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없이 흘러 가닿는 사랑

김지안 — 그림책 작가

통통한 알뿌리를 흙에 심은 멧밭쥐들은 부지런히 움직여 새싹을 줄기로, 꽃망울로 키워낸다. 이윽고 활짝 핀 튤립 송이가 동물 친구들의 아늑한 호텔이 된다는 이야기는 그림책 작가 김지안이 쓰고 그린 《튤립 호텔》의 일부다. 일상을 어떤 시선으로 매만지길래 이렇게나 사랑스러운 상상이 탄생했을지 둘러보니, 집 한가득 그녀만의 비밀 정원이 자라고 있다. 낙차가 크지 않은 태도로 성실하게 보듬는 정원에는 말없이도 사랑이 흐른다.

비밀 정원에 초대받은 기분이에요. 거실과 베란다가 온통 푸르러서요. 

그런가요? 그래도 지금은 이전보다 식물이 줄어든 편이에요. 무더운 여름은 꽃이 만개하는 때가 아니니까요. 한 이백 개 정도 되려나요? 

 

일반 아파트에서 이렇게 많은 식물을 키울 수 있는지 몰랐어요. 

 

여기서 지낸 지는 5년쯤 됐어요. 이사 오기 전에 테스트를 해보고 싶어서 난생처음 튤립 스무 송이를 키워봤죠. 생각보다 재미있고 베란다에서도 잘 자라더라고요. 이곳에 와서는 매년 백오십 송이에서 이백 송이 정도 키워요. 이외에도 하나둘 들이다 보니 이런 모습이 되었네요. 베란다에 나가 보면 전구가 모두 식물등이에요. 그 빛으로 광합성이 가능하거든요. 

 

주변에서 많이들 물어봤을 것 같아요. 집 안에 작은 정원을 만들게 된 계기가 뭐예요? 

어쩌면 타샤 튜더의 책 한 권에서 시작된 것 같아요. 타샤 튜더는 30만 평의 거대한 정원을 거느린 정원사이자 그림책 작가예요. 사랑스럽고 못 말리는 괴짜이기도 한데 19세기의 삶을 꿈꾸며 그 시대의 생활 방식을 평생 따랐다고 해요. 그 말은 전기도 안 들어오는 집에서 양초를 만들어 불을 밝히고, 땔감을 넣은 화덕에 빵을 굽는다는 말이죠. 그보다 놀라운 게 그녀의 정원이에요. 자연주의적 정원을 지향하기 때문에 온갖 풀과 나무, 꽃이 자연의 일부처럼 생기가 넘쳐요. 아름답고 대단하죠. 세상에는 이렇게 사는 사람도 있구나 하고 정말 놀랐어요. 

 

그녀의 가치관과 삶을 닮아가고 싶었던 거예요? 

그랬다면 이미 저는 살아남지 못했을 것 같아요(웃음). 뼛속까지 현대인에 병약한 도시인이거든요. 서울에서 나고 자란 데다가 시골에 사는 친척도 없으니, 전원의 생활을 몰랐고 그냥 판타지 같았죠. 무턱대고 그녀를 따라 하고 싶은 마음보다는 새로운 라이프 스타일을 보고 깊은 감명을 받은 것에 가까워요. 식물과 가까이 살 방법이 없을까를 고민하다가 이런 방식으로 풀어나가게 됐어요. 사실 식물을 키우는 데 재능도 조금 있는 것 같았고요.

식물 ‘금손’인가 봐요! 재능이 있다는 생각은 어떻게 하게 됐어요? 

식물과 물의 관계라고 할까요? 그걸 빠르게 눈치채는 것 같아요. 잎의 크기나 두께에 따라 필요한 물의 양이 다르다는 것도 어느 정도는 느낌으로 파악했고요. 

 

래도 튤립은 까다로운 식물 중 하나라고 들었어요. 

식물 초보일 때는 검색도 많이 했어요. 튤립은 알뿌리를 가을에 심는데, 싹이 올라오는 틈으로 물이 들어가면 쉽게 썩어버려 물을 얌전히 줘야 해요. 그런 관리 방법을 잘 따랐더니 백 퍼센트, 모든 송이가 꽃을 피우더라고요. 그때부터 자신감이 붙어서 구근 개수를 확 늘려서 키우기 시작한 거예요. 꽃은 아름다움을 즐기기 위해서 키우는 거라고 생각하는데 그 바람이 충족됐죠. 튤립은 9월 말에서 10월쯤이면 구근을 예약 구매할 수 있어요. 매해 새로운 품종도 나오니까 식물 쇼핑이 무척 즐거워요. 

