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 과식

한승재

마음 과식

 

모든 먹는 것에는 입구가 있기 마련

꿈속에서 나는 걷고 또 걸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던 길 위에 높게 솟은 무언가가 나타났다. 두꺼운 나무를 세워 만든 검은색 대문은 꽤 위협적인 규모로 길 한가운데를 가로지르고 있었다. 나의 동행인이자 가이드를 자처한 늙은 남자가 말했다. “이것이 마음을 먹는 입구입니다. 마음을 먹는다는 건, 이렇게 지나는 것을 의미합니다.”

마음을 먹는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어보긴 했어도 실제로 보는 건 처음이었다.“그렇지! 역시 마음을 먹는 입은 마음 안에 있어야지!”꿈속의 나는 너무 신이 난 나머지 무슨 말인지도 모르는 말을 마구 지껄였다.

입구에 들어서기 전 매표소에선 입장권을 판매하고 있었다. 입구는 하나인데 입장권 종류는 다양했다. 어떤 마음을 먹느냐에 따라 필요한 입장권의 종류가 다르다고 했다. 어떤 매표소는 사람 한 명 없을 정도로 한산했고, 어떤 매표소는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줄이 길었다. ‘내일부터 살 빼야지’와 ‘먼저 연락하지 말아야지’ 입장권의 줄이 가장 길었다. 예전엔 ‘담배 끊어야지’ 줄도 무척 긴 편이었는데 전자담배가 인기를 끌면서 많이 한산해진 편이라고 가이드는 말했다. 나는 ‘떨쳐버려야지’ 티켓을 구입했다. 줄이 길진 않았지만 줄을 선 사람들이 모두 한숨을 쉬며 느릿느릿 행동하는 바람에 시간을 조금 낭비하게 되었다. 

입구에서 따로 티켓을 검사하진 않았다. 나는 티켓을 왼쪽 호주머니에 넣은 채 입구를 지났다. 길은 입구 너머에서도 그대로 이어지고 있었다. 검정 대문을 지날 때쯤엔 무언가 달라질 것이라 기대했지만 별다른 변화는 일어나지 않았다. ‘마음을 먹는다는 건 이렇듯 아무렇지 않은 것이었구나.’ 나는 생각했다. 컨베이어 벨트에 공책을 올려놓을 때 아무렇지 않은 듯 쓱 올려놓은 것처럼.

어릴 적 학교에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목에는 자동으로 발걸음이 빨라지는 으슥한 구간이 있었다. 그곳엔 언제나 가방이 빼곡히 쌓여있었고, 혓바닥처럼 길게 늘어진 컨베이어 벨트가 하루 종일 그것들을 빨아들이고 있었다. 가방이 사라지는 곳에는 깊은 어둠이 입을 벌리고 있었다. 그곳은 주택가 반지하에 자리한 작은 공장이었다. 거의 다 만들어진 가방에 상표를 부착하거나, 완성된 가방을 보관하는 일 따위를 하는 곳이었다. 물론 당시엔 그곳이 공장인지 무엇인지 전혀 알지 못했다. 아니 무엇을 하는 곳인지 생각해볼 겨를조차 없었다. 매번 그곳을 지날 때마다 가방들이 검은 입 안으로 꾸역꾸역 들어가는 모습에 나는 심각해지고, 호기심에 머리가 가려워지곤 했으니까. ‘저 많은 가방들은 모두 어디로 가는 걸까?’ 저 많은 가방들이 어딘가로 빨려 들어가 누군가의 배가 빵빵해지고 있는 것이라 생각했다. 그때는 ‘입구로 들어가는 것=먹는 것’이라는 공식이 당연하게 받아들여지던 시기였다. 자동차를 볼 때도, 건물을 볼 때도, 친구의 뽀빠이 바지를 볼 때도 입이 보였다. 버스가 사람을 잡아먹는다든지, 우체통이 손을 깨문다든지 하는 식의 원초적 발상이 상상을 지배하던 시절이었다.

학교에서 10점짜리 받아쓰기 채점표를 받아든 어느 날, 나는 그토록 겁내하던 컨베이어 벨트를 제 발로 찾아갔다. 받아쓰기 공책을 어딘가에 숨겨야 하는데, 어디에 숨겨야 할지 도무지 떠오르지 않았다. 깊은 곳에 숨긴 내 공책이 이름과 필체 등 과학적인 단서를 통해 엄마 손에 들어가고, 나는 어느 저녁 무렵 식탁 위에 놓인 공책을 보고 ‘이게 왜 여깄는 거지?’ 하며 당황해하는, 그런 숨 막히는 상상을 하고 있었다. 다행이 또래 아이들보다 머리가 좋았던 나는 무엇이든 빨아들이는 컨베이어 벨트를 떠올리게 되었다. 나는 가던 길을 멈추지도 않은 채, 툭 던지듯 컨베이어 벨트 위에 공책을 올려놓았다. 혹시라도 가방이 아닌 건 후~ 불어버리지 않을까 걱정됐지만, 다행히 그 녀석은 딸려오는 것은 가리지 않고 삼켜버리는 멍청이였다. 내게 입구 저편은 무의식의 세계, 우주가 탄생하기 이전의 세계와 같았다. 공책이 진심으로 사라졌다고 생각한 나는 그 후로 아무런 걱정하지 않고 편안한 여생을 보낼 수 있었다. 후에 받아쓰기 공책이 어디 있는지 물어보는 엄마에게 어디로 갔는지 모르겠다고 말한 것은 거짓말이 아니었다. 난 정말로 공책이 누구의 뱃속으로 들어가버렸는지 알지 못했다. 

‘떨쳐버리고 싶은 일’의 정의를 내릴 수 있다. 어차피 내 마음대로 되지 않을 거, 그만 생각하고 싶은 일들이다. 받아쓰기 공책을 버린 것처럼 무언가를 버려서 떨쳐버린다면 좋겠지만, 지금은 그때처럼 똑똑하지 않기 때문에 무엇을 버려도 잘 되지 않는다. 다만 굳건히 마음을 먹고 생각을 묻어놓을 뿐이다. 하지만 오래 지나지 않아 나는 그것들을 스스로 파헤쳐놓기를 반복한다. 그리고 변함없는 상념들의 생명력을 확인하고 난 후에 더욱 심란해한다. 모든 먹는 것에는 입구가 있어야 하는데, 마음을 먹는 입구는 대체 어디에 있는 것일까? 

나는 걷고 또 걸었다. 동행자에게 끝이 어딘지 물어보지는 않았지만, 물어보더라도 알려주지 않을것 같은 표정이었다. 그리고 오랜 시간을 걸어 또다시 검정 대문이 나타나자 동행자는 아까와 같은 어조로 말했다. “이것이 마음을 먹는 입구입니다. 마음을 먹는다는 건, 이렇게 지나는 것을 의미합니다.”

현실이었다면 진작에 그만두었겠지만, 그날 밤 꿈속에서 나는 멈추지 않고 계속 걸었다. 그리고 한참이 지나 깨닫게 되었다. 계속 같은 자리를 맴돌고 있었다는 사실을…. 마음을 먹는 입구는 돌고 도는 길 위에 놓여있었다. 

‘어쩐지 자꾸만 되돌아 오더라니.’
하지만 그런 사실을 알면서도 나는 계속 걸을 수밖에 없었다. 그냥 그것이 꿈이길 다행이라고만 생각했다.

AROUND 온라인 구독

어라운드의 모든 콘텐츠를 무제한으로 읽어보세요.

구독 시작하기

글·그림 한승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