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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숙명
나를 다독이는 법
마시는 행위와
글을 쓰는 일에 관하여
나는 쓴다, 고로 마신다
책상을 떠나지 않고 할 수 있는 건전한 ‘딴짓’이 그것뿐이기 때문이다.
내가
마시는 이유
대청소나 세금 정산 같은 귀찮은 일이 생기면 생각한다. ‘마감 때까지 내버려두자. 그때는 이걸 무척 하고 싶을 거야.’ 마감이란 ‘당장 써야 하는 글 말고는 모든 게 재미있는 시간’을 뜻하기 때문이다. 청소, 책상 정리, 요리, 바느질, 샤워 등을 다 해치우고, 인터넷 쇼핑몰의 장바구니도 가득 채우고, 기약 없는 여행 계획을 한참 짜다 보면 담당 에디터에게서 독촉 문자가 날아온다. 그때부터가 진짜 마감이다. 영양가 없는 졸고라도 토해내야 한다. 엉덩이를 의자에 딱 붙이고, 자꾸만 마우스로 향하는 나쁜 손을 가까스로 제어하며, 머릿속에 뒤엉킨 생각들을 중구난방이나마 워드 파일에 흩뿌린다. 그쯤 되면 글쓰기는 제조업에 가까워진다. 생산설비를 가동하는 데 필요한 원료는 물을 베이스로 한 가벼운 액체들이다. 다음 단어를 떠올리기까지의 공백 동안 초조함과 산만함을 달래기 위해 무언가를 마신다. 그 시간을 이겨내기 위해 별짓 다 해봤다. 그런데 담배는 건강에 나쁘고, 씹는 건 살이 찌고, 술은 효과가 엄청나게 좋지만 서너 시간 후면 오히려 만사가 귀찮아지는 역효과가 났고, 맹물은 비린내가 나서 많이 마실 수 없으며, 주스는 맥주만큼이나 배가 부른데다 입이 텁텁했다. 그래서 물에다 무언가를 타기 시작했다.
한 사람을 위한
풀코스 음료 파티
잡지사에 다닐 때는 이런 식이었다. 다 함께 저녁을 먹고 야근을 하러 사무실로 돌아가는 길, 남들이 군것질 거리를 살 때 나는 1리터짜리 보리차를 산다. ‘오늘밤 젖 먹던 집중력까지 끌어내 내가 맡은 원고를 끝장내고 말 것이다.’라는 신호다. 모니터 옆에 그것을 올려두고 붕어처럼 1분에 한 번씩 홀짝거리며 화장실 갈 때를 제외하고는 움직이지 않는다. 몇 달 후에는 동료들도 전염이 되어 마감 때만 되면 책상마다 커다란 페트병이 놓였다.
프리랜서가 되고부터는 직접 음료를 제조했다. 풀코스 음료 만찬의 스타터는 당연히 커피다. 잠에서 깨면 원두를 갈고 물을 끓인다. 원두는 주로 탄자니아 아니면 예가체프다. 핸드드립을 하는 동안 선비가 먹을 갈듯 마음을 다잡는다. 첫 잔은 머그에, 나머지는 텀블러에 담는다. 머그에 담긴 커피를 마시는 동안에는 여전히 게으름을 부린다. 이것이 오늘의 마지막 휴식이 될 것이다, 라는 마음이지만 사실 그렇게 되지 않으리라는 걸 안다.
카페인을 충분히 섭취하고 나면 차를 마신다. 보리차, 옥수수차, 메밀차, 우엉차, 헛개차 등이다. 먼저, 감옥 간 애인 사식 만들어주는 기분으로 커다란 주전자에 한가득 정성 들여 끓인다. 겨울이면 그것을 2리터짜리 보온병에 옮겨 담고 조금씩 덜어 마셔서 체온을 유지한다. 여름이면 냉장고에 넣어 놓고 차게 마신다. 이런 생수 대용 차들은 신맛이 부족하다. 집중력이 곤두박질칠 때쯤엔 좀 더 상큼한 무언가가 필요하다.