 

지금은 튤립이 피는 계절이 아니잖아요. 이외에는 어떤 식물을 키우고 있어요? 

초화류는 온실에서 키운다는 느낌으로 베란다에 두었고, 실내에 있는 건 열대 식물이에요. 처음에는 식물 리스트를 만들어두고 영양제를 주었는지 체크하곤 했어요. 좀더 학구적으로 다가간 거죠. 지금은 대략적인 식물 생장 주기에 맞춰서 넓게 살펴보고 돌보는 편이에요. 

 

돌봄이 익숙해진 덕분도 있겠어요. 초록 친구들을 전부 살펴보려면 하루가 바쁘죠? 

그럼요. 잠이 없는 편이라 아침 5-6시쯤 일어나는데 물부터 줘요. 여름이다 보니 해가 뜨기 전이나 약할 시간을 놓치면 베란다가 30도까지 올라가 버리거든요. 그래서 한낮에 물을 주면 뿌리가 삶아진다고 표현해요. 아침에 바빴다면 적어도 10시 안으로는 끝내야 해요. 예전에는 흙을 직접 만져봐야 했다면 이제는 눈으로만 보고도 물이 필요한지 알 수 있어요. 또 때맞춰 비료 주고 충해 관리하고, 해 질 무렵 마른 화분이 있나 한 번 더 확인해요. 이젠 거의 습관이 돼서 바쁘다는 느낌보다는 평온한 일상에 가까워요. 

 

모두에게 동일한 관심을 주는 것만큼 어려운 일이 없는데 다들 튼튼하게 잘 자랐네요. 가장 오래 키운 건 뭐예요? 

대부분 2년은 넘었고요. 냉장고 위에 둔 스킨답서스는 8년을 함께 보냈네요. 처음에는 조막만 했는데 순하게 잘 자라서 지금은 머리가 저렇게 길었어요. 너무 길어서 줄기를 잘랐다가 버리기가 아쉬워 물에 조금 담가두었더니 뿌리가 내려오더라고요. 엄마 스킨답서스와 아이들이 무척 많아져 버렸어요(웃음). 아, 혹시…. 

 

네? 

관심 있으시면 하나 드릴까요? 집에 오는 분들께 여쭤보긴 하는데, 거절하는 경우가 많아서(웃음)

 

어머, 저는 너무 좋은데요. 조금 두근거려요(웃음). 그런데 왜 나눠 주고 싶은 거예요? 

어쨌든 살아 있잖아요. 어떤 상황에서든 뿌리가 내려오면 기특하기도 하고 멋지다는 마음이 들어요. 그걸 흙에 옮겨 담아 또 키우게 되고요. 그러다 보니 너무 많아지기도 해서, 입양처를 적극적으로 물색하게 되죠(웃음). 저한테 좋은 걸 남에게 주고 싶은 마음도 있고요. 

 

유독 키우기 어려웠던 식물도 떠오를 것 같아요. 

장미가 그랬어요. 데이비드 오스틴David Austin사에서 육종하고 판매하는 일명 ʻ영국장미’를 키웠는데요. 화형이 아름답고 향기롭기까지 했어요. 정말이지, 꽃의 여왕이라는 별칭이 잘 어울렸죠. 야심 차게 열 두 종류의 장미를 키웠는데, 결론부터 말하자면 베란다에서 키우기엔 무리였어요. 비료도 많이 필요하고 분갈이도 해마다 한두 번을 해주어야 했어요. 화분 지름이 30센티미터가 넘었으니 흙이 꽤 많이 필요하고, 벌레가 잘 생겨서 약도 자주 뿌려줘야 했고요. 이 모든 일을 제대로 해낸다 해도 비좁고 햇살이 강하지 않은 베란다에서 장미를 건강하게 키우는 건 불가능하더라고요. 너무나 아름답고 향기로운 꽃이지만 동시에 저의 일상이 황폐해졌어요. 장미는 노지에서 자라는 게 가장 좋다는 걸 배웠죠.

속상하지만 한편으로는 배움이 되기도 했네요. 남편분도 식물과 친근한 사이인가요? 

