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뜻밖의 다정함]

멀리서 함께 읽기

이나는 스페인 바르셀로나에 산다. 우리는 몇 년 전 바르셀로나에서 만나 친구가 되었고 내가 먼저 한국으로 돌아왔다. 그곳에 살았다는 게 희미해질 때면 나는 이나와 걷던 골목을 떠올리고, 기억은 한 걸음씩 선명해진다. 바르셀로나에서 우리는 어쩌다 한글로 쓰인 종이책이 생기면 나눠 읽곤 했다. 이나는 언제나 나보다 더 느리고 깊게 책을 읽어냈다. 성격 급한 나는 서둘러 후루룩 읽고는 이나의 이야기를 들으며 마저 읽었다. 《올리브 키터리지》와 《다시, 올리브》도 그랬다.

다운에게

바르셀로나에도 봄이 오려나 봐. 겨우내 따뜻했던 날씨가 열흘 전부터 계속 비바람이네. 이 도시에 정을 붙이고 산 지도 꽤 되었는데, 나는 왜 이런 우중충한 봄 날씨에는 영 적응을 못하는지. 

네가 《올리브 키터리지》 얘기를 처음 했던 날이 생각나. “《올리브 키터리지》와 《다시, 올리브》. 나는 이 두 권으로 올해 읽을 책은 다 읽었다.”라며 호기롭게 말하던 너. 그때가 작년 2월이었으니까, 연말 되려면 아직 열 달이나 더 남았는데!

크로스비 마을에 살면서 때로는 주인공으로, 때로는 지나가는 노인으로 불쑥 나타나 이것저것 참견하다가 홀연히 사라지는 일흔의 백인 할머니. 거대한 코끼리 같은 거구에 퉁명스럽고 무뚝뚝한 올리브 키터리지.

나는 올리브의 마음을 좇아가다가, 이해하지 못하다가, 가엽다가 정말 어쩔 줄을 몰라 했지. 그러다 어떤 커다란 상실을 겪은 올리브가 혼자 운동화를 꺼내 신었을 때, 그렇게 오락가락하며 홀로 강변을 거니는 어떤 노인을 상상하면서 조금 울었던 것 같아. 달려가서 꽉 안아주고 싶었어. 올리브는 괜한 참견 말라며 또 투덜댔을까? 이상하지. 묘하게 불편하면서도 자꾸만 눈이 가는 이 마음을 나는 어쩌면 좋을까. 

5년 전에 네가 준 편지를 다시 꺼내 읽었는데, 이런 말이 적혀 있더라.

“좋은 할머니가 될 것이 분명한 친구와 나란히 나이가 든다는 건 참 든든한 일인 것 같아.” 

올리브는 좋은 할머니일까? 나는 좋은 할머니가 될 수 있을까? 일흔이 넘어도 일상은 흔들리고, 이런저런 생채기들을 여전히 끌어안고 살아야 한다니, 이건 절망일까 희망일까. 밤에 쓰는 편지는 늘 물음표가 많아지네. 귀여운 할머니는커녕, 고약한 옆집 노인네 소리는 듣지 말아야 할 텐데. 그땐 일요일 오전에 동네에서 가장 맛있는 도넛과 우유 한 잔을 나눠 먹고 싶은 사람들과 조금 더 가까이 살면 좋을 텐데. 또 쓸게, 다운아.

바르셀로나에서, 이나.

이나에게

“바르셀로나에도 봄이 오려나 봐.”라는 첫 문장을 읽자마자 눈이 빨개졌어. 잊고 있던 바르셀로나의 봄이 샅샅이 기억나 버렸네. 나에게 바르셀로나의 봄은 밝게 반짝이는 것인데, 너에겐 우중충한 것이라니! 역시 떠나고 나면 나쁜 건 잊게 되고 좋은 기억만 남는 걸까. 구시가지 거리에 놓인 카페 테이블에 나른하게 앉아 있던 봄이 생각나. 우리 사이에 있는 건 부동산, 주식, 일에 대한 고민 혹은 우리가 함께 아는 다른 사람이 아니었어. 지나가는 개나 파란 하늘, 지금 마시고 있는 커피 같은 것이었지. 난 그때 이미 이 순간이 소중하다는 걸 알고 있었어.

