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뜻밖의 다정함]

추억과 기억

대구에 가본 적 없는 내가 대구 이야기를 써야 한다고 하니 반려자가 대구 요리 이야기를 쓰라며 농을 던진다. 그거참 좋은 생각이네? 대구뽈찜이 대구 지방 음식인 줄 알았던 때도 있었지. 이 글은 이런 식의 연상 작용을 따라서 썼다. 대구뽈찜에서 시작된 이야기는 어떻게 끝이 날까?

동대구역의 추억

시시껄렁한 농담으로 시작했지만, 나에게도 대구와 얽힌 추억이 있다. 하지만 한 번도 대구에 발을 디딘 적은 없다. 가본 적 없는 대구의 추억을 이야기해 볼까? 서울에서 태어나서 자라다 내가 다섯 살, 동생이 두 살이 되었을 때 우리 가족은 부산으로 이사를 했다. 아빠 직장 때문이었다. 그리고 명절 때마다 가족 구성원 모두의 고향인 서울에 갔다. 부산역에서 서울역까지는 새마을호를 타고 4시간 10분 정도 걸렸고, 열차는 동대구역과 대전역에 정차했다. 정차 시간은 약 5분 남짓. 

열차가 동대구역에 멈추면 아빠는 플랫폼에서 파는 우동을 사기 위해서 열차에서 내렸다. 그 5분이 얼마나 빠르게 흐르던지, 어린이 인생에서 가장 짧고 강력한 5분이었다. 아직 아빠는 돌아오지 않았는데, 열차는 문을 닫고 슬금슬금 출발했다. 항상 그랬다. 우리는 의자에 앉아 있지 못하고 엉덩이를 들썩거리며 고개를 쭉 빼고 문 쪽을 바라봤다. 열차가 속도를 내기 시작할 무렵 저쪽 문에서 아빠가 양손에 우동 두 그릇을 들고 나타났다. 우리는 박수를 쳤다. 우동 맛은 잘 기억나지 않는다. 그렇지만, 우동 국물이 여전히 따뜻했던 감각은 어렴풋이 남아 있다. 아빠랑 내가 28살 차이니까, 내가 10살 무렵 아빠는 38살이었다. 

이 글을 쓰다가 아빠가 평소에 우동 드시는 모습을 본 적이 없다는 걸 깨달았다. 항상 우동보다는 라면을 좋아하셨다. 그중에서도 햄이며 야채 같은 것들을 잔뜩 넣고 얼큰하게 푹 끓인 신라면. 나도 우동을 그렇게 좋아하지 않는다. 그런데 아빠는 왜, 매번 기차를 탈 때면 동대구역에 내려 우동을 사 오셨을까? 지금 생각해 보면 그건 오로지 ‘재미’였다. 젊은 아빠는 작은 스릴이 즐거웠을 거고, 우리가 초조해하는 게 귀여웠고, 박수를 치며 반가워하는 모습이 재미있었을 거다. 동대구역에서는 여전히 우동을 팔고 있을까? 우리 가족이 다시 경부선 열차를 탄다면, 우리 중 누가 우동을 사 올까? 아마 여전히 아빠일 것 같다.

구구의 위로

우동을 다 먹고 나면, 간식 카트에서 귤을 사서 까먹었다. 귤 다섯 개가 플라스틱 그물망에 줄줄이 담겨 있었다. 귤을 까먹으며 ‘구구 아저씨’가 오길 기다렸다. 구구는 간식 카트에서 팔지 않고 구구 아저씨가 오직 구구만 들고 다니면서 팔았다. 우리는 혹시 딴짓하다가 구구 아저씨가 지나가는 걸 놓칠까 봐 늘 촉각을 곤두세우고 기다렸다. ‘구구99’는 마치 단팥빵처럼 동그랗고 납작하게 생긴 아이스크림이다. 겉에 초코가 코팅되어 있고, 속엔 아몬드가 몇 개 들어 있다. 아몬드가 든 부분을 남겨두었다가 마지막에 먹는 걸 좋아했다.

