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AROUND
CLUB ONLY
SERIES
MEET AROUND
SUBSCRIBE
SHOP
슬로베니아에서 보내는 열두 장의 편지
말로 없는 말로와의 여행
슬로베니아에서 보내는 열두 장의 편지
내게는 말로라는 오랜 친구가 있다. 그녀는 나의 좋은 친구이자 스승이며, 이해심 많은 여행 메이트였다. 우리는 오랜 시간 함께 여행하며 웃고, 떠들고, 침을 튀기며 욕하고, 서로에게 자전거를 던지고, 코 파는 모습, 잠꼬대, 확신에 찬 표정, 바보 같지만 응원해주고 싶은 꿈 같은 것들을 공유했다. 하지만 여행은 끝났고, 우리는 서로를 떠나 각자의 자리로 돌아갔다. 이제 나는 말로가 없는 곳을 여행한다. 함께하기로 약속했으나 결국엔 다다르지 못했던 그곳에서 나는 말로에게 보내는 마지막 편지를 쓴다.
슬로베니아 관광청
H. slovenia.info
터키항공 한국사무소
H. p.turkishairlines.com
구름과 우주 사이에서
“자, 여기 너를 위한 메뉴야. 전채 요리와 수프, 메인 메뉴, 그리고 디저트를 고르면 돼. 코냑? 물론이지.” 커다란 주방장 모자를 쓴 터키 요리사가 말했다. 이곳은 땅에서 10,000미터 정도 떨어진 곳으로, 나는 지금 구름과 우주 사이를 날고 있다. 기내에서 정찬을 대접받았고, 눈이 깊은 승무원이 나를 위한 이부자리를 깔아주었다. 전생에 어떤 착한 일을 했기에 이런 대접을 받을까. 말로야, 고백하건대 우리는 그동안 참 힘든 여행을 했던 것 같다. 40리터짜리 배낭에 1년 치 짐을 쑤셔 넣고, 단돈 1달러를 아끼기 위해 몇 시간이고 걸어 다녔지. 그러면서 입버릇처럼 말하기를, “무릇 여행이란 바닥을 비비며 다니는 거지.”라며, 고행만이 진짜 여행이라고 굳게 믿던 날들. 하지만 때로는 이런 호사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창밖으로 저녁이 오면 구름과 구름 사이 희미한 점 하나, 하염없이 한곳만 바라보고 있다.
예수의 얼굴과 알라의 말
말로야 기억하니? 우리가 함께한 여행 내내 지겹도록 노래를 부르던 곳, 아시아와 유럽을 잇는 톨게이트이며, 우리를 형제라고 부르는 나라, 부루마불 게임에서 단골로 걸리던 개미지옥 같은 도시, 여기는 이스탄불이다. 이곳에 멈춘 이유는 하나, 바로 무료 시티투어 때문인데 ‘무료’라는 말에 흥분했을 네 표정이 상상된다. 투어는 오전 8시 30분부터 밤 9시까지, 다섯 개의 시간대로 나눠져 다음 비행 일정에 맞춰 유동적으로 신청할 수 있다(물론 그 안에는 교통비나 식사도 포함돼 있으니 주머니 걱정은 안 해도 되겠다). 내가 속한 투어는 이스탄불 여행의 핵심이라는 술탄 아흐메드 모스크와 아야소피아 박물관을 두루 도는 여행이었다. 비잔틴 미술의 최고 걸작이라는 아야소피아 박물관은 처음 그리스도교의 성당으로 지어졌다가 오스만의 지배 때에는 이슬람 사원으로 사용됐다고 한다. 예수의 얼굴 옆에 새겨진 알라의 신탁이라니. 서로 다른 두 개의 종교가 한곳에 머무는 풍경이 어쩐지 낯설게 느껴진다. 하지만 조화로움과 이질감, 어느 쪽으로도 기울지 않는 나란한 감정을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으면, 동서양의 문화가 혼재된 터키의 정체성을 조금이나마 이해할 것도 같다.
