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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eemu Riihelä
헬싱키에서 배로 두 시간, 정확히 76킬로미터 거리의 바다를 가로지르면 에스토니아 탈린Estonia Tallinn에 도착한다. 배 안에는 핀란드 사람들로 북적거린다. 이들에게 탈린을 가는 건 어떤 의미일까 생각해본 적이 있다. 첫째, 아무 계획 없이 즉흥적으로 가는 여행. 둘째, 배 안에서 할인된 가격의 술을 사기 위한 여행. 그것도 아니면 흔한 주말 여행 정도로 나뉠 것이다. 헬싱키에 살고 있는 나와 남편 티뮤Teemu도 예외는 아니다. 가벼운 마음으로 부담 없이 가기에 적합한 이 여행지에 벌써 다섯 번째 방문이다. 남편은 어린 시절부터 셀 수 없을 만큼 자주 다녀왔다고 한다. 비록 흥분과 설렘으로 시작한 여행은 아니지만 찰랑이는 바닷물 너머의 탈린은 언제 봐도 매력적이다. 탈린과 헬싱키를 오가는 선박의 왕복 티켓은 24유로, 우리 돈으로 3만원이 조금 넘는 수준이다. 헬싱키에 있는 단 하나뿐인 놀이공원 린난마끼Linnanmäki의 자유이용권이 35유로, 핀란드 내 다른 도시로 떠나는 기차비가 보통 50유로 이상임을 감안하면, 이 여행의 가격 대비 효율성은 감히 최고라고 말할 수 있다. 무더운 7월의 어느 날, 우리는 다시 탈린으로 향했다.
7:30 AM | 헬싱키Port of Helsinki Western Terminal에서 탈린Port of Tallinn으로
꽤 이른 시간이었지만 배 안에는 이미 많은 인파로 붐비고 있었다. 해가 일찍 뜨고 길게 머문다는 백야의 여름이 아니던가! 시간을 쪼개 하루를 일주일처럼 즐기고 싶었다. 푸른 발트해를 가르며 나아가는 풍경을 바라보고 있으니 청량 음료수를 들이키는 것만큼 시원하게 속이 뻥 뚫렸다. 흔들리는 배 안에서 맥주를 들이키며 느긋한 여유를 부리는 북유럽 사람들의 모습을 구경하다가 불어오는 바닷바람에 졸음이 쏟아지려는 찰나, 목적지에 도착한다는 방송이 나왔다. 핀란드에서는 에스토니아를 비로Viro라고 불렀다. “벌써 도착이야?”
헬싱키나 탈린이나 항구 주변을 날아다니는 갈매기들의 목청 높은 울음소리는 비슷했다. 아담한 터미널, 특별한 절차도 없어서 다른 나라에 있는 건지 아니면 아직도 헬싱키인지 가늠할 수 없을 만큼 경계가 없는 상태. 신분증을 대신할 여권을 소지하고 있지만 유로화가 된 후로는 가방 속에서 잠자고 있을 뿐이었다. 탈린을 여행하면서 한번도 꺼내든 적 없는 물건을 들고 밖으로 나섰다. 불현듯 이것이 ‘여행’임을 일깨워주는 탈린의 공기가 한꺼번에 밀려 들어왔다.