어린이였던 나와 동생은 서울 가는 길이 마치 소풍 길처럼 즐거웠지만, 서울에는 호랑이 같은 친할머니가 기다리고 있었다. 엄마는 고향으로 향하는 그 기차 안에서 즐겁지만은 않았겠지. 그렇다면 아빠도 마냥 신나진 않았을 거다. 무거운 분위기를 깰 수 있는 건 우동과 귤과 구구였다. 평소에 아이스크림을 즐겨 먹지 않고, 우리에게도 잘 사주지 않으셨던 엄마도 기차에선 꼭 구구 하나를 다 드셨다. 지금도 동그란 구구를 마트에서 발견하면 꼭 산다. 껍질을 까고, 그 껍질로 구구 한 구석을 잘 잡고 한입 베어 먹으면 새마을호 안에 있는 것 같다. 열차가 서울에 진입하면 슬슬 우린 창가에 붙어 섰다. 이제 한강이 보이고 반짝이는 금빛 63빌딩이 등장할 거다. 63빌딩이다! 외치며 신나 하는 우리 뒤에서 엄마는 한숨을 쉬고 계셨겠지. 그렇게 도착한 친가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잘 기억이 안 난다. 엄마는 명절 내내 두통에 시달렸고, 자주 화장실에서 구토를 하셨다. 

친가 일이 끝나고 외가에 가면 엄마는 우리와 가방을 집에 던져두고 바로 옷을 갈아입고 외출을 했고 아주 늦게 귀가했다. 엄마도 아빠도 오랜만에 찾은 고향에서 각자의 친구들을 만나는 시간. 비로소 진짜 명절의 시작이었다. 우리는 부모님이 없는 외가에서 친척과 사촌들의 눈치를 보며 조용히 빈둥빈둥 시간을 보냈다. 참 이상하지. 외가에서 구체적으로 무엇을 하며 시간을 보냈는지는 하나도 기억나지 않는데, 서울로 향하던 기차 안 일들은 이토록 생생하다.

보이지 않아도

내가 다니던 부산의 고등학교는 높은 언덕 위에 있었고 창문으로 멀리 바다가 보였다. 그래서 우리는 창가 자리에 앉는 걸 좋아했다. 10시까지 야간자율학습을 했기 때문에 노을도 매일 볼 수 있었다. 비록 서쪽 바다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해는 바다와 하늘을 물들이며 졌다. 그 모습을 오래 기억하고 싶어서 종종 그 풍경을 그림이나 글로 남겨두기도 했다. 그때부터였던 것 같다. 커튼을 내리고 문을 닫고 실내에 있더라도 나는 바다가 어느 방향에 있는지 직감적으로 안다. 늘 저만치 바다를 두고 살던 사람의 버릇. 서울로 이사를 왔고, 서울에선 바다가 보이지 않았다. 대신 한강과 한강 줄기 천들로 시선이 갔다. 이 강의 끝엔 바다가 있겠지. 지하철 2호선이 당산철교를 지나 한강을 건널 때면 늘 부산을 떠올렸다. 

얼마 전, 이제 학교 창문으로 바다가 보이지 않는다는 소식을 우연히 들었다. 그럴 수가 있나? 바다가 어디 갈 리는 없고, 학교 건물도 예전 그대로인데. 대체 왜? 왈칵 눈물이 날 만큼 당황했다. 바다 바로 앞에 초고층 건물이 많이 들어서서 바다를 가린단다. 바다가 보이지 않는 우리 학교는 여전히 우리 학교일까. 얼마 전 엄마에게 전화가 왔다. 울먹이는 목소리였다. “○○ 이모가 인지 기능 저하래.” 요즘 계속 연락이 되지 않아서 걱정하며 수소문하던 중에 소식을 들었다고 했다. ○○ 이모는 부산에 살고 있다. 우리 가족은 IMF 때 부산을 떠나 다시 서울로 이사를 했다. 아빠가 다니던 회사가 순식간에 문을 닫은 탓이었다. 그렇게 도망치듯 부산을 떠난 지 오래되었다. 그동안에도 엄마는 부산에서 친하게 지낸 친구들과 계속 연락을 해왔다. 성인이 된 후에도 이모들을 종종 만났다. 호쾌한 성격의 ○○ 이모는 아주 멋쟁이였다. 가끔 어떤 이모는 내 친구 같기도 한데, 그 이모가 그랬다. 엄마는 여전히 눈물이 섞인 목소리로 덧붙였다. “무슨 일이 있으면 가장 먼저 연락하고 싶은 친구였어. 내가 가장 의지했는데….” 엄마는 그 소식을 들은 후에도 가끔 이모에게 문자를 보낸다고 한다. 하지만 읽지도 않고 답장도 없다. 어떤 날은 1이 사라지고 읽은 표시가 뜬다는데, 여전히 답은 없다고 한다. 이모는 엄마를 잊은 걸까. 영영 그렇게 잊힐까. 엄마는 잠이 오지 않는다고 했다. 

