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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나 방은 너무 크다
마지막 방
언제나 방은 너무 크다
방바닥을 닦다 말고 생각했다. ‘내 방이 이렇게까지 넓었나?’ 어느 날, 방에 티브이를 들여놓으려다 말고 나는 생각했다. ‘내 방이 이렇게까지 작았나?’
나는 어릴 때부터 숨는 것을 좋아했다. 장롱, 식탁 아래, 신발장 수납 칸 등 좁은 공간에 몸을 구겨 넣고 시간을 있는 대로 모두 흘려보내는 것을 좋아했다. 나의 유희는 늘 누군가에게 발각되며 멈춰버리곤 했는데, 그것이 내가 이 놀이를 멈출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기도 했다. 그 속에는 스스로 빠져나올 수 없는 소용돌이 같은 힘이 있었다.
나는 특히 장롱 안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다. 일요일 아침, 이불을 가지런하게 정리해놓는 사람은 주로 아버지였다. 마치 옥수수를 설계하는 것처럼 장롱 안에 가지런하게 이불을 쌓아놓으면 난 거기를 타고 올라가 망쳐놓는 일을 했다. 단단한 솜이불은 밟고 올라가기에 훌륭한 계단이었고, 중간중간 끼어 있는 얇은 담요와 오리털 이불은 부실하기 짝이 없는 계단이었다. 한 번 밟으면 옥수수수염처럼 쉽게 헝클어져 버렸다. 심한 경우 와르르 쏟아져버리기도 했다. 이불을 점령하고 한숨 돌린 후엔 장롱 문을 닫았다. 문은 이미 활짝 열려 있어서 손이 닿지 않았기에, 나는 경첩 부분을 꽉 잡고 신중하게 문을 닫았다. 힘을 주면 문은 아주 천천히 움직였다. 문이 어느 정도 닫혔다고 해도 완벽하게 닫을 방법은 없었다. 장롱 안쪽엔 손잡이가 없기 때문이다. 손가락 하나 들어갈 정도로 문을 조금 열어놓은 채로 난 가만히 누워 있었다. 장롱 속은 좁고 어둡고 푹신푹신했다. 문틈으로는 우주 같은 시간이 모두 새어 나가고 있었다. 따뜻한 물에 몸을 담글 때보다 더 따뜻한 느낌이었다.
우리 집에는 방이 두 개 있었다. 큰 방은 부모님의 침실이었다. 나는 누나랑 작은 방을 썼다. 장롱 속에 누워 있는 나를 볼 때, 혹은 식탁 아래서 그림을 그리는 나를 볼 때마다 어머니는 각방을 주지 못해 미안하다고 말씀하셨다. “빨리 방 세 개짜리 집으로 이사를 가야지!” 다짐하듯 이야기 하시곤 했다. 당시 나는 왜 각방을 가져야 하는지 잘 몰랐다. 그러므로 왜 미안해하시는지도 알지 못했다. 어느 나이가 되면 기저귀를 벗어야 하고 어느 나이가 되면 이빨을 뽑아야 하는 것처럼 때마다 정해진 과제들이 있는데, 남들보다 늦어진 과제가 있다는 의미 정도로만 이해하고 있었다.
머지않아 처음으로 내 방을 갖게 되었을 때, 처음엔 별 생각이 없었다. 내 책상과 내 침대가 생겼다는 사실 정도가 좋을 뿐이었다. 내 방이 생겨 기뻐하게 된 건 방의 의미를 스스로 깨닫고 난 뒤부터였다. 방이란 숨는 곳을 의미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숨는 것을 좋아한 나에게 그것은 놀라운 발견이었다. 더 이상 이불을 헝클어뜨리지 않고도 나는 합법적으로 숨을 수 있게 된 것이다. 문을 닫아놓는 건 숨는 걸 의미하고, 문을 열어놓는 건 숨지 않는 걸 의미한다. 그것은 내가 모르던 문의 기능이었다. 출출한 사람이 냉장고 문을 열고 닫듯이, 나는 방문을 열고 닫기를 몇 번이고 반복했다.
