 중철 책자를 덮는 싸개를 제작해 책등을 만들었고, 싸개 안에는 사진을 전면에 배치해 열자마자 겨울 풍경이 펼쳐지도록 했다. 사진의 흐름을 잠시 멈춘 자리에는 글이 놓였는데 검정 배경에 흰 글자를 넣어 어두운 공간 속 짧은 문장만이 흐르는 느낌이다.
《pot》
춘천문화재단 | 2020-2024
보통 기관에서 발행하는 매거진은 기존에 고수한 양식을 크게 벗어나지 않는 보수적인 형태를 띠지만, 이 작업은 달랐다. 클라이언트인 기관 담당자들이 ‘잡지’라는 물성과 구성에 대한 이해도가 높았기 때문에 제작에 방해되는 불필요한 요소에 시간을 낭비하지 않았다. 타 기관이나 인쇄소에서 “기관 잡지 이렇게 만들어도 되나요?”라는 질문을 종종 받기도 했다는데, 제작자와 디자이너 간의 탁월한 호흡으로 약 5년간 꾸준히 협업했고, 매번 즐겁게 임하며 친구처럼 가까운 사이가 되었다고. 긴 시간 동안 의견과 방식을 완전히 믿고 따라주는 이들과 함께했기에, 디자이너는 좋은 클라이언트를 언급할 때 항상 이 잡지에 대해 말한다. 공정에서는 기계가 꽤 많은 부분을 차지할지 몰라도, 책은 결국 사람이 만드는 것임을 다시 한번 깨닫게 된 작업이라고.
《월간한옥》
에이피씨웍스 | 2017-2018
한국 전통문화 예술과 한옥을 콘텐츠로 다루는 매거진으로 디자이너가 애정하는 첫 잡지 작업물이다. 한옥과 더불어 전통 도구와 기술, 장인에 대한 이해가 필요했던 작업이라 여러 장인의 작업실을 직접 취재하거나 제재소에 방문해 건축에 사용되는 나무를 살펴보기도 했다. 내지에서는 건축물의 이미지 배치와 흐름을 매끄럽게 연결하기 위해 노력했는데, 낯선 용어들 때문에 목수 출신인 국장님과 컴퓨터 앞에 함께 앉아 작업할 때도 있었다고. 또한 디자이너는 작은 역할이지만 건축에 참여하기도 했다는데, 한국 전통 온돌 기술자 과정을 취득 후 베를린 대학의 정자 설립에 참여하는 등 현장에서 전통 건축에 대한 이해를 넓혀가며 작업했다. 건축과 디자인, 꽤 달라 보여도 안팎으로 만듦새를 가다듬는 분야라는 공통점 아래 길을 내기 위해 힘쓴 부분이 엿보인다.
종이책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라고 굳게 믿는 사람. 함지은 디자이너에게 책은 나는 언제나 이곳에 있겠노라 고요히 속삭이는 존재다. 홍익대학교에서 회화와 시각디자인을 전공하고, 출판사 ‘열린책들’에서 디자인 팀장을 거친 그는 2025년 초 북 디자인 스튜디오 ‘상록’의 문을 열었다. 스튜디오 이름처럼 변함없이 푸른 마음으로 책을 매만지는 그에게 귀 기울여본다.
책을 만드는 세계로 어떻게 발을 들이게 되었나요?
뻔한 대답이겠지만, 늘 책을 좋아했기 때문이에요. 대학에서 회화를 전공했고 그림 그리기가 즐거웠음에도 나의 이야기를 그림으로 꺼내 놓는 일에는 큰 흥미를 느끼지 못했어요. 하지만 학교 도서관에서 아름다운 장정의 책을 만날 때마다 가슴이 뛰었습니다. 그때부터 ‘나도 책을 만들어보고 싶다.’고 생각한 것 같아요.
1인 디자인 스튜디오로 새롭게 출발한 이유가 궁금해요.
만으로 십 년 동안 에이전시와 인하우스 디자이너로 일했는데, 그 시간 동안은 ‘우선 열심히 해보자.’는 마음으로 지내왔어요. 작년 말쯤 지나온 시간을 돌아보며 자연스럽게 다음 스텝을 고민했고, 새로운 환경에서 스스로 나의 방향을 결정해 나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 독립을 결심했습니다. 전반적인 작업 프로세스는 이전과 크게 다르지 않지만, 혼자 일하다 보니 작업 속도나 리듬을 조율하는 감각이 더욱 중요해졌다고 느낍니다.
