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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첫 점프슈트
정확히 세어보진 않았지만 옷장에 점프슈트가 아마도 열다섯 벌은 족히 있을 거다. 옷이 많은 편이 아니라는 걸 감안하면 정말 많은 편이다. 이제는 점프슈트 마니아라고 자부할 수 있는 나의 점프슈트 역사는 1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내가 10년이나 꾸준히 좋아한 게 점프슈트 말고 또 있을까?
여행 가방 하나를 들고 바르셀로나에 갔다. 2년 정도 살 계획이었다. 꼭 필요한 소지품, 책 몇 권 그리고 고춧가루 등 당장 필요한 식재료를 넣었더니 가방 하나가 금세 꽉 찼다. 이불이며 옷 등은 바르셀로나에 가서 사기로 했다. 들고 간 가방이 작기도 했지만, 그 나라에서 입을 옷은 그곳에서 사는 편이 대체로 좋다. 여행으로 갈 때도 그렇다. 나라마다 기후가 다르고, 옷 입는 스타일이나 유행이 다르기 때문에 한국에서 챙겨 간 옷을 입으면 나와 배경이 동떨어진 기분이 들 때가 많다. 국적도 쉽게 들킨다. 낯선 곳에서 옷차림만 보고 한국인임이 드러나는 건 재미없는 일이다.
옷뿐만이 아니다. 현지인들이 사는 집과 비슷한 곳에 묵고, 그들이 먹는 음식을 먹고, 그들처럼 입고 거리를 걸으면, 그때 비로소 이 지역에 사는 사람들도 보인다. 여행지가 아닌 삶의 터전으로 보일 때, 배경과 내가 적당히 어우러질 때 비로소 내가 원하는 여행이 시작되곤 한다. 하물며 사는 건 더 그렇다. 바르셀로나에 도착해 오래된 스페인식 아파트를 얻어 짐을 풀었고, 동네 시장에서 장을 봐 음식을 해 먹었다. 집 근처 골목이 조금 익숙해졌다. 내 얼굴을 알아보는 사람들이 생겼다. 그러니 이제 옷만 스페인 사람들처럼 입으면 된다. 스페인에 도착한 건 5월이었고, 이미 바르셀로나에는 여름이 와 있었다. 스페인 사람들은 여름이면 민소매 셔츠에 짧은 반바지를 입고 거리를 활보한다. 남녀노소 모두 그렇다. 그렇다면 나도 그들처럼 입어볼까 하며 옷가게에 들어갔다. 하지만 옷에 눈길이 갈 때마다 나도 모르게 ‘한국에서도 이 옷을 입을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결국 가게를 나오며 내 손에 들린 건 평범한 원피스였다. 옷장에는 결국 반팔 원피스, 긴팔 원피스, 청원피스가 쌓였다. 구입처가 바르셀로나라는 것만 빼면 한국에서 입던 옷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아무튼 스페인에서 산 옷이니, 현지인 다 되었다고 대충 결론지으며 살았다.
스페인에서 함께 지낸 친구 윤진이는 여름 내내 점프슈트를 입고 다녔다. 점프슈트를 일상복으로 입는 사람을 주변에서 처음 봤다. 입기도 불편하고 벗기도 불편하고, 화장실에선 대체 어떻게 하지. 낯설어서 그런가 불편한 점만 떠올랐다. 저런 역동적인 옷을 평소에 입고 다니는 사람도 있구나. 참으로 명랑한 윤진이 같으니라고. 그렇게 남 일처럼 여겼다. 아무튼 윤진이 덕분에 점프슈트라는 옷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걸 알게 되었다. 알게 되면 보이는 법.