일곱 시간 후의 류블랴나
저녁 무렵, 이스탄불을 거쳐 슬로베니아 류블랴나 공항Ljubljana Jože Pučnik Airport에 도착했다. 아마도 서울은 자정을 넘긴 시간이겠지. 서울과 류블랴나의 시차는 일곱 시간이다. 그러니까 이곳 사람들은 일곱 시간 늦게 일어나 일곱 시간 늦게 밥을 먹고 일곱 시간 늦게 사랑한다. 느려서 좋은 점이 뭐냐면 일곱 시간 느리게 살아도 된다는 것. 그런 엉뚱한 생각만 자꾸 떠오른다. 짐을 챙기고 환전소 직원에게 인사말을 물었다. ‘스트라워Zdravo(안녕하세요)’와 ‘흐할라Hvala(고맙습니다)’. 사실 영어만으로도 충분히 대화가 될 테지만, 고맙다는 말을 더 고맙게 표현하기 위해 몇 번이고 발음을 고쳐 말했다. 특히 ‘흐발라’와 ‘크할라’ 사이에서 한참을 헤맨 끝에 겨우 제대로 된 발음을 찾았다고 생각했는데, 환전소 직원은 포기했다는 듯 고개를 젓는다. 도대체 뭐가 잘못된 걸까.
사랑에 관한 상투적인 농담들
슬로베니아 출신 가이드 알레시는 덩치가 크고 배가 조금 나온 중년의 남자로 코를 자주 훌쩍거렸다. 대개의 유럽 사람들이 그렇듯 그 역시 인접한 나라의 언어를 조금씩 할 줄 알았는데, 특히 영어를 말할 때 쉬운 단어만 골라 사용했다. 류블랴나 시내를 돌아다니며 나는 성실한 고등학생으로 돌아가 알레시의 뒤를 따랐다. 2차 세계대전 이후 주인 없는 건물들이 그대로 방치되어 허물어져가는 이야기, 흑사병이 물러간 뒤 살아남은 사람들이 광장에 모여 교회를 세웠다는 이야기(아름다움에 담긴 숙연한 기억들), 사랑을 이루지 못하고 동상이 되어버린 어느 시인의 이야기(그의 시는 훗날 슬로베니아의 국가가 됐다), 건물과 골목마다 오래된 이야기들이 쏟아져 나왔고, 많은 사람들이 그곳에서 각자의 방식으로 과거를 향유했다. 프레셰렌 광장Prešernov Trg에서 만난 은퇴한 노병 클라우스 씨는 고향 함부르크에서 류블랴나까지 어떤 경로로 여행해왔는지를 단 1초도 쉬지 않고 이야기했다. 그는 이곳에서 영원한 사랑을 찾아 돌아가겠노라고 덧붙였는데, 슬로베니아(S‘love’nia)의 철자에서 러브를 강조한 노인의 뻔한 말장난이 나는 이상하게도 낭만적으로 보인다.
중세의 어떤 오후
여왕의 미움을 산 남작, 난공불락의 요새, 물에 독을 풀어 암살을 꾀했다는 이야기, 비밀통로, 함정, 배신과 모략, 몇 세기째 이어 내려온 가업, 무쇠를 때리던 대장장이의 후손, 와인 병을 칼로 베어 마시던 기사들. 중세의 어느 성에서 사람들은 작은 병정처럼 줄지어 서있고, 나는 새가 날아가길 기다리며 한참을 가만히 앉아있었다.
아몬드 빼빼로 행성
글을 쓰고 사진을 찍으며 때때로 나는 심각한 오류에 빠지곤 한다. 눈앞의 풍경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내가 가진 작은 언어로만 해석하려는 버릇 같은 것. 1817년, 포스토이나 동굴Postojnska Jama을 처음 발견할 당시 지하 100미터의 축축한 어둠 속을 헤매던 탐험가들은 이곳을 지옥의 한 단면이나 전설 속의 용이 사는 곳으로 묘사했다고 한다. 그건 비단 과거 사람들의 상상에만 그치지 않고 나와 투어를 함께 했던 여행자들도 마찬가지였는데, 사람들은 기이하게 녹아내린 종유석을 보며 버섯이나 해파리, 키스하는 연인, 닭 벼슬 같은 것들을 이야기했다(나는 몇 개의 아몬드 빼빼로를 찾아냈다). 자신만의 테두리가 아니었다면 웅장하고 그로테스크한, 우주의 이름 모를 행성을 감히 설명할 수 없을 거란 생각이 든다. 말로야, 훗날 네가 이곳을 여행한다면 내가 찾지 못한 무언가를 발견해주길 바란다. ‘올름Olm’은 이곳 슬로베니아와 크로아티아의 동굴에서만 발견되는 양서류로, 어둡고 축축한 곳에 살며 눈을 잃었다. 동굴로 비유되는 깊고 어두운 곳에서 우리는 곧잘 장님이 되곤 하는데(이를테면 사랑 같은 것들), 어쩌면 네가 찾는 것이 여기에 있지는 않을까?