책을 디자인할 때 작품성과 상품성의 균형을 어떻게 조절하고 있나요?
전에 소속되었던 열린책들은 늘 디자이너에게 과감한 시도를 독려하는 분위기였어요. 이것저것 많이 따지고 신중하게 작업에 접근하는 제게, 다양한 실험을 해볼 수 있는 환경은 큰 행운이었습니다. 또 하나 배운 것은 책을 하나의 ‘작품’으로 대해야 한다는 태도였어요. 표지 디자인에 작품으로서 접근할 때 오히려 제품으로도 잘 작동한다는 경험을 여러 번 하면서, 균형 감각을 조금씩 익혔어요.
작년과 올해 연이어 서울국제도서전이 수여하는 ‘한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책’ 상을 받으셨어요. ‘아름다운 책’의 디자인은 어떠해야 할까요?
수상은 정말 큰 영광이었어요. 책마다 정말 정성스러운 심사평을 적어주셔서, 당시 책을 함께 만든 동료들과 몇 번이고 곱씹으며 읽어보기도 했죠. 심사위원분들이 아름다운 책을 만들기 위해 애쓴 부분을 섬세히 알아봐 주셨다는 기쁨이 앞으로 디자인을 계속해 나갈 수 있는 커다란 원동력이 되었어요. ‘아름다운 책’의 디자인을 정의하기엔 아직 부족함이 많은데요. 앞선 질문처럼 작품성과 상품성의 균형이 절묘한 것, 책이 가진 내용을 잘 담으면서도 시각적으로 완성된 것이 아닐까 합니다. 한 권 한 권을 그렇게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있어요.
나다운 작업을 하기 위해 꼭 지키는 원칙이 있나요?
그동안 디자인에 제가 드러나지 않도록 노력해왔어요. 제 손이 닿은 모든 책이 가능하면 다른 사람이 만든 것처럼 보였으면 좋다는 마음으로 작업하고 있습니다. 언제나 지키는 원칙은 ‘원고를 꼼꼼히 읽고 거기서부터 시각적인 요소들 얻기’예요. 책의 본질은 언제나 ‘내용’에 있다고 믿기 때문이죠. 독립한 후에는 이메일이나 전화 너머에 있는 사람들과 일하게 된 상황이 조금 어색하기도 했는데요. 가능하다면 작업 시작 전 대면 미팅으로 책에 관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을 꼭 가지려고 해요. 그 시간을 통해 책이 지향하는 큰 그림과 흐름을 자연스럽게 읽을 수 있거든요.
디자이너님에게 ‘좋은 책’이란 무엇인가요?
나쁜 책은 없다고 생각해요. 저는 책을 만드는 사람이지만 열심히 사고 읽는 독자이기도 해요. 그런 저만 해도 예뻐서 산 책, 내용이 재밌어서 산 책, 정보를 얻으려 산 책 등 구매 목록이 다양하답니다. 작업자로서는, 시각적으로 아름다운 책이라는 조건은 꼭 충족할 수 있도록 노력하고 있습니다.
책의 종말이 예상된 건 오래지만, 여전히 책을 애정 어린 시선으로 매만지는 이유가 있다면요?
콘텐츠들이 점점 더 자극적이고 짧아질수록, 책은 고요하고 따뜻하게 늘 그곳에 존재한다는 사실에 위안을 받는 것 같아요. 종이책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라고 믿습니다.
지금의 내가 되기까지 큰 영향을 준 디자이너도 있을 것 같아요.
영향을 받은 책과 디자인, 작업물이 너무 많아 쉽게 하나를 꼽기 어렵네요(웃음). 최근에는 미국의 그래픽 디자이너 폴 랜드Paul Rand의 작업을 다시 보며 감탄했어요. 오랜 시간이 지나도 낡지 않는 시각 언어를 만들어낸 그의 작업을 보면서, 그 이면에는 디자이너의 어떤 시선과 태도가 존재했을지 상상해 보게 되었어요. 저 역시 그런 작업을 이어가고 싶습니다.