어느 날 백화점에서 옅은 푸른색 진으로 만든 반팔 반바지 점프슈트를 보았다. 문득 ‘어, 나도 한번 입어 볼까.’ 하는 마음이 들었다. 재미 삼아 갈아입고 나왔는데, 어라, 나쁘지 않다. 원래 청바지와 청남방을 좋아하는 편이라, 위아래가 모두 청으로 이루어진 옷이 썩 잘 어울렸다. 다만 짧은 바지 길이가 조금 신경 쓰인다. 내 안의 한국인이 튀어나왔다. 점프슈트는 덩치 큰 내가 입기에 너무 튀는 옷 같아. 살 마음으로 입어본 건 아니었으니까 다시 옷걸이에 걸어두었다. 그런데 이상하지. 저녁에 집에 왔는데도 자꾸 그 옷이 떠올랐다. 하지만 내가 입을 만한 옷은 아니었으니까. 옷이란 건 입고 싶다고 다 입을 수는 없는 거라고 생각했으니까. 그 옷이 걸어오는 말을 무시했다. 그때 나에게 점프슈트를 입는 건 용기가 필요한 일이었다. 두어 달이 지나 여름 세일이 시작되었고, 그 옷이 50퍼센트 세일 가격을 붙인 채, 옷걸이에 걸려 있는 걸 봤다. 이건 인연이다 싶어 불쑥 사버렸다. 세일이 용기를 불어넣어 준 셈이다. 점프슈트를 들고 집에 돌아오는데 처음 오토바이에 타고, 처음 고수를 먹던 날과 비슷한 기분이 들었다. 말하자면 내 안에 있던 어느 가는 선을 넘어버린 것이다. 선을 넘기 전에는 존재하는지도 몰랐던 선. 그리고, 나는 그해 여름, 그 옷이 없었으면 대체 외출을 어떻게 했을까 싶을 만큼 줄곧 그 옷만 입었다.
점프슈트를 사던 시점과 비슷한 시기에 숏팬츠도 한 벌 샀다. 한참 살까 말까 고민하던 아주 짧은 길이의 청반바지. 입으면 허벅지가 모두 드러난다. 숏팬츠를 사는 데도 점프슈트를 사던 것과 비슷한 용기가 필요했다. 이걸 산다고 해서 입을 수 있을 것 같지 않았고, 혹 바르셀로나에서는 입는다 하더라도 한국으로 돌아가서 이걸 입게 될까 다시 생각하면, 그럴 수 없을 게 뻔했다. 그러다 어느 날, 70퍼센트 할인이 적용돼 만 원도 안 하는 숏팬츠를 발견했고, 샀다. 혹 한국에서 입지 못하더라도, 아니 스페인에서도 못 입더라도, 집에서만 입더라도, 추억으로 간직하더라도, 괜찮을 가격이라 부담 없이 구입했고, 그 팬츠를 나는, 점프슈트와 함께 여름 내내 입었다. 비로소 한국을 떠나 스페인이라는 곳에 사는 기분이 들었다. 문득, 내가 이 옷을 한국에서도 입을 수 있을까 생각하면 여전히 대답하기 어려웠지만, 뭐 어때 지금 여기에서 입고 싶은데. 그리고 스페인에 사는 동안 서너 벌의 점프슈트를 더 샀다.
숏팬츠는 여전히 옷장에 있다. 한국에선 한 번도 입지 못했는데, 버리려고 할 때마다 설레서 아직 버리지 못했다. 인생 처음으로 샀던 옅은 파란색 점프슈트는 지금도 입는다. 몇 년 후 같은 브랜드, 같은 디자인, 다른 컬러의 점프슈트를 발견하곤 추가 구매하기도 했다. 하도 입어 옷감이 부들부들해졌는데, 실은 그래서 더 좋다. 여름이 시작된 요즘 다시 나의 교복이 되었다. 이 옷을 입었을 때 내가 가장 나 같다.
직구 사이트나 좋아하는 의류 브랜드 홈페이지에 들어갈 때면 가장 먼저 점프슈트 카테고리를 클릭해 구경한다. 쇼핑몰에 점프슈트 카테고리가 있다고? 인터넷 쇼핑깨나 한다는 사람 중에도 놀라는 사람이 있을지 모른다. ‘아니, 점프슈트가 뭐지?’라고 묻는 사람도 분명 있을 것이다. 나 역시 첫 점프슈트를 만나기 전까지 내 세상에 점프슈트라는 종류의 옷은 존재하지 않았으니까.
점프슈트는 영어로 ‘Jumpsuit’라고 쓴다. 브랜드마다 다양한 명칭으로 불리는데 ‘오버올Overall’이라고 검색해야 하는 경우도 있으며, ‘올인원All-in-one’이라고 표현하는 곳도 있다. 반바지 점프슈트 ‘롬퍼Romper’로 분류한 곳도 있다. 간혹 ‘보일러슈트Boilersuit’라고 불리기도 한다. 스페인 사이트에서는 ‘모노Mono’라고 한다. 아무튼 상의와 하의가 붙어 있는 옷이다.