타인의 소원
“저는 여행할 때마다 항상 같은 소원을 빌어요.” 신께 어떤 소원을 빌었느냐는 내 질문에 그녀는 순순히 대답했다. 어머니가 암 치료를 받고 있는데, 다시 예전처럼 돌아왔으면 한다는 것. 슬로베니아 북서쪽 블레드 호수Blejsko Jezero에는 나룻배로만 들어갈 수 있는 작은 섬이 있고, 소원을 이뤄준다는 전설의 종이 있다. 다만 소원을 이루기 위해서는 세 가지 조건이 필요한데, ‘현실적일 것, 긍정적일 것, 절대로 남에게 이야기하지 말아야 할 것’이 바로 그것이다. 그런데 순진한 그녀가 내 장난 같은 질문에 덜컥 대답을 해버린 거였다. 절대 말하면 안 된다고 했는데…. 어쩐지 미안한 마음이 들어 내 차례가 되었을 때 그녀의 소원을 몰래 다시 빌어주었다. 실은 ‘연봉이 엄청 오르게 해주세요.’ 같은 지극히 타당한 소원을 빌려고 했는데.
버텨서 아름다운 것들
블레드 호수에서 북서쪽으로 차를 몰면 슬로베니아 유일의 트리글라브 국립공원Triglavski Narodni Park에 들어서게 된다. 그 안에는 두 개의 빙하호수와 산맥이 있고, 카스트르 고원과 분지, 풀을 뜯는 소와 목동이 있다. 보히니 호수Bohinjsko Jezero에서 배를 타고 가만히 창밖을 보고 있으면 ‘아름답다’라는 진부한 표현이 절로 떠오른다. 하지만 조금 더 가까이에서 들여다보면 나무와 언덕, 돌과 물, 그러니까 우리가 둔하다고 여기는 자연의 몸에는 사실 아주 오랜 시간 동안 바람의 상처가 새겨져 있다. 찢기고, 부러지고, 죽은 나무 위에 새로운 것이 자라는 풍경. 어쩌면 자연은 버티고 버텨서 아름다워지는 것은 아닐까. 알레시는 슬로베니아 사람들이 다소 투박하고 부끄러움을 타는 성격이긴 하지만 자연 앞에서는 한없이 세심한 사람들이라고 힘줘 말했다. 그 말을 듣자 이곳에 조금 더 오래 머물고 싶어진다.
식물과 노인과 고양이가 있는 마을
마을을 산책하고 싶다는 내 말에 알레시는 잠시 생각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네가 좋아할 만한 것을 보여줄게.” 알레시의 안내로 국립공원 안의 작은 마을에 들렀다. 인적이 거의 없고 멀리 아무렇게나 풀어둔 소와 염소, 지붕 높은 교회가 보이는 곳이었다. “너도 눈치챘겠지만 이곳 사람들에게는 임업과 낙농업이 아주 중요해.” 나무와 가축을 키우는 것, 그건 곧 계절의 삶을 산다는 의미였다. 하루하루 조금씩 변하는 온도에 맞춰 끊임없이 무언가를 궁리하는 삶은 어떨까? 나는 알지 못한다. “아주 심심한 것 같지만 그들에게도 나름의 유희가 있어. 소와 양, 염소를 먹이고, 그 계절이 지나면 낮은 곳으로 내려와 축제를 즐기는 거지. 벌을 치며 벌통에 그림을 그리고, 전통 방식의 노래와 춤을 즐기는 거야.” 알레시가 허락한 잠깐의 시간 동안 나는 분주히 마을을 걸었다. 최대한 많은 걸 담고 싶었는데, 문득 담장 너머 텃밭을 가꾸는 노인과 눈을 마주친 후로는 더 이상 빠르게 걷지 않았다. 말로 너도 알겠지만, 가지런히 세워둔 화분, 노인의 손, 검은색 고양이의 하품이 있는 풍경 앞에서는 함부로 서두를 수 없다.