가꾸는 데는 전혀 취미가 없어요. 처음엔 걸어 다닐 때마다 다리에 부딪힌다고 싫어하기까지 했어요(웃음). 그래도 이제는 베란다에서 식물 구경하며 커피 마시고, 친구들 오면 은근슬쩍 자랑도 해요. 괜스레 “여기는 공기가 더 좋은 것 같아.” 하고요. 제가 얼마 전부터 정원 수업을 받기 시작했는데, 마당을 꾸리고 싶다고 성화를 부리니 못 이기는 척 끄덕여 주더라고요. 

 

정원 수업은 무얼 배우는 거예요? 재미있을 것 같아요. 

정말 재미있어요. 3년 안에는 땅을 사서 본격적으로 정원을 가꿔보고 싶다는 막연한 목표가 있었거든요. 시작은 3,000평을 꿈꾸다가 현실적인 조건을 고려해서 300평으로 줄이고, 결과적으로는 70평을 얻게 됐어요. 거기다가 집도 지을 테니 아마 작은 앞마당 정도가 남겠죠(웃음)? 그렇다 하더라도 실내와 정원은 생장 환경의 차이가 크니까 배움이 필요했어요. 유명한 정원 선생님 한 분이 5,800평의 정원을 가꾸고 계세요. 선생님께 정원가를 꿈꾸는 분들과 이론도 배우고 실습도 하고, 천연 비료나 농약을 만들어 보고 관수 시스템도 구성해요. 그 선생님이 세 발 오토바이 뒤에 흙 포대 싣고 멋있게 달리시거든요. 그렇게 되면 좋겠어요. 

 

상상만 해도 멋있네요(웃음). 가드닝을 할 때는 주로 어떤 생각이 드는지 궁금해져요. 

생각보다 운명적이거나 낭만적으로 하진 않아요. 오히려 현실적이고 담담하게 대하는 것 같아요. 물 주는 것도 알록달록 물뿌리개로 ʻ예쁘게 살살~’ 이런 느낌보다는 기술적으로 빠르게 처리하죠. 주어진 업무처럼 생각하면서 원하는 만큼, 필요한 만큼 해결해요. 그렇기 때문에 식물이 잘 자라거나 또는 시들거릴 때 평정심을 유지하기 위해 애쓰고요. 너무 좋아하거나 너무 울적해질 필요도 없어요. 

 

그 시간 속에서 마음을 보듬기도 해요? 

그럼요. 정원을 즐기는 건 가꾸는 것과 또 다른 영역이니까요. 제가 한때 다리를 다친 적이 있어요. 3주 정도 바깥 생활 대신 집에서만 절뚝이면서 걷다 보니까 물만 겨우 주고 식물을 제대로 보살피지 못했어요. 마음대로 되는 게 없으니 답답하고 속상하더라고요. 하루는 잠이 안 와서 새벽에 베란다에 앉아 있었는데, 식물들이 물만 줬는데도 대견하게 버티고 있는 거예요. 내재한 생명력이 느껴졌달까. 한마디 오가는 말없이도 식물한테서 위로받았던 기억이 나요. 

 

유난스럽지 않고 묵묵하게, 자연스레 살아가는 모습이 위로가 되기도 하니까요. 

영화 <달콤한 인생>(2005)에 보면 오프닝에 이런 대화가 나와요. “스님. 저것은 바람이 흔들리는 것입니까, 나뭇가지가 흔들리는 것입니까?” 그랬더니 큰스님께서 “바람도, 나뭇잎도 아니고 네 마음이 흔들리는 것이다.”라고 답해요. 집에 바람이 불면 잎사귀들이 부딪혀서 사그락사그락 소리가 들리는데요. 사실 자연은 별말이 없어요. 우리 마음이 어떠냐에 따라서 그들의 모습이 여러 가지 의미로 와닿는 것 같아요. 

 

무언가를 좋아하면 닮고 싶은 점이 생기기도 하잖아요. 작가님도 그런가요? 

부러운 게 있어요. 일희일비하지 않는 것. 제가 감정의 진폭이 과격한 타입은 아니지만 마음 조절은 인간에게 주어진 평생의 숙제 같아요. 가끔은 자기 자신을 괴롭히게 되잖아요. 그런데 식물들은 잘 모르겠어요. 바라보기엔 평온하고 덤덤한 것 같아서 그런 점은 부럽고, 닮고 싶더라고요. 

 

그렇다면 혹시… 식물에게 말을 걸기도 해요(웃음)? 