9:30 AM | 툼페아 언덕Toompea Hill에서
어수선한 항구 주변을 벗어나면 얼마 지나지 않아 올드타운Old Town에 입성한다. 이른 오전이었지만 길목마다 작은 시장이 펼쳐져 있었다. 먹음직스러운 제철 과일과 싱싱한 야채로 가득한 여름 시장은 활기가 넘쳤다. 나는 여느 때처럼 시내가 한눈에 보이는 툼페아 언덕으로 향했다. 탈린에서 가장 높은 이곳에 오르는 건 일종의 신고식이었다. 조금은 촌스럽지만 ‘또 왔어, 오랜만이야’라는 인사를 건네고픈 마음이랄까. 청명한 하늘 아래 서 있는 알렉산더 네브스키 사원Alexander Nevsky Cathedral을 지나 언덕배기를 오르다 보니 어느새 전망대에 이르렀다. 800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고풍스러운 구시가지 너머로 푸른 바다가 보였다. 붉은 지붕과 뾰족한 탑, 아기자기한 집들이 둘러싸인 나무숲 사이로 보이는 바다라니. ‘아름답다’는 말로는 부족한 순간이 있다면 바로 그런 풍경이었다. 에스토니아는 발트 3국의 가장 북단에 위치해 있는 곳으로 2백만 명이 모여 살고 있는 작은 나라다. 그중 탈린에만 40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살고 있다고 하니 전체 인구의 30퍼센트가 밀집돼 있는 셈이다. 어쩌면 그보다 많은 숫자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만큼 관광객들이 몰려들었다. 그리고 누가 먼저라고 할 것 없이 내기라도 하듯 포토 타임을 펼쳤다. 갑작스러운 인파에도 아랑곳하지 않는 갈매기들만이 항구와 이곳을 오르내렸다. 여러 나라에서 몰려든 관광객들을 이끄는 가이드의 소란스러운 함성에 나는 비로소 실감했다. ‘바다 건너 다른 나라에 왔구나!’
12:00 PM | 올드타운Old town 안의 세상
탈린으로의 첫 여행은 2007년 여름이었다. 7년 만에 보는 여름의 탈린임에도 모든 게 그대로다. 다시 그때로 돌아간 듯 그립기도 하면서 묘한 감정이 뒤섞였다. 늘 같은 자리에 있는 식당, 나무 한 그루마저 그 배경이 되었다. 그동안 탈린의 사계절을 구석구석 경험한 나지만 다시 들뜬 기분은 어쩔 수 없었다. 사실 나는 봄의 탈린을 좋아한다. 옷 속을 파고드는 쌀쌀함은 여전하지만 여름처럼 붐비지 않고, 탈린의 모습 그대로를 온전히 받아들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겨울의 탈린이 매력적이지 않은 것은 아니다. 하얀 눈 속에서도 절대 감춰지지 않는 역사적인 정취가 건물에서 배어있다. 특히 시청 앞 광장에서는 풍성한 여름과는 또 다른 시장 풍경을 구경할 수 있다. 가을은 또 어떠랴. 촉촉하게 내리는 빗줄기 아래 우산을 쓰고 돌길을 밟는 기분은 꽤 낭만적이다. 그러다 예쁜 카페에 들어가 차 한잔 나누며 창밖을 감상하는 것도 놓칠 수 없다. 탈린의 여러 가지 모습을 본 나는 운이 좋은 사람이다. 물론 동화 속 세상으로 들어온 듯한 착각을 불러 일으키는 이곳에도 프랜차이즈 햄버거 가게가 있고, 최신 노래가 흘러나오기도 한다.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지정될 만큼 옛 모습을 간직하고 있지만, 시간이 흐르면 이러한 이질적인 모습조차 탈린의 역사가 되는 게 아닐까. 이 점만 인정하면 타임머신을 타고 완벽한 중세시대로 온 것 같은 기분이 들 것이다.