우리 처음 《올리브 키터리지》를 읽고 이야기를 나누었을 때, 너는 올리브에게 감정을 이입하기 힘들었다고 했지. 그런데 이나야 나는, 단박에 올리브에게 사로잡혀 버렸어. ‘만’ 앞에 주차된 케빈의 자동차 옆자리에 올리브가 불쑥 타던 장면에서부터였던 거 같아. 올리브가 의도한 건지 아닌지 잘 모르겠지만 그는 케빈을 구했지. 나처럼 키가 큰 올리브가 고개를 수그리고 꾸부정하게 차에 올라타는 장면이 꼭 내가 겪은 일처럼 생생해. 

사실은 있지, 책을 읽다가 올리브가 하는 말을 입 밖으로 내며 따라 한 적도 있어. 특유의 퉁명스러운 말들 있잖아. “뭐가 문제야? 할망구 우는 거 처음 봐?” 같은. 차를 권하는 지인에게 “아니, 난 됐어.” 하는. 괴팍하고 쌀쌀맞은 말들을 따라 내뱉으며 피식 웃었어. 사실 나는 그런 말들을 마음에 담고 살고 있는 것 같아. 그래서 자신의 감정에 솔직한 올리브가 부럽고, 좋아 보이기도 했어. 누구에게도 들키고 싶지 않은 이야기인데 나는 왜 네 앞에서 이런 고백을 하고 있는 거지. 다 올리브 키터리지 때문이야. 읽는 내내 버릇처럼 희망을 찾아내려 애썼지만, 사실은 올리브는 줄곧 인생과 노년의 고단함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지. 그럼에도 이 책에서 내가 가장 좋아했던 문장은 이거였어.

올리브는 생이 그녀가 ‘큰 기쁨’과 ‘작은 기쁨’이라고 생각하는 것들에 달려 있다고 생각했다. 큰 기쁨은 결혼이나 아이처럼 인생이라는 바다에서 삶을 지탱하게 해주는 일이지만 여기에는 위험하고 보이지 않는 해류가 있다. 바로 그 때문에 작은 기쁨도 필요한 것이다. 브래들리스의 친절한 점원이나, 내 커피 취향을 알고 있는 던킨도너츠의 여종업원처럼. 정말 어려운 게 삶이다.

 

― <작은 기쁨> 중에서.

나는 올리브처럼 퉁명스러운 마음을 가졌지만, 동시에 올리브 같은 이에게 작은 기쁨을 주는 친절한 사람이고 싶어. 그게 내 삶의 괴로움이자 즐거움인 것 같아.

당신은 짐승 같은 여자하고 결혼해서 그 여자를 사랑하게 될 거야. 올리브는 생각했다. 아들이 하나 생길 거고, 그 애를 사랑하게 될 거야. 하얀 가운을 입고 키만 훌쩍한 당신은 약을 사러 온 동네 사람들한테 끝도 없이 친절할거야. 당신은 눈이 멀고 벙어리가 되어 휠체어에서 생을 마감할거야. 그게 당신 인생이 될 거야.

 

― <튤립> 중에서.

나의 인생은 어떤 모습일까. 나는 어떻게 살다 어디에서 생을 마감하게 될까. 우리는 그때까지 친구일까. 그때 읽는 《올리브 키터리지》는 또 어떻게 다를까. 나는 이 책처럼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게 하는 책을 읽은 적이 없어. 그래서 연초부터 호기롭게 ‘올해의 책’이라고 외쳤나 봐. 한 번 더 호기롭게 말해야지. 평생 한 권의 책만 읽어야 한다면 나는 이 책을 읽을 것 같아. 이나야 올리브처럼 퉁명스러운 할머니가 되어도 내 친구 해줄 테야?

제주에서, 다운.

다시, 다운에게

봄은 어디서부터 봄일까. 네가 기억하는 바르셀로나의 봄은 아마도 완연한 5월의 봄을 말하는 거겠지? 샛노란 티푸아나 티푸Tipuana Tipu 꽃잎이 흐드러지게 피었다가, 온 거리의 바닥을 노랗게 물들이는 그 봄, 구시가지 어디에선가 너를 만나기로 하고, 늦은 점심을 먹고, 말린 어깨를 쭉 펴면서 집을 나서던 그 시절의 나.

신디가 쓸 수 있는 것은 2월의 햇빛에 대해서였다. 그것이 세상의 모습을 어떻게 바꾸는지에 대해서. (…) 하루의 끝마다 세상이 조금씩 더 열렸고, 더 많은 햇빛이 황량한 나무를 가로질렀다. 그리고 약속했다. 그 햇빛이, 약속했다. 그건 얼마나 굉장한 일인가.

 

― <햇빛> 중에서.

