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프탑에서 만나요

piknic

회현동 언덕배기에 묵묵히 자리한 피크닉은 바쁘게 흘러가는 도심 속에서 소풍 같은 휴식을 즐길 수 있는 공간이다. 루프탑에 올라, 계절이 스며있는 밤을 등지고선 우뚝 솟아있는 옥외 간판을 마주할 때 이에 대해 실감하게 된다. 전시 테마에 맞춰 자유자재로 모습을 바꾸는 루프탑은 재스퍼 모리슨의 가구를 직접 체험해보는 라운지가 되기도, 마음을 다스리는 차 한 잔을 마시고선 멀리 보이는 풍경을 감상하는 중정이 되기도 한다. 공간을 한껏 누린 뒤 무구한 빛을 내는 ‘piknic’ 아래 서서 회현 일대를 굽어보고 있자면 형용할 수 없는 아득함이 밀려온다. 그 순간, 우리는 어렴풋이 짐작하고야 만다. 계절마다 걸음을 옮겨 이 풍경을 보러 오게 될 것만 같다고. 자리에 서서 계절이 바뀌는 모습을 바라보게 될 것이라고.

옥상으로 향하는 여정

피크닉에 가려고 지하철역 입구로 빠져나오자마자 삶의 흔적이 오롯이 묻어나는 풍경이 펼쳐진다. 피크닉이 이곳에 터를 잡기 전까지, ‘회현’은 종착지가 아닌 경유지에 불과했다. 정겨운 향취가 배어 있는 시장과 서울의 랜드마크인 남산으로 향하는 순환로. 그 사이를 채우고 있는 오래된 주택과 사이사이 위치한 작은 가게들. 잠시 들렀다 갈 곳이라곤 주민들과 상인들이 막간을 이용해 끼니를 때우고선 그릇의 바닥이 보일 때쯤 자리를 뜨는 식당이 전부인 그곳. 2016년 가을, <ECM: 침묵 다음으로 아름다운 소리>와 <즐거운 나의 집>을 통해 전시기획자의 자력을 보여준 김범상 대표는 감도 높은 기획을 담아낼 만한 공간을 찾고자 이곳을 방문했다. 잠깐의 머무름이 전부인 동네에서 그를 사로잡았던 것은 옛 골목에 서려 있는 고즈넉한 정취였다. 골목 사이에 숨어 있는 전시장으로 통하는 쪽문을 찾기 위해 동네 구석구석을 헤매다 보면 그 짧은 사이에 매력을 알아차리게 된다. 

그는 한 매체에서 접근하기 어려울수록 사람들의 호기심을 자극한다는 이야기를 전했다. 동네 지리가 익숙지 않은 초행길에는 다소 각박한 경사의 비탈길을 오르게 되는 일이 다반사다.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라는 생각이 불쑥 치밀어 오르다가도 오기가 생겨 걸음을 무를 수도 없다. 그 끝에 마주하게 되는 1970년대 제약회사의 사옥이었던 붉은 건물은 온 마음을 뺏기게 될 정도로 아름답다. 그가 이곳에 터를 잡게 된 결정적인 이유는 바로 옥상에서 바라본 풍경 때문이기도 하다. 피크닉의 루프탑은 서울의 낭만을 만끽하기에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공간이다. 로고를 기준으로 왼편을 바라보면 웅장한 건물 숲이 만들어낸 차분한 감각을, 고개를 돌리면 남산이 전해주는 푸릇한 기운을 받을 수 있다. 르코르뷔지에가 빌라 사보아에 옥상 정원을 만들어 사람들에게 휴식을 선물했듯, 그는 빼곡한 일상의 풍경에 몇 평의 틈을 내었다. 그렇게 회현 하면 피크닉, 피크닉 하면 단숨에 루프탑 풍경과 로고를 떠올릴 정도로 상징적인 공간이 되었다.

