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뜻밖의 다정함]

제주 사는 재미

어촌이자 농촌이자 산촌인 제주에서 사는 재미에 대해 얘기해 줄까요?

농촌 제주

제주에 산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해안 도로를 달리다 가벼운 접촉 사고가 난 적이 있다. 트럭이 중앙선을 침범해 우리 차와 부딪혔다. 다행히 블랙박스가 작동하고 있어서 상대 측 과실 100퍼센트가 입증되었다. 합의를 위해 경찰서에서 만난 상대는 트럭에서 감자 한 박스를 가져오더니 우리 차 트렁크로 옮겨주었다. 박스에는 ‘구좌 감자’라고 써 있었다. 무뚝뚝한 농부라 딱히 무슨 말을 더 얹진 않았지만, 미안하다는 의미였던 것 같다. 갑작스러운 사고로 놀란 마음이 조금 누그러졌다. 감자 한 박스를 볶아 먹고 부쳐 먹고 쪄 먹는 동안 우리가 제주도로 이사 왔다는 게 실감이 났다. 불쾌했던 사고가 재미있는 에피소드가 되었다. 이런 비슷한 일은 그 후로도 종종 있었다.

최근 취재 때문에 한 삼춘(제주에서 웃어른을 부르는 말)을 만나서 인터뷰를 했다. 올겨울 당근 파치를 한 번도 줍지 못했단 얘기를 했더니 인터뷰가 끝나자마자 자신의 당근밭으로 나를 데려갔다. 그리고 내 차 트렁크에 유기농 당근 한 박스를 실어주셨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인터뷰를 잘했는지 여부를 떠나 이 정도면 성공적인 취재였다는 생각이 들어 실실 웃음이 나왔다. 그날 저녁 바로 신선한 당근을 채 썰어 식초와 후추 등만 간단히 뿌려 당근 라페를 해 먹었다.

사실 제주 동쪽에 살다 보면 겨울철에 당근과 무를 마트나 시장에서 사 먹을 일이 별로 없다. 구좌읍 부근을 지나다 보면 수확이 끝난 밭에 농작물이 나뒹굴고 있는 모습을 흔하게 본다. 수확이 완전히 끝난 밭에선 남아 있는 농작물인 파치를 주워도 대체로 문제가 없다. 작년에는 운이 좋게도 수확을 방금 마친 밭을 만나, 차를 세우고 쭈뼛거리고 있자니 밭 주인이 어서 와서 파치 가져가라고 손짓을 한 적도 있었다. 두 박스 가득 주워 겨우내 당근 주스를 한없이 짜서 마셨다. 무도 마찬가지. 커다란 무 하나만 주우면 며칠 식탁은 걱정이 없다. 처음엔 욕심이 나서 서너 개 줍기도 했지만, 이제는 딱 하나만 줍는다. 하나면 충분하다. 겨울 동안 차 트렁크에는 장갑과 박스가 상비되어 있다. 언제 파치가 있는 밭을 만날지 모르니 언제든 주울 준비가 되어야 한다.

여름 한철 해수욕장 앞에서 음료수 가게를 운영한 적이 있다. 아이스커피, 에이드, 모히토 같은 시원한 음료수를 테이크아웃으로 팔았다. 모히토를 만들려면 애플민트가 필요하다. 당연히 마트에서 사려고 했는데, 놀랍게도 단 한 번도 애플민트를 산 적이 없다. 마을 사람들이 마당의 민트를 뿌리째 뽑아서 가져다줬다. 신선한 애플민트를 머들러로 찧어 만든 모히토는 정말 맛있었다.