그때부터는 과일향이 나는 것들을 마신다. 한동안은 녹차의 카테킨 성분을 추출해서 만들었다는 과일맛 분말포들을 비축해두었다. 찬물에 넣고 흔들면 즉각 자몽맛, 레몬맛, 체리맛 등이 난다. 하지만 그것도 한 2년 마시니까 질려버렸다. 그래서 요즘은 100퍼센트 과일 농축액을 준비한다. 지금 나의 냉장고에는 물에 희석해서 마실 수 있는 아로니아와 깔라만시 원액, 그리고어제 주전자 가득 끓여서 식힌 헛개차가 들어있다. 그 옆에 보드카와 진, 소주가 있지만 오늘은 알코올의 날이 아니다. 알코올은 음료 만찬의 디저트다. 모든 일이 끝날 때까지 아껴두어야 한다.
글은 무엇으로
이루어지는가
뇌는 에너지를 많이 소비하는 기관이다. 과학자들은 우리가 음식으로 얻는 영양소의 20~30퍼센트를 뇌가 사용한다고 본다. 그래서인가, 글을 쓰다 보면 허기가 진다. 수험생들이여, 폭식과 체중 증가는 당신이 게으른 탓이 아니다! 나는 책상에 붙들려 있는 동안 액체로 영양소를 공급함으로써 허기진 뇌가 나를 휘둘러 치킨을 배달시키게 만드는 것을 막는다. 껌을 씹는 게 두뇌 활동을 자극하고 스트레스를 해소해준다는 과학 기사는 본 적이 있는데 무언가를 마시는 행위도 그런 기능을 하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머그에 차를 따르고, 액체를 입안으로 흘려 넣고, 다시 잔을 내려놓는 작은 동작들이, 쓸 말이 한 글자도 떠오르지 않아 키보드를 두드릴 수 없는 순간에 바보처럼 멍해지는 것을 막아주는 건 사실이다.
물은 다이어트와 피부 건강에도 좋다고 한다. 뷰티 전문가들은 물을 하루 2리터 이상 마시라고 한다. 글쎄, 과연? 원고가 안 풀리는 날이면 나는 하루 10리터도 너끈히 마신다. 서너 달씩 책을 쓸 때는 규칙적인 생활이 가능하다. 하루하루 일할 시간을 정해두고 글이 안 풀려도 때가 되면 책상에서 침대로 퇴근을 한다. 매일 비슷한 주제를 쓰기 때문에 2~3주째부터는 탄력이 붙어서 글이 술술 나온다. 하지만 잡지에 기고하는 글은 다르다. 몇 주 쉬다가 다시 시작해야 할 때도 있고, 하루에 서너 가지 다른 칼럼을 쓸 때도 있다. 주제도, 분량도, 매체의 성격도, 내가 써야 하는 글의 분위기도 매번 다르다. 어떤 날은 한국 영화의 최근 동향에 대해 비판적인 분석을 하고, 어떤 날은 내러티브가 있는 여행기를 썼다가, 다음 날이면 드라마에서 배우가 입고 나온 의상을 품평하고, 또 다음 순간에는, 이렇게, 내가 무얼 마시고 사는지를 써야 하는 것이다. 중력이 다른 행성들을 적응할 틈도 없이 건너다니며 사는 꼴이다. 그리하여 때로는 10리터의 액체를 마시고도 아직 한 문단밖에 채워지지 않은 원고를 보며 머리를 쥐어뜯는다. 그 결과, 하루 2리터의 물이 스트레스와 수면 부족으로부터 피부를 보호해주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확실히 배웠다. 그것은 다만 이런 불규칙한 생활에도 불구하고 나 자신을 파괴하고 있다는 자괴감을 덜 느끼게 해줄 뿐이다. ‘그래도 나는 내 몸에 좋은 일을 하나쯤은 하고 있어!’ 물론 그 정도만으로도 음료에 집착할 이유는 충분하다.
배출과
배설 사이
글을 쓴다는 건 내 안에 있던 무언가를 세상 밖으로 끄집어내는 행위다. 말하자면 배출 혹은 배설의 영역인 셈이다. 남들이 잘 무르익은 생각, 지식, 감성 같은 것들을 배출할 때, 나는 액체를 콸콸 들이부어 뇌의 주름 사이에 조그맣게 끼어있던 이물질들을 간신히 배설해낸다. 화학 실험실에 가져가 성분 분석을 하면 내 글의 8할은 H²O일 것이다. 이 글의 경우엔 그밖에 다량의 헛개, 아로니아, 깔라만시 추출물과 카페인이 들어있다. 그리고 이제 나는, 드디어, 오늘의 디저트를 들 것이다.
글 이숙명
사진 김혜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