2:00 PM | 시청City Hall 광장을 거닐다
탈린의 구시가지는 세월의 깊이를 그대로 반영하는 건물들이 즐비했다. 특히 15세기부터 17세기까지 지어진 건물들이 마주하고 있는 시청 주변에는 여전히 발 디딜 틈도 없는 큰 시장이 열리고 있었다. 덕분에 11시에 가게 문을 여주변 레스토랑들도 벌써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과거부터 활발한 광장 문화를 이어온 유럽에서 제일 흥미로운 건 역시 장터 구경. 작은 콘서트가 열리는 곳에서 한참을 서 있다가 독특한 모자, 털실로 짠 핸드메이드 장갑과 양말 등 쏟아지는 수공예품을 구경하다 보니 시간 가는 줄도 몰랐다. 그러다 기념품을 파는 상점에서 나무로 만든 말 인형을 만났다. 동물이라면 눈이 반짝하는 내가 그냥 지나칠 수 없는 곳이었다. 끊이지 않는 수다와 웃음소리가 거리 곳곳에서 흘러나왔다. 무엇이 그렇게 그들을 즐겁게 하는지 슬쩍 옆에서 듣고 싶을 정도, 내 얼굴에도 어느새 미소가 걸렸다. 근심 따위는 없어 보였다. 붐비는 골목에서도 어느 누구 하나 서두르거나 짜증내는 기색 없이 그저 천천히 공간을 느낄 뿐이었다. 점심을 먹고 나오니 시나몬 향이 그윽하게 풍겼다. 시나몬 가루를 입힌 아몬드Cinnamon toasted almonds를 볶아서 팔고 있는 상인들 때문이었다. 사진을 찍으려고 했더니 주걱을 내 앞으로 내민다. 우선 맛을 보라는 것이다. 평소에는 시나몬을 좋아하지 않았지만 고소하고 깊은 맛이 내 입맛에도 잘 맞았다. 맛도 맛이지만 재미있는 중세 복식이 썩 마음에 들었다.
5:00 PM | 올드타운 밖의 세상
언제나 볼거리가 넘치는 구시가지를 빠져나오면 활쏘기 체험을 할 수 있는 곳들이 보인다. 남편과 한국의 수원성에 놀러 갔을 때 활쏘기를 한 것이 떠올랐다. 그다지 솜씨가 좋지 못했던 우리는 구경만 하다가 발길을 돌려야 했다. 형형색색의 독특한 건물을 품고 있는 올드타운과는 대조되는 바깥 지역은, 다양한 양식의 건물들이 자리잡고 있었다. 이는 지리적 위치상 덴마크, 스웨덴, 러시아, 독일 등 주변의 강대국들로부터 끊임없이 시달려야 했던 에스토니아의 아픈 역사를 보여주는 증거이기도 했다. 하지만 에스토니아 사람들은 그들만의 방식으로 끝까지 문화를 지켜냈고 지금의 아름다운 모습을 간직할 수 있었다.
7:30 PM | 집으로 돌아가는 길
낯설지만 낯설지 않은 도시 에스토니아 탈린. 조금은 불편한 돌길을 걸으며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10시간 남짓한 여행이 내게 남긴 것은 무엇일까 생각했다. 이 하루의 시간은 헬싱키에서 보낸 당연한 일상들을 아쉽게 만들어버렸다. 할아버지의 할아버지, 그 할아버지가 살던 마을을 지키며 살아온 마음씨 좋은 사람들, 오래된 도시에서 자란 젊은 청년들의 생동감, 풍요로운 음식이 빠르게 흘러가는 하루를 붙잡고 우리의 지친 마음을 달랬다. 그래, 이 정도면 충분했다. 헬싱키로 향하는 배에 몸을 싣고 밖을 보니 백야로 인해 아직 빛을 잃지 않은 바다가 나를 집으로 데려다 주고 있었다. 10시간의 기억을 선명하게 남긴 채. “또 올게, See you around!”
올데 한자 OLDE HANSA
홈페이지. www.oldehansa.ee
주소. Vana Turg 1 10140 Tallinn
탈린의 올드타운을 방문하면 레스토랑 ‘올데 한자’에서 무조건 한끼를 해결하라고 말하고 싶다. 구시가지 중심부에 위치해있으며 전기대신 촛불이 내부를 밝혀준다. 식당 내부 분위기, 직원들 복장, 심지어 음악까지 중세시대의 완벽한 재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이곳 앞에는 사람들의 이목을 끌어 모으려는 아름다운 여인이 연주하고 있다. 짓궂은 관광객이 여인의 어깨에 손을 올리고 사진을 찍어도 웃음으로 받아주며 연주를 이어간다.
글 사진 김은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