그런데 날이 갈수록 허전한 마음이 드는 건 무슨 기분인지 알 수 없었다. 오히려 방이 없어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별로 크지 않은 방이었지만, 나에겐 너무 넓은 것처럼 느껴졌다. 문을 열어놓고 있을 땐 그렇지 않은데, 문을 닫으면 내 방이 운동장처럼 황량해 보였다. 장롱에 숨는 일에 비하면 문을 닫는 건 아주 시시한 방법이었다. 별로 공들일 만한 일도 아니고, 누군가에게 발각될 염려도 없었다. 내 방엔 붙박이장이 있었지만 난 더 이상 이불을 밟고 올라가지 않았다. 책상 아래로 기어 들어가지도 않았다. 거실에 손님이 있을 땐 문을 닫았고, 손님이 돌아가면 문을 열었다.
숨는 것의 이면에 다른 의미가 있다는 걸 깨달았다. 나는 숨기를 좋아하지만, 내가 좋아하는 숨기는 단순히 타인의 시선에서 지워지는 것만을 의미하는 게 아니었다. 나는 숨기 위해 장롱에 내 몸을 구겨 넣었다. 그리고 식탁 아래 내 몸을 맞추었다. 내가 좋아하는 숨기의 묘미는 내 몸에 꼭 맞는 공간에 있었다.
가만히 있어선 느낄 수 없지만 우리 몸은 항상 무언가로 둘러싸여 있다. 공기로, 벽으로, 자연으로 둘러싸여 있다. 그래서 우리는 가끔 우리를 둘러싼 것이 우리의 세상이라고 착각하기도 한다. 방이 좁으면 나의 세상이 좁다고 생각하고, 방이 넓으면 나의 세상이 넓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나의 세상은 나라는 사람보다 결코 크거나 작지 않다.
때때로 내 몸의 영역이 뚜렷하게 느껴질 때가 있다. 내 몸에 꼭 맞는 공간을 만났을 때 나는 나의 진짜 세상이 어디까지인지 인식하게 된다. 그것은 본질에 대한 확인이며, ‘나’라는 사람이 여기 있다는 존재의 확인이기도 하다. 그런 때 나는 안도감을 느끼는 것이다.
아주 어릴 적 손가락에 꼭 맞던 반지의 느낌이 아직도 선명하다. 반지는 나를 둘러싸고 있는 세상의 가장 작은 둘레를 느끼게 해준다. 그것은 아주 연약한 느낌이기도 하고, 무언가 나를 꼭 쥐고 있는 간절한 느낌이기도 하다. 나는 무거운 솜이불을 덮고 자는 걸 좋아한다. 묵직한 이불에 눌려 무기력하게 누워 있다 보면 이 큰 세상에서 내가 얼마만큼의 부피를 차지하고 있는지 정확하게 느낄 수 있다. 우리 가족 중 장롱에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은 가장 덩치가 작던 나 하나뿐이었다. 그곳은 내 몸과 꼭 맞는 우주의 어느 부분이었으며, 그래서 좁다기보단 무한정 넓은 공간에 더 가까웠다.
지금 내 방은 한 번 쉬었다 걸레질을 해야 할 정도로 커져버렸다. 이미 숨는 것의 본질에서 무척이나 멀어진 상황이다. 숨기의 묘미는 꼭 맞는 사이즈에 있는데 말이다. 난 약간 헐렁한 느낌으로, 내 방의 크기를 세계의 크기인 것으로 착각하며 그렇게 살고 있다.
가끔 어릴 적 장롱처럼 내 몸에 꼭 맞는 공간이 그리울 때도 있다. 물건을 버려야 하나… 방을 줄여야 하나… 손톱을 뜯으며 고민해보지만 한 번 늘어난 방의 크기는 잘 줄어들지 않는다. 방에서 운동도 하고, 때론 돌아다니며 이빨도 닦을 수 있어야 하니까…. 그럴 땐 나의 마지막 방에 대해서 생각해본다. 내 방은 앞으로도 몇 번 더 바뀔 것이다. 지금보다 더 커질 수도, 작아질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결국 마지막에 살게 될 방에 대해선 어느 정도 확신할 수 있다. 그 방은 나에게 꼭 맞는 공간이 될 것이다. 장롱보다 어두운 그곳에선 우주 같은 시간이 콸콸 쏟아질 것이다. 솜이불보다 더 무거운 흙이 나의 외곽선을 정확히 알게 해줄 것이다. 그곳에서 나는 진짜 나를 만나고 진짜 편안함을 만나게 될 것이다.
사람은 죽음에 이르러 본질에 다가서게 된다고 누군가는 말했다. 누군가는 죽어서야 진정한 자유를 얻는다고 말했다. 마지막에 살게 될 내 방의 크기를 통해 나는 그들의 말을 확신할 수 있다.
글·그림 한승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