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뜻밖의 다정함]

초당옥수수와 딱딱이 복숭아

종종 생각한다. 제철 과일을 계절마다 챙겨 먹으며 살 수 있다면 그게 바로 성공한 인생 아닐까. 때마다 갓 수확한 신선한 과일을 아끼는 주변 사람들에게 선물하고, 소중한 이웃들과 나누어 먹는다면, 그야말로 좋은 인생 아닐까. 소박해 보이지만 어려운 일이다. 마음에 여유가 있어 계절을 지나치지 않을 수 있어야 하고, 나눌 만큼 주머니 사정이 넉넉해야 하며, 무엇보다 곁에 사람이 있어야 한다.

초당옥수수

제주도의 여름을 여는 건 초당옥수수. 초당옥수수 시즌은 여름보다 조금 일찍 시작되어 한여름이 오기 전 끝난다. 마치 귤과 같다. 많은 사람이 겨울 대표 과일로 귤을 떠올리지만 가장 보통의 귤인 노지 감귤(비닐하우스가 아닌 땅에서 자란 감귤)은 가을과 겨울 사이 수확이 시작되고 첫눈이 내리면 끝난다. 눈을 맞으면 귤 맛이 싱거워지기 때문에 서귀포에서 귤 농사를 지으시는 부모님은 늘 첫눈이 늦게 내리기를 바라신다.

마찬가지로 초당옥수수도 본격 여름으로 들어서는 7월 중순이면 시즌이 끝난다. 귤과 초당옥수수는 계절보다 먼저 도착하는 제철 과일인 셈이다. 초당옥수수는 어엿한 옥수수니까 과일보다는 채소나 곡식에 가깝지만, 사실 달콤한 초당옥수수를 맛보면 아무래도 채소보다는 과일에 가깝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저장하면 단맛이 사라져, 오래 두고 먹기 어려운 음식이라서 그런가, 초당옥수수 시즌이 되면 마음이 조급해진다. 얼른 주문해서 빨리 많이 먹어야 한다. 

올해 첫 초당옥수수는 작년에 알아둔 농장에서 일찌감치 주문해두었다. 한 박스를 샀더니 한 박스를 더 보내주셔서 초당옥수수 마흔 개가 같은 날 도착했다. 우리 집에 옥수수를 좋아하는 사람은 나뿐이라, 받자마자 서둘러 주변 친구들과 나누었다. 마트나 시장에 가서 다섯 개쯤 사서 오늘내일 혼자 맛있게 잘 먹으면 될 텐데. 그렇지만 그보단 한 박스를 사서 나눠 먹는 게 더 재미있다. 옥수수를 쌓아두고 겉껍질을 벗기고 있으면, 여름이 온 것이 실감 난다. ‘올여름도 즐겁고 건강하게 잘 보내겠습니다.’ 스스로 다짐하는 의식이다.

신선한 초당옥수수를 나도 먹고 너도 먹고 모두 다 같이 풍족하게 먹고 싶은 욕심에 급기야 작년에는 마당 한쪽에 초당옥수수를 심었다. 모종은 성산읍 수산리에서 초당옥수수 농사를 짓는 농부에게 얻었다. 초당옥수수는 물만 먹으면 잘 자란다고 해서 아침저녁으로 열심히 물을 줬다. 하지만 농사는 완전히 실패했다. 모종을 수십 개나 심었지만 단 한 개의 옥수수도 얻지 못했다. 여름만 기다리라고 동네 친구들에게 큰소리 땅땅 쳤는데, 나눠 먹지 못했다. 까맣게 말라버린 옥수수를 볼 때마다 친구들과 옥수수 욕심쟁이의 최후라며 깔깔 웃었지만, 농부가 나눠준 모종의 꿈을 꺾은 것 같아 마음이 조금 쓰렸다. 허튼 짓을 했다는 생각에 올해는 옥수수를 심지 않았다.

실은 재작년에 주문한 초당옥수수가 모조리 썩어서 도착한 일이 있었다. 썩은 옥수수를 보자마자 너무 속이 상해서 항의했더니 배송상의 문제라고 하며 반품해 주겠다고 했다. 반품이란 물건을 돌려보내는 것이다. 택배 기사님이 올 때까지 곰팡이 냄새가 나는 썩은 옥수수를 가지고 있고 싶지 않다고 했더니 지금 당장 “아이를 둘러업고” 우리 집으로 옥수수를 가지러 오겠다고 했다. 밤 10시가 넘은 시간이었다. 농부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한 나쁜 소비자가 된 건가. 오지 말라고, 내가 알아서 처리하겠다고 이야기하며 마음이 들끓었다. 썩은 옥수수를 내 손으로 버렸다. 죄 없는 옥수수가 조금 미워졌다. 아무튼 그 일이 있고 나서 직접 옥수수를 길러보기로 결심했는데, 이번엔 내 손으로 옥수수를 썩혀 버리고 만 것이다. 종종 생각한다. 그 판매자는, 아니 농부는, 한 아이의 아버지는, 왜 그렇게 화가 났을까. 여전히 그는 옥수수를 재배하고, 판매하고 있을까? 저는 옥수수 농부의 꿈은 접었지만, 다행히도 여전히 부지런한 옥수수 소비자로 살고 있답니다.