낮이 점점 길어지는 이 계절에, 나는 바르셀로나에 혼자 남아 《다시, 올리브》를 또 읽고 있어. 그리고 나는, 우리가 바르셀로나의 나른한 햇볕 속에 앉아 있던 시간들을 떠올려. 1-2유로짜리 맥주나 커피 따위를 시켜놓고 하루 종일 날씨 얘기나 하면서 깔깔대고 웃던 그 시절의 우리들에 대해.

“평생 끌어안고 가야 할 나쁜 기억 한두 개쯤 없는 사람이 세상에 어디 있겠니.” 

11년의 시간을 단숨에 지나 조금 더 나이 든 올리브를 만나는 행운이라니. 무뚝뚝하고 속을 통 모르겠던 일흔의 올리브는 가끔씩 위로의 말도 툭 건넬 줄 아는 여든의 노인이 되어 있네. 상실 뒤에 찾아온 잭과의 사랑에 어쩔 줄을 모르고, 새 가족, 새 친구들과의 관계에서 여전히 애를 먹는 올리브. 자가운전이 가능한 올리브가 이저벨의 노인용 기저귀를 대신 사다 주는 장면에선 10년째 묵혀둔 장롱면허를 이제라도 꺼내야 하나, 진지하게 고민이 되더라.

너와 편지로 이런저런 이야길 나누다 보니, 나는 비로소 이 두 권의 책을 완독한 기분이 든다. 이런 게 올리브가 말한 ‘작은 기쁨’이겠지. 시답지 않은 농을 던지거나, 투박한 말이라도 주문처럼 외우면서 고단한 하루를 같이 견디는 것. 가끔은 좋았던 시절들을 초콜릿처럼 꺼내 먹으면서. 잘 지내는지 서로의 방문을 열어보면서. 그 햇빛의 약속을 기억하면서.

다운아, 너는 퉁명스러운 할머니가 될 순 없을 거야. 보통은 다정하지만 가끔은 퉁명스러운 할머니라면 몰라도. 좀 성깔 있는 할머니면 또 어때. 지팡이를 짚고 몸을 일으켜야 하는 날이 오더라도, 여전히 불편한 감정들이 작은 파도처럼 출렁이더라도, 그때도 우리 아무 말이나 하면서 맛있는 저녁을 먹으러 가자.

바르셀로나든, 제주든, 또 다른 낯선 도시든, 그곳이 어디라도.

완연한 봄을 기다리며
바르셀로나에서, 이나.

다시, 이나에게

종종 내 삶이 시시하게 느껴질 때가 있어. 해질 무렵이면 하루가 또 허무하게 흩어진 것 같은 기분에 빠질 때가 많아. 하지만 이나야, 이 세상에 시시한 삶이란 건 없을지도 모르겠어. 《올리브 키터리지》와 《다시, 올리브》를 연달아 읽으면서 가장 크게 느낀 감정은 ‘안심’이었어. 각자 다양한 상처를 가진 크로스비 마을 사람들이 끝끝내 자기 삶을 살아내고 있는 모습이 나를 위로했어. 사랑하기보다 헤어지고, 태어나기보다 죽고, 함께 하기보다 혼자 있는, 이 고독하고 쓸쓸한 이야기의 가장 놀라운 점은 책을 덮고 자리에서 일어나면 오늘 주어진 내 삶을 잘 살고 싶어진다는 거야.

너랑 이렇게 편지로 이야기하는 것 참 좋다. 《올리브 키터리지》를 읽고, 그리고 너랑 편지를 주고받으면서 나는 내 삶을 조금 더 사랑하게 된 것 같아. 고마워. 항상.

너의 모든 일이 ‘물고기가 헤엄치듯 순조롭기를’
제주에서, 다운.

Book — 《올리브 키터리지》와 《다시, 올리브》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의 소설 《올리브 키터리지》는 2009년 퓰리처상 수상작으로, 학교에서 수학을 가르치다 정년퇴임한 올리브 키터리지를 중심으로 크로스비 마을 사람들의 이야기를 열세 편의 단편으로 풀어낸 연작 소설이다. 올리브는 모든 단편에 크고 작은 비중으로 등장하며 존재감을 보여준다. 《올리브 키터리지》의 후속작 《다시, 올리브》는 2020년에 출간되었다. 역시 열세 편의 단편으로 이루어진 이야기 속에서 70대였던 올리브는 11년의 시간을 지나 80대가 되어 있다. 그리고 크로스비 마을 사람들의 이야기 또한 계속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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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정다운, 박이나

사진 Giuseppe Solfrizz