전시의 여운을 느끼기 좋은 피크닉의 옥상

한국 조경의 선구자로 불리는
정영선 소장의 손길이 닿은 조경

차곡차곡 쌓인 서사를 읽어 내리며

피크닉의 전시는 한 권의 책처럼 읽힌다. 혹은 공들여 만든 다큐멘터리처럼 장면마다 질문을 남긴다. 이러한 비유가 성립하는 데엔, ‘서사’가 스며 있기 때문이다. 화이트큐브가 작품 감상에 최적의 환경을 선사한다면, 피크닉의 공간들은 단순히 작품들을 보여주는 데에서 끝나지 않는다. 그 너머의 이야기를 읽게 만든다. “장르를 횡단하며 자신의 예술적 영역을 확장해 가는 예술가를 동경해 왔습니다.” 피크닉의 첫 전시로 ‘류이치 사카모토Sakamoto Ryūichi’의 삶과 예술을 다룬 것은 이러한 이유에서였다. 빔 벤더스Wim Wenders 감독의 다큐멘터리처럼 한 사람의 일생을 면밀하게 들여다보는 작품들을 추종했던 김범상 대표는 ‘기획자의 글’에 적은 첫 문장을 주축으로 삼아 각 분야에서 큰 획을 그은 예술가들의 궤적을 진득하게 선보였다. 한평생 좋은 물건에 대해 고찰한 재스퍼 모리슨Jasper Morrison의 철학을 보여주고자 전시장 내부에 길고 긴 목재 프레임을 설치했다. 그 위에 그가 발표한 100여 가지 제품을 빠짐없이 진열하고 아이디어 스케치, 비하인드 스토리가 담긴 작업 노트를 발췌했다. 독일의 현대 무용가 피나바우슈Pina Bausch의 무대를 디자인한 페터 팝스트Peter Pabst와 함께한 전시에선 공간마다 그의 무대를 본떠 재현해 놓았다. 관람객은 무용수가 되어 자작나무가 펼쳐진 눈길을 헤매고, 카네이션이 가득한 너른 들판을 걸으며 한 예술가의 일대기를 온몸으로 경험하게 된다.

다음은 어떤 인물을 지독하게 파고들까. 이러한 기대와 예상을 뛰어넘고 돌연 다음 전시의 주제로 ‘명상’이란 단어를 내건다. 확고한 예술관을 지닌 인물들을 다루다, 다소 실험적인 노선을 택한 것은 피크닉이란 공간 이 관람객의 감정에 집중하기 때문이다. 개별적인 작품들을 충실히 감상하는 것을 넘어, 전시장에 입장하여 출구로 빠져나올 때까지의 호흡과 한 사람의 내적 리듬이 조화를 이루기 위해서는 기획자의 선택과 배열이 중요하다. 어두운 공간을 걷고 숨 쉬며 내면을 들여다보게끔 구성한 ‘명상’은 관람객들의 인원수를 조정하고 핸드폰 촬영 또한 제한을 두었다. ‘정원 만들기’에서는 몇 평의 땅을 가꾸는 일의 가치와 수고로움을 이야기하고자 피크닉 안팎을 거대한 정원으로 만들기에 이른다. 하나의 주제를 깊이 있게 풀어낼 방법을 줄곧 고민해 온 그는 유례없는 팬데믹 시대 속에서도 관람객들이 공간을 충분히 누리도록 시의성 있는 주제에 ‘피크닉’만의 관점을 더해 조명했다.

드리스 반 노튼 패션쇼에서 영감을 받아 만든
카페 피크닉

카페 피크닉 전경

피크닉 입구로 들어오자마자 보이는 외관

차분한 계절을 밝히는 예술의 빛

계절마다 피크닉이 그려내는 색다른 풍경들을 사랑한다. 그중 가장 기다려지는 것은, 단연코 겨울이다. 사계절을 돌아 남산의 빛이 부쩍 차분해질 때쯤, 피크닉을 꾸려가는 이들은 추운 계절에만 만날 수 있는 특별한 풍경을 준비하느라 분주해진다. 스크린에서 흘러나온 빛과 선율, 담담한 목소리가 밤을 밝히면 앙상한 가지만 남은 남산 풍경 위로 피크닉의 온화한 불빛이 스며든다.

음악 감상회

지금의 피크닉이 있기 이전, 김범상 대표가 처음으로 기획을 맡았던 <ECM: 침묵 다음으로 아름다운 소리>는 음악을 주제로 한 전시였다. 당시 그는 ECM의 음악을 감상할 수 있는 최상의 환경을 조성하고자 전시장 메인홀에 오디오와 빈백을 배치하였다. 듣는 것에 진심인 사람이 만들어낸, 기존의 전시장에서는 만나볼 수 없던 풍경은 관람객들을 감응하게 했다. ‘음악 감상회’는 이 연장선에 있다. 특별한 수고를 들이지 않아도 쉽게 음악을 들을 수 있는 요즘, 선곡한 이의 취향과 그에 담긴 이야기를 헤아리며 플레이리스트를 훑는 경험은 공들여 음악을 들을 때만 느낄 수 있는 감동을 준다.