다시는 만나지 못할, 아주 우연한
일행 중 누군가 “우리 모두 각자의 여행이 있네요.” 하고 말했다. 둘러보니 누군가는 지금 이 순간을 즐기며 아주 기쁜 표정으로 거리를 뛰어다니고, 누군가는 뷰파인더 속에서 가장 아름다운 순간을 박제하려 했으며, 또 누군가는 말없이 뒤에서 모두를 관조하고 있다. 나는 이 여행에서 무엇을 보고자 했을까. 말로야, 우리는 우연이라는 말을 참 좋아했었지. 우연히 만난 노인의 친절, 우연히 먹은 음식의 황홀함, 타야 할 버스를 놓치고 망연자실한 채 우연히 들어간 골목에서 주운 1달러짜리 지폐, 길에서 마주한 낯섦과 모든 우연한 만남. 한국에 돌아와 내가 인화한 사진 중에는 나도 모르는 사이에 찍힌 우연한 얼굴들이 많다. 그때 그 자리에 다시 돌아가도 만나지 못할 아주 우연한 사람들. 슬로베니아의 얼굴들.
여행자의 저녁
성당이 있는 언덕에 올라 타르티니Tartini 광장을 본다. 사람들은 작은 점으로 움직이고, 돌담 위의 청년은 아드리아해 너머 자신의 고향 이탈리아를 바라보는 듯하다. 한 여인은 석양으로 얼굴을 물들인 채 수심에 찬 얼굴을 하고 있다. 누렁개 한 마리가 심드렁한 표정으로 돌바닥에 누워 꼬리를 탁, 친다. 종탑 위의 천사 미카엘은 청동으로 몸을 물들이고, 멀리 소득 없이 돌아온 낚시꾼들의 바구니는 가볍다. 피란Piran이라는 작은 어촌 마을에서 맞는 저녁은 어쩐지 서글프다. 그렇게 슬로베니아에서의 시간도 함께 저물어간다.
유령의 순간
류블랴나 밤거리에서 만난 백발의 노인, 그는 어제의 사람이다. 왼쪽은 붉고 오른쪽은 푸른, 안개로 지워지던 밤. 문득 이 여행이 비현실처럼 느껴진다. 빛으로 산란하는 사람들의 마지막 만찬. 상처 난 창문에 비친 청년의 고뇌. 터널 저쪽에서 이쪽으로 손을 잡고 함께 걸어온 두 사람. 테두리 없는 밤의 형상처럼 여행 중 불쑥불쑥 유령의 순간이 오곤 했다.
말로에게 건네는
여섯 개의 조언
류블랴나 시장
류블랴나 구시가지 재래시장에 들를 것. 신선한 채소와 기념품, 먹거리가 있으며 꽃을 파는 가판도 있다. 네가 좋아할지는 모르겠지만 트러플 오일이나, 꿀, 드래곤 모양의 마그넷도 살 수 있다. 매주 금요일에 열리는 마켓에서 음식을 사 먹으며 야경을 즐길 것을 추천한다.
블레드 열기구
말로, 네가 그토록 원했던 열기구다. 블레드 호수 주변에서 열기구를 발견했는데, 가이드에게 물어보니 하늘에서 즐길 수 있는 활동이 많다고 한다. 패러글라이딩이나 헬리콥터를 탈 수도 있다고 하니 주머니 사정에 맞춰 신중히 고를 것.
렌트카 운전
슬로베니아는 면적이 넓지 않아 차를 렌트하는 것도 괜찮은 방법이다. 모든 도시는 류블랴나로 통하기 때문에 시내에서 빌리는 것이 좋다. 도로에 차가 많지 않은데, 2차선 도로가 많고 차선이 넓은 편이 아니라 주의가 필요하다.
보히니 호수 캠핑
보히니 호수 주변은 즐길 거리가 많다. 트래킹, 카누잉, 낚시와 패들링, 전망대 등 각종 아웃도어 활동을 할 수 있는데, 텐트를 준비할 수 있다면 하루 정도는 자연 속에서 머물러도 좋은 풍경이다. 낮과 밤의 일교차가 크니 침낭은 반드시 좋은 것으로 준비할 것.
피란의 소금
슬로베니아에서 단 하나의 선물을 사야 한다면 소금을 살 것. 피란은 14세기부터 이어져 내려온 전통 방식의 소금이 유명하다. 미네랄이 풍부하다고 하는데, 사실 미네랄의 맛을 모르니 표현할 수는 없지만 맛이 깔끔하고 조금 더 건강해지는 기분이랄까.
블레드 성
슬로베니아의 여러 성 중에서 블레드 성만은 꼭 가볼 것. 고풍스러운 모양도 모양이지만 성 안의 각 상점마다 체험 요소가 있어 흥미롭다. 특히 발코니에서 바라보는 블레드 호수 전경은 사진으로 담을 수 없을 만큼 훌륭하다.
에디터·포토그래퍼 김건태
자료 제공 슬로베니아 관광청, 터키항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