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뜻밖의 다정함]

가을을 보내며

계절과 함께 사는 일은 놀라운 일투성이다.

가을

계절이 가을로 들어서기 시작할 때부터 부쩍 컨디션이 좋지 않았다. 손목부터 무릎, 발목, 허리까지 온몸 구석구석 관절이 아팠다. 새로운 통증은 아니었다. 번갈아 따로따로 아프던 관절이 한꺼번에 비명을 질렀다. 그것뿐만이 아니다. 피로가 도무지 떨쳐지지 않았다. 한낮에도 잠이 쏟아졌다. 이렇게 졸려도 되는 건가. 나 괜찮은 건가. 기절한 듯 자다가 개운하지 않은 기분으로 일어나곤 했다. 소화도 잘 안됐다. 하지만 입맛은 여전히 살아 있어서 계속 무언가를 먹었고, 속이 부대꼈고, 후회했고, 또 먹었다. 병원을 가야 하나? 내과? 통증의학과? 정형외과? 아니면 산부인과에 가봐야 하나? 어떤 병원을 가야 하는지 갈피를 잡기가 어려웠다. 건강 검진을 조금 앞당겨서 할까? 가까운 병원에 가서 피 검사라도 받아볼까?

지금까지 딱히 아픈 곳 없이 잘 먹고 잘 소화시키고 잘 자며 대체로 건강하게 살아온 터라 이런 몸 상태가 낯설다. 안 되겠다 싶었다. 내 몸을 다시 예전 상태로 돌려놓기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일들을 하기 시작했다. 평소 건너뛰던 아침을 먹었고, 잘 챙겨 먹지 않아 유통기한이 임박한 종합 비타민 등 영양제도 다시 꼬박꼬박 먹었다. 라면이나 떡볶이를 덜 먹고 끼니마다 5대 영양소를 골고루 먹으려 노력했다. 유독 피곤한 날엔 친구가 준 고용량 비타민도 하나 까먹었다. 하지만 컨디션은 도통 좋아질 기미가 없었다.

나이가 들어서 그런 건가? 혹시 어디 아픈 건 아닐까? 꺼내어 말은 안 했지만 내심 걱정도 했다. 어디 많이 아픈 거면 어쩌지. 주변에 각종 병을 진단받는 젊은 지인들이 늘어나고 있고, 더 이상 병은 남의 일이기만 한 것이 아니다. 언제든 나한테도 일어날 수 있는 일이라는 걸 알고 있다. 하지만 가능하면 피하고 싶다.

원인 모를 통증으로 끙끙 앓는 동안 야속하게도 바깥 날씨는 좋았다. 우리나라 가을 날씨야 대체로 좋은 편이라지만 근래 이렇게 쾌청한 가을이 있었나? 내가 기억하는 한 매년 가을은 언제나 짧았고, 특히 내가 사는 제주의 가을은 더 짧은 편이다. 9월이 다 가도록 뜨거운 여름이었다가, 11월이 되면 바로 차가운 겨울이다. 찰나의 짧은 가을을 즐길라치면 바로 태풍이 오곤 했다. 그러다 보니 체감상 가을은 일주일이 채 되지 않았다. 하지만 올해 가을은 길었다. 맑고 쾌청하고 바람도 잔잔한 날이 몇 주간 이어졌다. 길에서 만나는 여행자들의 표정이 모두 밝다. 여행의 팔 할은 날씨니까. 모두 좋은 여행 되세요. 그런데 내 컨디션은 언제 좋아지는 거지. 바깥의 가을을 창문으로 내다보며 푸념했다.

또 가을

어느 밤 외출 후 집에 돌아오는데, 코끝에 산뜻한 향이 스친다. 어디선가 맡아본 듯한 익숙한 향기긴 한데, 집 앞에서 이런 향을 맡은 건 처음이라 낯설다. 어둠 속을 두리번거렸지만 향의 근원을 찾기 어렵다. 이 이야기를 했더니 누군가 금목서나 은목서 향기일 수도 있다고 말해주었다. 향기에 대한 설명을 듣곤 계절을 더해 꽃과 나무 이름을 짐작하다니. 세상엔 멋진 사람들이 정말 많지. 다음 날 아침 마당의 고양이들에게 사료를 주러 현관문을 열고 나갔는데 어제 그 향이 나지 않는다. 꽃향기가 아니었나? 아쉬운 마음이 든다. 그런데 그날 저녁, 다시 그 향기가 마당의 공기를 채웠다. 며칠 후 마을 입구에 있는 집 담벼락에서 커다란 금목서를 발견했다. 밤이면 바람의 방향이 바뀌어 이 향기가 우리 집까지 닿는구나. 금목서 향기를 실은 바람의 방향 쪽으로 의자를 꺼내두고 햇볕을 쬐며 한나절 앉아 있고 싶다. 가을이다.