가족이 치매에 걸리는 일에 대해서는 종종 생각해 보곤 했다. 외할머니가 치매를 오래 앓았다. 평생 다정하고 부지런하고 친절했던 할아버지는 할머니 간병을 전담했다. 그리고 어느 날, 할머니보다 먼저 세상을 떠나셨다. 갑자기. 정말 갑자기. 할아버지가 떠나고 외가 식구들은 말수가 줄었다. 어린 시절에 가까이 살지 않아서 할머니랑 사이가 가깝지 않았는데, 돌아가시기 얼마 전에 내 손을 한참 잡고 계셨던 기억이 난다. 많은 말을 나누진 않았지만,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꽉 잡은 손이 따뜻했다. 치매였던 데다가 다리를 다쳐 걷지 못하셔서 외가 가족들이 함께 고생을 길게 했다. 지금 남은 가족들은 힘차게 행복하게 잘 살고 있다. 그 과정을 멀찍이 지켜보면서 가족이 치매에 걸리는 건 악몽 같다고 쉽게 생각해 버렸던 것 같다. 대체로 미디어의 영향이겠지. 그런데, 가장 가까운 친구가 치매에 걸리는 일이, 어떤 기분인지에 대해서는 한 번도 생각해 보지 않았다. 엄마는 왜 ‘치매’라는 말 대신 ‘인지 기능 저하’라는 말을 골랐을까. 잠들지 못하는 밤 엄마는 무슨 생각을 하고 계실까.

추억과 기억

서귀포시 안덕면의 ‘포도뮤지엄’에서는 〈어쩌면 아름다운 날들〉 전시를 하고 있다. “초고령사회로 빠르게 진입하는 오늘날, 노년의 삶을 대하는 우리의 시선에 온기를 더하고 세대 간의 공감을 모색하고자 마련했습니다.” 기억과 노화에 대해 오래 생각하게 해주는 좋은 전시라 벌써 세 번째 관람을 했다. 지난 두 번은 그저 좋다 정도의 감상이었는데, ○○ 이모 소식을 듣고 다시 보니 전시가 다르게 읽혔다. 조각조각 난 그림, 띄엄띄엄 놓인 물건, 계절에 따라 변하는 나무, 눈을 감고 그리는 사랑하는 사람의 얼굴… 그 사이에 삶이 있었다. 파편처럼 흩어졌지만, 기억의 흔적은 여전하고 삶은 여전히 존재한다.

그날 집에 돌아와 욘 포세 소설 《아침 그리고 저녁》을 읽었다. 의도한 건 아니었다. 마치 시처럼 음악처럼 흘러가는 물처럼 읽힌다. 그 흐름 곁에 내 삶이 놓여 있다. 멀리서 흘러가는 물과 삶을 바라본다. 반짝이는 윤슬 같다. 어쩌면, 아름다운 날들. 아침보다 저녁에, 태어남보다 죽음에 공감하고 골똘하게 되는 요즈음이다. 기억이 사라지면 나는 나일까, 하는 생각이 하나 더 얹어진다. 학교 창문에선 더 이상 바다가 보이지 않지만 거기엔 분명 바다가 있다. 지금 학교를 다니는 학생들은 본 적이 없을 수도 있겠지만, 나는 봤다. 나는 기억한다. 그건 거기 있었다. ○○ 이모도, 동대구역의 우동 가게도 다 존재했다.

〈어쩌면 아름다운 날들〉 전시는, 나란히 앉아 노을 지는 창밖을 바라보던 여고 동창과 함께 봤다. 바다와 하늘은 매일 아름답다는 걸, 팍팍하던 고3 시절에도 충분히 알고 있던 다정다감한 내 친구. 전시를 보고 나와 뮤지엄 1층 카페에 마주 앉아서, 우리가 만나지 않은 동안 있었던 일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주로 병원과 관련된 이야기였다. 이런 검사를 받았고, 지금은 괜찮아졌다는 이야기. 서로 근처 병원을 소개해 주며 우리는 씩씩하게 헤어졌다. 이제 우리 학교에서 바다가 보이지 않는다는 이야기는 끝내 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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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사진 정다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