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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내게 공간이 생긴다면
‘나에게도 공간이 있으면 어떨까?’ 때때로 생각해보곤 했다. 제주도에 살면서 그 상상이 좀 더 잦아졌다. 카페도 하고 싶고 서점도 운영해보고 싶고 잡화점을 해도 좋을 것 같았다. 물론 현실감은 없는 막연한 상상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덜컥 내 공간이 생겼다. 시골 마을 가운데에 자리한 자그마한 2층 건물. 이곳에서 나는 무엇을 해야 할까. 내가 잘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 어느 날 공간이 생긴다면, 나는, 당신은, 그곳에서 무엇을 할까. 상상이 현실이 된다면.
“제 집을 빌려주려고 해요. 혹시 관심 있어요?” 몇 달 전 친구가 말했다. 친구의 직업은 건축가. 본인이 직접 건물을 설계하고 지어 1층은 설계 사무소 겸 목공 작업실로 썼고 2층은 집으로 사용했다. 그러다 서울에 취업해 일을 하게 되는 바람에 제주도를 떠나게 되어 공간을 한동안 비워둔 상태였다. 아무래도 서울에서 지내는 시간이 길어질 것 같아 임대를 줄까 한단다. 내가 관심 없다고 하면 부동산에 매물로 나오게 될 예정이었다. 합리적인 임대료, 괜찮은 위치, 적당한 규모의 매력적인 공간. 하루 꼬박 고민하다가, 그곳에서 무엇을 할지 정하지도 못한 채, 계약하겠다고 대답했다. 대부분은 업종부터 정하고 공간을 찾는데, 내 경우는 순서가 뒤바뀐 셈이다. 이제 공간을 꼼꼼하게 살피고 그곳에서 무엇을 할지 정해야 한다.
나는 종종 글을 쓰며 동네 서점에서 파트타임으로 일하고 있었고, 아르바이트를 하나 더 구하던 중이었다. 적당히 만족스러운 생활이었지만, 사실은 글을 쓰는 일도, 최저 시급을 받으며 아르바이트를 하는 일도 생활을 윤택하게 하는 데는 별로 도움이 되지 않았다. 돈을 좀더 벌어야겠다는 생각이 들던 참이었다. 돈도 돈이지만 안정적으로 오래 할 수 있는 일에 대한 고민도 깊어지던 차였다. 본인의 최저 시급도 벌지 못하는 자영업자의 현실을 미리 알았거나 제주도에 카페와 숙소, 잡화점과 서점이 몇 군데나 되는지 자세히 살펴보고 오래 고민했다면 나는 공간에 대한 꿈을 접고 여전히 아르바이트 두 개를 번갈아 하며 지내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고민할 시간이 넉넉하게 주어지지 않았고 새로운 도전을 해보기로 결심했다. 경험은 없었지만, 언젠가 내 공간을 가져보겠다는 건 늘 품고 있는 꿈 중 하나였으니까. 언젠가가 지금 당장이 될 줄은 몰랐지만.
건물은 제주도 서귀포시 성산읍 시흥리에 있다. 시흥리는 올레길 1코스가 시작되는 마을이다. 웅장한 두산봉을 옆에 끼고 있는 작은 마을로, 바다와는 거리가 좀 있는 편이다. 건물은 하얗고 자그마한데, 전체적으로 삼각형 모양이라 구조가 조금 독특하다. 마당은 사각형인데 온통 현무암 밭이다. 1층 목공 작업실은 방이 따로 없이 한 공간으로 트여 있고 화장실과 싱크대가 갖춰져 있다. 2층은 집으로, 주방 시설이 잘 되어 있는 편이며, 방 2개와 화장실 2개 그리고 거실로 이루어져 있다. 바닥은 에폭시, 벽은 노출 콘크리트로 되어 있고 1, 2층 모두 층고가 높아서 실제 면적보다 넓어 보인다. 2층에서는 멀리 성산일출봉과 우도가 보인다. 주변에는 낮은 집들과 밭뿐이라 매우 고즈넉하다.
숙소는 가장 무난한 선택지 중 하나지만 꼼꼼하게 따져보니 생각만큼 간단하지가 않았다. 4인 숙소로 운영한다면, 아이들과 함께하는 가족 손님이 대부분일 텐데, 어린아이들이 묵기엔 공간이 좀 위험해 보였다. 계단이 가파른 편이고, 복층 난간이 낮아서 아이들이 뛰어놀면 위험할 수도 있다. 또한 숙소를 운영하면 체크아웃과 체크인 사이인 낮 동안이 가장 할 일이 많은데, 그 시간은 한창 카페 영업 중인 시간. 혼자서 숙소와 카페를 동시에 운영하는 건 쉽지 않다.
숙소가 아니면 뭘 할 수 있지, 제주도에 부족한 게 뭐지, 내가 살면서 필요했던 게 뭐였지…. 고민하다 떠오른 것이 공유 작업실. 서울에는 요즘 공유 오피스가 많다고 들었는데, 제주에는 아직 별로 없다. 또한 제주에 카페는 무척 많지만 대부분 관광객 대상으로 운영되고 있어서 작업하기에 편안한 테이블을 가진 곳이 거의 없고, 대체로 조금 시끄럽고 어수선한 편이다. 프랜차이즈 카페 역시 관광객 손님이 많아 일에 집중하기는 어려운 분위기다. 반면 제주에서 생활하는 작가와 디자이너는 많다. 그들이 작업하기에 최적화된 공간을 만들어보면 어떨까. 방에 책상을 두세 개 두고 한 달 단위로 빌려주는 거다. 거실에 큰 테이블을 놓고 원데이 클래스도 열고, 반려동물도 데려와서 함께 작업할 수 있는 장소를 운영하면 어떨까. 구체적으로 고민을 시작했다. 그런데 막상 현실화하려고 보니 예측 수요가 생각보다 적었다. 네다섯 명 이상은 고정적으로 이용해야 임대료를 충당할 수 있는데, 두 명 이상 모집이 어려울 것 같다. 상상 속에선 가장 즐거운 일이었는데, 현실적으로 따지니 가장 어려운 일이다.
숙소도 공유 작업실도 아니라면 대체 뭘 할 수 있을까. 아직 인테리어에 거의 손을 대지 않아 가능성이 많은 공간이라 그런지, 공간을 본 지인들은 각자 의견을 내놓는다. 누군가는 강연이나 모임 같은 걸 하는 용도로 공간을 빌려주면 어떻겠냐는 이야기를 했고, 다른 누군가는 북카페나 만화방을 하라고 했다. 식당을 하라는 사람도 있고, 어떤 사람은 그냥 통째로 재임대를 주라고도 말한다. 고민을 하는 사이 어느새 벌써 친구와 계약한 지 석 달이 지났다. 마음이 조급해지기도 하지만 실은 이 고민의 시간이 즐겁다. 업종이 결정되고 공간 인테리어가 완성되면 다시 하지 못할 고민이라는 걸 알고 있다. 그때부터는 망설임 없이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갈팡질팡할 수 있는 기회는 지금뿐이다. 지금은, 내게 공간이 생긴다면 무엇을 해볼까, 그곳에서 어떤 일이 생길까, 상상하는 시간. 아직은 완전히 현실에 가 닿기 전의 시간. 꿈을 꿀 수 있어 좋은 시간이다. 그런데, 그래서 나는 이 공간에서 과연 무얼 하게 될까?
글 정다운
사진 박두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