앵두, 매실, 오디

집 마당에 앵두나무, 매실나무, 뽕나무, 감나무, 석류나무, 하귤나무가 있다. 나란히 있는 앵두나무와 매실나무는 봄이면 비슷한 듯 조금 다른 하얀 꽃을 피우고, 여름이면 순서대로 열매를 맺는다. 앵두는 새한테 뺏길세라 빨갛게 되자마자 바로 따서 먹고, 매실은 노랗게 익을 때까지 기다렸다가 천천히 따서 술을 담갔다. 뒤뜰의 뽕나무에 열린 열매가 오디라는 걸 알고는 춤을 추었다. 곧 감도 열리겠다. 겨울에 이사를 오는 바람에 마당에 있는 나무가 어떤 나무인지 처음엔 알지 못했다. 추측만 할 뿐이었다.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 과정을 지켜보고 나서야 자그마한 마당의 나무 대부분이 과실수라는 걸 알게 되었고 웃음이 났다. 25년 전에 이 집을 짓고 마당을 가꾸고 나무를 심은 사람은 나만큼 제철 과일을 좋아했구나. 석류나무 앞에 서서 25년 전의 사람과 하이파이브를 한다. 나무 한 그루에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이 열매가 달리고 수확할 수 있는 시기는 한정적이라 한 가족이 먹기엔 언제나 많다. 먹어도 먹어도 줄지 않는 과일을 친구들과 나눠 먹었다.

딱딱이 복숭아

아침에 경북 영천에서 복숭아 택배가 왔다. 복숭아 수확을 시작한다는 메시지를 받자마자 얼른 주문하긴 했지만 언제 올지 몰라 기다리고 있었는데, 생각보다 빨리 도착했다. 근래 가장 반가운 택배였다. 이 농장은 복숭아 중에 딱딱한 품종만 재배하는 귀한 곳이다. 작년에 주문해서 먹고 만족스러워 기억해 두었다. 나는 딱딱이 복숭아를 좋아하고, 애석하게도 ‘딱복’ 시즌은 물렁한 복숭아 시즌보다 더 짧다. 정신을 바짝 차리지 않으면 순식간에 지나가 버린다. 복숭아를 흐르는 물에 깨끗하게 씻었다. 그리고 복숭아 가운데를 가로로 둥글게 돌리며 한번 세로로 둥글게 두 번 교차하며 칼집을 낸다. 그다음 복숭아의 위아래를 양손으로 잡고 힘주어 비틀면 여덟 조각으로 쪼개진다. 딱딱이 복숭아를 먹는 즐거움은 바로 이 작업에서부터 시작된다. 평소 칼질을 잘하지 못하는 나도 칼질 세 번이면 손쉽게 복숭아를 먹기 좋게 자를 수 있고, 이 작은 성취감이 매번 기분을 조금 좋게 만든다. 아삭하고 달콤한 복숭아를 껍질째 한 입 베어 먹으며 생각했다. 올여름 첫 복숭아로구나. 본격적인 여름이구나. 이 짧은 여름이 가기 전에 복숭아를 더 많이 부지런히 먹어야지. 올해는 마음의 여유가 없어서 사람들에게 복숭아를 보내는 건 어려울 것 같다. 그래도 오늘 받은 복숭아는 동네 친구들에게 두세 개씩 나눠줘야지. 맛있을 때 함께 먹는 게 가장 좋으니까. 메시지를 보낸다. “딱딱이 복숭아 왔어. 지나는 길에 우리 집에 잠깐 들러.” 복숭아를 받은 친구에게 며칠 후 메시지가 왔다. “물렁한 복숭아 샀는데 맛있어. 나누어 먹자.” 얼마 전에는 서귀포 부모님 집 마당에서 수확한 블루베리를 얻어다 동네 친구들과 나눠먹었다. 곧 무화과도 익을 것이다. 시장에서 사거나 농장에 따로 주문하지 않아도, 여름이면 집 안에 블루베리와 무화과가 풍족하다. 나눠 먹고도 남은 블루베리는 얼리고 무화과는 말린다. 작년에 말려둔 무화과가 아직도 냉동실에 조금 남아 있다. 샐러드나 요거트와 함께 먹으면 여전히 맛이 좋다.

귤

농장에서 주문한 초당옥수수와 복숭아, 마당에서 수확한 각종 과일을 나눠 먹다 보면 뜨거운 여름이 금세 지나간다. 나무가 많은 제주도 산골 마을에 살면서 가장 좋은 건 계절을 가까이 느낄 수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매년 실감한다. 계절은 짧다. 꽃은 피는 듯하다 금방 지고, 단풍은 바람 한 번에 떨어진다. 눈도 금방 녹는다. 바다에 들어갈 수 있는 여름은 특히 짧다. 그 여름의 시작에 잠깐 머무는 초당옥수수에 관해 쓰려고 했다. 내가 얼마나 초당옥수수에 진심인지 강조하고, 제주에서는 마당 텃밭에서 옥수수를 기른다고 자랑도 하려고 했다. 마침 딱딱이 복숭아 택배가 오는 바람에 반가워 복숭아 이야기를 하다가, 좋아하는 여름 과일 이야기를 줄줄 해버리고 말았다. 그러고 보니 여름 대표 과일 수박과 참외를 빼놓았다. 성인이 되고 독립해서 내 살림을 꾸리기 시작한 뒤로는 수박과 참외보다는 복숭아와 자두, 블루베리와 무화과가 좋다. 먹고 나면 오직 씨만 남는 과일이야말로 여름답지 않은가요. 찰나의 가을이 지나면 곧 귤의 계절이 올 것이다. 전국의 친구들에게 귤을 보내는 겨울이 시작되면 부자가 된 것 같은 기분이 든다. 25년 전 이 집에 살던 이의 지금 주소를 안다면 귤을 한 박스 보내고 싶다. 25년 전에 보내신 선물 잘 받았습니다. 지난여름 앵두도 매실도 오디도 석류도 잘 먹었습니다. 감사합니다. 하여간 나눠 먹는 일이 제일 좋다.

AROUND 온라인 구독

어라운드의 모든 콘텐츠를 무제한으로 읽어보세요.

구독 시작하기

글·사진 정다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