원피스를 입고 나가면 한껏 차려입은 걸로 착각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아는 사람은 알겠지만 사실 원피스는 세상에서 가장 편한 옷이다. 아랫도리와 윗도리를 어떻게 맞출지 고민하지 않고 한 벌만 골라 입으면 되며, 품이 넉넉한 원피스를 입으면 움직임도 무척 편안하다. 특히 스타킹을 신을 필요가 없는 여름엔 원피스 하나만 훌러덩 입으면 되니 이보다 편할 수가 없다. 바람도 위아래로 숭숭 통해 시원하다. 그런데 점프슈트는 바로 그 장점을 모두 가지고 있으면서, 바지다! 얼마나 편한지. 원피스를 자주 입는 사람이라면 점프슈트도 좋아할 가능성이 높다.
알려진 바로 점프슈트가 처음 만들어진 건, 낙하산에서 뛰어내릴 때 입기 위한 용도였다고 한다. 그래서 이름에 뛴다는 뜻의 ‘Jump’가 들어간 것이다! 높은 고도의 추위로부터 몸을 보호하고, 낙하산의 중요한 작동을 방해하지 않도록 특수한 목적으로 만들어진 옷이라고 한다. 그러다 미군 전투복으로 쓰이고, 비행기 정비사나 청소부가 입는 등 점차 활용 폭이 넓어지면서 주로 야외 작업복으로 많이 입었다. 카레이서들이 자동차 사고로부터 몸을 보호하기 위해서 입기도 하고, 관리의 간편함 때문에 죄수복으로도 입는다. 잘 알다시피 우주복도 점프슈트다. 신생아들에게도 점프슈트를 많이 입힌다. 페인트공인 내 친구도 작업복으로 점프슈트를 선호한다. 확실히 편한 활동을 돕는, 기능적인 옷이다.
알고 지내는 목수는 목공 일을 할 때 반드시 점프슈트를 입는다. 허리춤에 연장통을 걸고 일을 하는데, 바지를 입으면 연장통 무게 때문에 자꾸 바지가 흘러내려 신경 쓰인단다. 하지만 점프슈트를 입으면 그럴 일이 없어 정말 편하다고 했다. 게다가 사이즈가 큰 점프슈트는, 입고 있는 옷 위에 그대로 덧입을 수 있어서, 일을 마치고 점프슈트만 벗으면 바로 다른 약속에 갈 수도 있어 좋다고 한다. 점프슈트 예찬을 듣다가 나는 목수와 하이파이브를 할 뻔했다. 사실 내 주변에 점프슈트를 입는 사람은 거의 없고, 나는 점프슈트를 입고 다니는 사람과는 언제든 하이파이브를 할 준비가 되어 있다.
음, 나는 물론 점프슈트가 편해서 입기도 하지만 한편으론 ‘멋있어서’ 입는다. 대체로 트레이닝복 같은 스타일의 점프슈트를 입지만 몸에 착 붙는 걸로 골라 입는 날도 있다. 정장 스타일 점프슈트도 있고, 등 부분이 훌쩍 파지고 다리 면적의 대부분이 드러나는 짧은 길이의 점프슈트도 한 벌 가지고 있다. 저마다 다른 멋이 있다.
실은 지금도 여전히 점프슈트를 꺼내 입을 때마다 0.1초 정도 고민한다. 이거 입어도 되나? 하지만 그때마다 점프슈트를 처음 사던 날의 용기를 떠올린다. 점프슈트를 입을 때마다 나는 조금 더 용감한 ‘나’가 된다. 그래서 점프슈트를 입고 거리를 걷는 내가 좋다. 옷 한 벌 챙겨 입는 것만으로도 내가 좋아진다니. 그렇다면 매일 입어도 되는 거 아닌가. 계절마다 한 벌씩 새로 사도 괜찮지 않을까.
만일 어느 날 옷이 날개가 되고, 그 날개로 날게 된다면 그 옷은 점프슈트가 될 것이 분명하다. 나는 그렇게 믿는다. 그러니 할머니가 되어도 점프슈트를 입어야지. 점프슈트가 나를 날게 해줄 테니까. 옷을 입고 날아야지. 최초에 하늘을 날기 위해 만들어진 옷, 점프슈트를 입고 나도 언제까지나 자유롭게.
글·사진 정다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