열린책들 창립 35주년 기념
세계문학 중단편 세트
프란츠 카프카, 알베르 까뮈, 다자이 오사무 외 | 열린책들 | 2021
창립 35주년을 기념해, 열린책들에서 출간해 온 세계문학 명작 중 부담 없이 읽을 수 있는 중·단편 스무 권을 엄선한 세트다. 디자인 목표는 이미 많은 사랑을 받은 고전들을 독자들이 소장하고 싶도록 다시 매만지는 것. 이를 위해 앞표지에서 제목을 없애거나, 뒤표지에 문장만 남기는 등 과감하고 간결한 디자인을 시도했다. 각 책에 어울리는 밝고 선명한 색상을 표현하기 위해 많은 계산과 실험도 필요했다. 먼저, 책 내용에서 색을 도출했다면 다음엔 색을 실제 인쇄로 어떻게 표현할 것인지가 관건이었다고. 보통 인쇄는 ‘CMYK’라는 네 가지 색을 섞어 수많은 색을 만드는데, 이 방식으로는 표현이 어려운 색은 ‘별색’ 잉크를 사용한다. 이 프로젝트는 스무 권이 한 세트로 구성되었기에 책마다 CMYK와 별색을 어떻게 조합할지, 몇 번 나눠 찍어야 할지 등 인쇄 방식에 따라 수많은 경우의 수를 계산해야 했다.
클라리시 리스펙토르 시리즈
클라리시 리스펙토르 | 을유문화사 | 2025
클라리시 리스펙토르 시리즈의 2025년판 리커버 에디션. ‘2025 서울국제도서전’에서 선보이기 위해 을유문화사와 협업하여 제작했다. 디자이너는 작가의 강렬한 작품 세계가 돋보이며, 그녀를 사랑하는 팬들에게 소장가치 있는 책을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고. 세 권을 함께 두었을 때의 밸런스도 중요했단다. 작가의 매력적인 사진 수십 장을 들여다보고, 신나게 만든 시안 여러 개가 모두 마음에 들었던 일을 비롯해 작업하는 모든 과정이 즐거웠다는 후문까지. 출판사에서 최종 선택되지 않은 시안을 양장 노트로 만들어 보자고 제안해, 테두리에 은장을 더한 노트 3종이 추가로 제작되었다. 노트를 펼치면 책 속 구절이 수록되어 있으며, 이후 자유롭게 쓸 수 있는 빈 페이지가 이어진다. 역시 도서전에서 을유문화사의 굿즈로 소개되었다.
열린책들 세계문학 모노 에디션
레프 톨스토이, 헤르만 헤세, 표도르 도스토예프스키 외 | 열린책들 | 2024
《안나 카레니나》, 《데미안》, 《카라마조프 씨네 형제들》 등 꾸준한 사랑을 받은 세계문학 고전을 엮은 세트. ‘모노 에디션’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모두 덜어낸다’는 콘셉트로 제작되었다. 일반적으로 앞표지는 사진과 그래픽 등 이미지 요소가 들어간다. 하지만 이 세트는 색이나 후가공 같은 어떤 요소도 사용하지 않고 제목과 저자 이름, 원제를 담은 글자로만 디자인했다. 뒤표지에는 각 작품을 상징하는 이미지가 자리한다. 모두 질감이 제각기였던 자유 이용 저작물인데 동일한 결로 보이도록 여러 번 가공했다. 디자이너는 이 작업으로 “단순함이 깊이를 잃지 않으려면, 오히려 디테일이 더 중요하다는 걸” 배울 수 있었다고. 무심한 듯 날카로운 디자인 뒤에는 “집요하게 획을 다듬고 조정하고 파고들어 만든” 노력이 숨어 있었다.
《2666》
로베르트 볼라뇨 | 열린책들 | 2023
작가 20주기를 맞아 다섯 권으로 구성되었던 소설 시리즈가 한 권으로 묶였다. 열린책들에서 제작했던 작품으로 편집자, 마케터와 ‘문학 분야에서는 볼 수 없는 크고 압도되는 장정을 만들자.’는 목표를 공유하고 작업을 시작했다. 그 결과 가로 20, 세로 28센티미터의 거대한 판형의 도서가 양장 제본으로 완성되었다. 디자이너가 컴퓨터 툴을 활용하는 대신 수작업으로 그린 드로잉을 가죽 질감이 느껴지는 표지 위에 인쇄했으며, 테두리는 후가공으로 은색을 입혀 빛나게 만들었다. 서울국제도서전이 수여하는 ‘2024 한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책’으로 선정되는 영예까지 얻은 작품. 출간 이후 과감하고 충격적인 디자인이라는 반응을 얻었지만, 정작 디자이너는 “소설이 주는 압도감을 디자인에 다 담지 못했다고 평할 정도로 이 책은 멋진 이야기로 가득 차 있다”고 전했다.
에디터 이명주, 차의진
포토그래퍼 박은비 자료 제공 김동신, 이건하, 함지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