감자, 당근, 애플민트가 저절로 생기는 섬에서 또 하나 저절로 생겨나는 건 단연 귤이다. 이번엔 내가 나눌 차례. 부모님이 서귀포에서 귤 농장을 하셔서 겨울이면 언제나 귤이 넘친다. 트렁크 가득 귤을 채워 집으로 돌아오는 길, 동네 친구들 집에 들러 귤을 나눈다. 그뿐 아니라 서울에 갈 일이 있을 때면 잊지 않고 가방에 귤을 넣어 간다. 그리고 만나는 사람들에게 귤을 건넨다. 비행기 옆자리에 앉은 어린이나 택시 기사님께 한두 개 드리기도 한다. “제가 방금 제주도에서 왔거든요. 저희 밭 귤이에요.” 하며 귤을 건네면 기사님들 얼굴이 순식간에 환해진다. 서울에 갈 때 빵빵하던 가방이 제주로 돌아오는 길 홀쭉해져 있는 게 좋다. 

한번은 서울의 병원에서 검사를 할 일이 있었다. 검사 시간이 밀려 마지막 비행기를 놓칠 것 같았다. 직원에게 가서 사정을 말하며 오늘 늦지 않게 검사를 했으면 한다고 말했더니, 동생이 제주에 살고 있어 이해한다며 순서를 조금 조정해 주었다. 다행히 가방에 귤이 있었고, 검사를 무사히 끝내고 나오면서 직원에게 귤을 건넸다. 웃을 일이 많지 않은 병원에서 우리는 서로 마주 보고 잠시 웃었다. 흔하디흔한 귤 몇 알이 해낸 일이다.

어촌 제주

5월 말부터 6월 중순까지 제주는 성게 철이다. 5월이 되면 벌써 심장이 두근거린다. 올해는 성게를 구할 수 있을까! 성게는 주로 해녀 작업장에서 해녀 삼춘들에게 직접 구매한다. 쉬운 일은 아니다. 고도의 눈치와 인내심 그리고 정보력이 필요하다. 일단 성게 작업을 하는 날을 알아야 한다. 이 시즌에는 우뭇가사리 작업을 하는 날이 더 많아서 성게 작업을 할 확률이 높지 않다. 오늘 성게 작업을 한다는 걸 알게 되면, 구매할 타이밍을 노려야 한다. 성게 물질이 끝난 뒤, 해녀들은 모여 성게 알을 깐다. 이 작업이 모두 끝날 즈음 해녀 작업장으로 가서 대장 삼춘을 찾아야 한다. 대장 삼춘이 누군지 알아차리는 건 순전히 눈치다. 그리고 용기 내 말을 건넨다. “삼추운– 성게 살 수 있어요?” 굳이 지나가는 사람한테 성게를 팔 필요가 없는 삼춘들은 바쁜 와중에 사겠다고 찾아오는 사람을 오히려 귀찮아하기 때문에 최대한 공손하고 친근하게 다가가야 한다.

하지만 일단 성게 구매에 성공하면 이 모든 과정이 하나도 수고롭지 않게 느껴진다. 챙겨 간 커다란 통에 성게 1킬로를 담아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는 마치 사냥에 성공한 사냥꾼 같은 기분이 든다. 성게는 감자나 당근, 귤처럼 트렁크에 싣는 게 아니라 옆자리에 태운다. 혹시나 상할까 에어컨도 제일 세게 튼다. 옆자리를 볼 때마다 웃음이 난다.

성게를 산 날 저녁은 무조건 성게 비빔밥이다. 흰 밥을 새로 한 다음, 갓 지은 밥 위에 성게를 한 국자 크게 얹고 김과 참기름, 깨를 뿌리면 끝이다. 다른 반찬도 필요 없다. 쓰다가 침이 입안에 고였다…. 아끼지 않고 넉넉하게 먹고 남은 성게는 조금 덜어 다음 날 성게 파스타를 위해 냉장고에 넣고, 나머지는 소분해서 얼린다. 미역국을 끓일 때 넣을 계획이다.