아유, 물론이죠(웃음). 우리가 강아지나 고양이 보면 혀 짧은 소리로 “아이고~” 이런 말들 하잖아요. 저도 꽃이 피면 “아이고 대단해! 웬일이야, 기특하고 예쁘다!” 이렇게 혼잣말해요. 질문을 듣고 생각해 보니 주로 칭찬의 말이네요.

좋아한다는 감정은 참 특별한 것 같아요. 낯선 것도 대뜸 해보게 만들고 더 많이 알고 싶어지게 하니까요. 작가님은 좋아한다는 말의 의미가 무엇이라고 생각해요? 

다층적인 의미를 가진 단어라고 생각해요. 레이어를 귀찮아도 일일이 하나하나 뜯어보면 기대가 있고 희망이 있고, 호기심도 한 스푼 있는 것 같아요. 감동도 있고요. 식물을 키우는 게 무언가를 얻기 위해서 한 일이 아닌데도, 기쁨이나 행복 같은 복합적인 감정이 느껴져요. 물성이 있는 존재다 보니 감각적으로 만족하는 것도 크고요. 반려동물의 털 느낌이나 체온이 다 다른 것처럼, 식물도 잎사귀마다 질감이 다르고 향기도 다르거든요. 그걸 체감할 때 내가 식물을 정말 좋아하는구나 느껴요. 이렇게 다양한 층이 존재하지만, 짚어내는 게 어려우니 좋아한다는 한 단어로 표현하는 거 아닐까요? 

 

진득하게 좋아해 본 사람만이 알 수 있는 거네요. 그림책 《튤립 호텔》을 보면, 작가님이 좋아하는 것들이 등장해요. 어떻게 구상하게 된 이야기예요? 

저는 이야기를 만들 때 카드를 모은다는 개념으로 표현하는데요. 소재나 상상 조각을 두루뭉술하게 가지고 있으면 금세 휘발되어 버려요. 그래서 일상에서 모은 생각을 머릿속에 정리해 두어요. 튤립을 키우면서 알게 된 과정과 생장, 그 경험에서 우러난 여러 감정까지 일종의 소재가 되어서 카드라는 형식으로 저장되는 거죠. 그러다 우연히 사진작가 마일스 허버트Miles Herbert가 꽃송이 안에 숨어 있는 멧밭쥐를 찍은 사진을 보고 ʻ아, 이거다!’ 싶었어요. 이 작은 존재를 주인공으로 그림책을 그려보고 싶다는 강한 열망을 느꼈죠. 

 

보통은 꽃이 지는 일을 서럽고 슬프게 생각하잖아요. 《튤립 호텔》에서는 꽃이 지면 열심히 일한 멧밭쥐들이 신나게 휴가를 떠나요. 

꽃이 지는 일은 정말로 슬픈 게 아니거든요. 내년에 또다시 심을 거고, 하나의 꽃이 지면 또 다른 꽃이 피기도 하고요. 우리가 좋다고 느끼는 순간은 영원하지 않잖아요. 친구들하고 만나서 즐겁게 놀았다고 하더라도 그걸 매일 한다면 여전히 재밌을까요? 오히려 지겨워질지도 몰라요. 어느 한순간이 영원하기보다 스위치가 끄고 켜지듯 바뀌는 게 좋다고 생각해요. 무엇이든 영원하다면 그 특별함을 알지 못할 거예요. 

 

이 책은 작가님에게 어떤 의미인가요? 

《튤립 호텔》은 다리를 다쳤을 때 완성한 책이에요. 원래 운전을 소재로 한 《달리다 보면》을 준비 중이었는데, 사고가 난 터라 마음이 아파서 그릴 수가 없더라고요. 출판사에 양해를 구하고 다른 작업을 먼저 하게 된 거죠. 마음이 울적하니까 꽃과 식물을 그리는 것만으로도 큰 치유가 되었어요. 그림책 작업은 물론 좋아하는 일이지만 어디까지나 ʻ일’의 영역이라 여겼는데, 오히려 나를 돌봐주고 있다는 생각이 처음으로 들었어요. 요즘은 그림책을 아이들뿐 아니라 성인도 감상하잖아요. 어쩌면 그분들도 그림책이 나를 어루만지거나 돌봐준다는 느낌을 받으신 걸지도 모르겠어요. 

 

그림에 이야기를 더하고 식물과 함께하는 일상은 앞으로도 여전하겠죠? 

그럼요. 작업을 하다가도 해 질 녘에 물을 주고, 가을이 되면 구근을 심고, 때에 맞춰 비료를 주면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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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디터 이명주

포토그래퍼 김혜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