편안한 분위기 속 선율에 몰입할 수 있는 음악 감상회

무성영화 극장

음향과 대사가 배제된 조건 속에서도 무성 영화는 당대 관객을 매료시켰다. 그들을 사로잡은 건, 지루한 적막을 메우는 음악가의 생동감 넘치는 연주 덕분이었다. 소리 없이 흐르던 영상에 연주자 고유의 에너지가 스민 사운드트랙이 더해지면 인물의 격한 몸짓은 이전과는 다른 리듬을 지닌다. 더불어 사람들의 반응부터 음악에 맞춰 까딱이는 고개, 다음 장면을 위해 악보를 넘기는 연주자의 잔 기척까지도 흑백 화면에 생기를 더한다. 매회 다른 오케스트라가 모여 저마다의 화음을 연주할 때, 비로소 영화는 완성되고야 만다.

버스터 키튼 <카메라맨>(1928)과 재즈 뮤지션 윤석철의 연주가 함께한 무성영화 극장

소설 극장

침침한 공간을 나직하게 밝히는 핀 조명 아래, 작가가 모노드라마의 배우처럼 자리에 앉아 있다. 그들의 손에 쥐어진 대본은 다름 아닌 자신이 집필한 소설이다. 숱한 밤을 지새우며 고심해서 적어나간 첫 문장이 그의 입에서 흘러나올 때, 스크린에서는 활자로 적힌 장면들을 이미지화한 영상이 재생된다. 그곳에서 작가는 이야기를 전달하는 화자가 되거나 이 극을 끌어나가는 배우가 되기도 하고, 공간의 분위기를 지휘하는 연출가가 될 수도 있다. 작가의 호흡에 발맞춰 오감을 사용하여 텍스트를 읽는 동안 새로운 감각들이 마구 틈입한다.

황정은 작가의 <낙하하다>를 들을 수 있었던 소설 극장

여운을 오래도록 간직하며

순간을 붙잡아 둘 사물

작품을 감상하는 동안 느낀 아찔한 감각은 전시장을 벗어나자마자 거짓말처럼 휘발되고야 만다. 그것이 못내 아쉬워질 때면, shop piknic에 들러 그 순간을 오래도록 기념할 만한 굿즈를 구매한다. 내 방 책상 위 사울 레이터의 시선이 담긴 문진과 류이치 사카모토의 [Three] 앨범은 그날의 기분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둥근 유리 속 눈 내리는 풍경과 낮은 화음을 감상할 때마다 어둑한 전시장에서 삼킨 감정들이 생생하게 살아난다.

느적느적 소월길 산책

좋은 작품을 보고 난 뒤에는 오래도록 걸으며 생각을 정리하고 싶어진다. 전시장에서의 걸음을 이어 나가고 싶은 날엔 소월로로 향한다. 사람이 없어 한산한 소월로는 여운을 소화하기에 딱 좋은 산책 코스이기도 하다. 숨이 찰 때까지 걸어 올라 남산도서관을 돌고선 다시 느릿하게 회현역으로 내려오는 길엔 어쩐지 꿈속을 걷는 것처럼 몽롱하고도 충만한 기분에 사로잡히고야 만다.

혀끝에 남은 이야기

마음 잘 맞는 친구와 함께 전시를 보는 날엔 무언의 규칙이 있다. 작품을 보는 도중엔 침묵할 것. 입을 굳게 다물고 각자의 박자대로 전시를 보고 나와서는 밀린 대화를 나누기 위해 bar piknic으로 향한다. 마음에 머문 감상들을 꺼내어 본 후, 그날의 여운을 갈무리 해 줄 와인 한 모금을 머금어 본다. 이루 다 말할 수 없이 완벽한 마침표구나, 싶어진다.

강요배, 쳐라 쳐라, 캔버스에 아크릴,
520X194cm, 2021, 피크닉 <국내여행> 전시 중에서

신동, 고분 명상, 혼합 매체, 가변 설치,
2022, 피크닉 <국내여행> 전시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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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디터 오은재

자료 제공 피크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