사실 작년에는 성게를 사지 못했다. 눈치작전에 한 번 실패하고 나서 의기소침해졌고, 무엇보다 가격이 너무 많이 올라서 머뭇거리다 보니 성게 철이 지나갔다. 올해는 꼭 사야지. 오늘부터 하루에 천 원씩 성게를 위한 저축을 해야겠다. 그리고 바닷가 근처에 갈 일이 있을 때면 잊지 않고 현금을 챙겨 가야지.

산촌 제주

제주에 봄이 한창인 4월부터 5월까지 중산간을 지나다 보면 커다란 보따리를 짊어지고 허리를 숙인 채 들판을 천천히 걷는 사람들을 자주 만나게 된다. 유명한 관광지가 아닌 평범한 목초지 입구에 차들이 줄지어 주차해 있는 풍경도 흔하다. 일명 ‘고사리꾼’들이다. 먹고살기 힘든 시절 제주에는 ‘고사리 방학’이라는 게 있을 정도였다고 한다. 어린이들도 학교에 가지 않고 고사리를 꺾었단다. 서귀포시 남원읍에서는 매년 4월 말이면 ‘고사리 축제’가 열리기도 한다. 그 시기 제주에 유채꽃과 벚꽃 구경 온 상춘객들은 비가 오면 울상이 되지만, 우리 도민들은 관광객한테 보이지 않게 고개 돌리고 씩 웃는다. 

‘고사리 장마로구나!’ 이 비가 그치고 나면 고사리가 쑥쑥 올라올 것이다. (환호!) 

중산간 깊숙한 곳에 있는 집에 살 때였다. 집 앞 도로는 비포장 흙길이라 처음 오는 사람들은 당황해 길을 헤매기 일쑤이고, 내비게이션도 집으로 들어오는 입구에서 끊겨버린다. “목적지에 도착했습니다. 안내를 종료합니다.” 하지만 집은 보이지 않고 대나무와 소나무만 보이는, 뭐 그런 곳에 집이 있었다. 평소 오가는 차가 하루에 서너 대뿐이고 지나는 사람은 모두 아는 사람들인 이런 산골 오지 동네에서 ‘고사리 철’이 되면 낯선 차를 자주 볼 수 있다. 그 말은 몇 걸음만 걸으면 내 고사리밭을 만날 수 있다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정말이다. 거기서 나는 고사리 다 내 거다(내 명의 땅 아님).

하지만 보통 나보다 훨씬 일찍 일어난 다른 동네 사람이 먼저 와서 고사리를 다 꺾어버린다. ‘저거 다 내 건데.’ 낯선 차를 만날 때마다, 집 바로 근처에서 허리 숙여 고사리 꺾는 사람들을 목격할 때마다, 입을 삐죽거리게 된다. “고사리는 자기가 사는 동네에서만 꺾을 수 있도록 법을 재정해야 한다!”고 허공에 대고 외쳐본다. 하지만 고사리의 매력은 평등함이니까. 고사리밭 앞에 살거나 말거나 내 명의의 땅이 있거나 말거나 일찍 일어나서 허리를 숙인 사람만 숙인 만큼 가져갈 수 있는 게 고사리니까. 제주에선 봄이면 부자든 가난하든 나이가 많고 적고 상관없이 모두가 똑같이 챙 넓은 모자를 쓰고 주머니가 커다란 앞치마를 두르고 장화를 신고 가시덤불 사이로 손을 넣어 고사리를 꺾는다. 매일 저녁 내일은 나도 아침 일찍 일어나 제일 먼저 고사리를 꺾어야지 결심하지만 언제나 더 부지런한 사람들이 휩쓸고 지나간 후다. 그래도 괜찮다. 언제나 한 끼 요리해 먹을 고사리는 꺾을 수 있다. 그 고사리로 파스타를 해 먹어야지. 그거면 충분하다.

AROUND 온라인 구독

어라운드의 모든 콘텐츠를 무제한으로 읽어보세요.

구독 시작하기

글·사진 정다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