다음 날 시내에 볼일이 있어 나갔다가 충동적으로 한라수목원에 들렀다. 목적은 하나. 금목서 찾기. 수목원 입구부터 금목서를 찾으며 천천히 걸었다. 각종 제철 꽃들이 만개한 가운데 아무리 코를 벌름거려도 금목서는 없다. 한 시간쯤 걸었을까, 금목서는 찾지 못했지만 무거웠던 머리가 가벼워지고 다리에 힘이 차오른다. 컨디션이 한결 좋아졌다. 그러고 보니 오랜만의 외출이다. 책을 내기로 하고 출판사와 계약을 했는데 글이 잘 풀리지 않아 끌어안고 있은 지 꽤 되었다. 숙제가 잔뜩 있는데 외출을 한다는 게 마음 편치 않아서 지난 몇 달 집 안에 틀어박혀 있었다. 그렇다고 원고 진도가 나갔던 것도 아니다. 스트레스만 차곡차곡 쌓였다. 그게 문제였을지도 모르겠다. 그 주 주말 일부러 시간을 내어 송악산 둘레길을 걸었다. 조금 쌀쌀했지만 햇볕이 맑고 따뜻해 걷다 보니 땀이 났다. 둘레길을 따라 처음부터 끝까지 한 바퀴 걷는 데 한 시간이 조금 넘게 걸렸다. 탁 트인 넓은 바다와 가파도를 바라보며 산의 둘레를 걷는 동안 언제 봐도 놀라운 제주의 풍경에 감탄하고, 수없이 보며 살지만 마주칠 때마다 어김없이 설레는 말들에게 인사했다. 지나다 만난 어린이에게 주머니의 귤을 건넸고, 여행객들의 단체 사진을 찍어주었다. 그날 관절의 통증이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몸이 개운하다. 

아무래도 가을의 길목 환절기가 가져다준 통증이었던 것 같다. 그리고 그 통증이 가을을 가로질러 걷는 동안 사라졌다. 햇볕과 바람을 관절 마디 사이에 채웠다. 병 주고 약 주네 조금 약이 올랐지만, 저 멀찍이 뿌리 내리고 서 있는 가을의 금목서가 나를 집 밖으로 끌어냈다고 생각하니 영광스러운 일이다. 내년 환절기는 조금 덜 아프게 지나갈 수 있을 것 같다. 금목서 향기를 떠올리기만 하면 된다.

겨울

무사히 가을을 보냈다. 더 이상 마당에서 금목서 향기는 나지 않는다. 제주의 긴 겨울이 시작될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제주도는 남쪽의 따뜻한 섬이라고 생각한다. 실제로 기온이 영하 이하로 내려가는 날은 거의 없다. 하지만 바람이 세서 체감 온도는 그보다 훨씬 낮다. 게다가 제주도는 실내가 추운 편이다. “어쩜 집이 더 추워!” 제주에서 흔히 듣는 말이다. 비싼 난방비 때문에 많은 경우 대부분 집에서도 솜바지에 경량 패딩을 입고 수면 양말을 신고 지낸다. 음, 그중에서 우리 집은 특히 더 추운 것 같기도 하다.

지어진 지 20년이 훨씬 넘은 목조 주택이라 창문 틈으로 찬바람이 솔솔 들어와 자려고 침대에 누우면 코끝이 시리다. 본격적인 겨울이 오기 전 창문마다 꼼꼼하게 에어캡을 붙이고 마치 이불처럼 생긴 방한 커튼을 창문마다 단다. 효율이 떨어지는 보일러는 거의 켜지 않고 대신 등유 난로를 사용한다. 오전에 일어나 난로를 잠깐 켜 집 안을 데운 후, 오후 서너 시쯤 집 안 기온이 낮아질 때 한 번 더 켰다가 저녁때쯤 끄면 춥지 않게 잘 수 있다. 등유 난로 위엔 주전자를 하나 올려 두고 종일 차를 끓인다. 따뜻한 차도 마시고, 집 안 온도도 높이기 위함이다. 보글보글 물이 끓으면 집 안 공기가 천천히 따뜻해진다. 억새가 가득 피어 있는 언덕 위에 곧 눈이 쌓일 거고, 마당엔 고양이들의 발자국이 생길 것이다. 흐리고 거친 날씨가 이어질 것이다. 그 추위 속에서도 붉은 동백꽃은 피겠지. 가을의 통증과 회복을 경험하며 겨울을 보낼 자신감을 얻었다. 그러다 보면 봄도 올 거라는 것도 알고 있다.

요즘 이사를 생각하며 집을 알아보고 있다. 대문을 나서 바로 산책길이 있는 곳을 위주로 탐색 중이다. 생애 처음 앓으며 가을을 맞이한 후 그리고 가을을 지나며 회복한 뒤 하나 깨달은 것은 걸어야 한다는 것. 피트니스 센터 트레드밀 위가 아니라, 태양 아래 바깥공기 속을 내 다리로 한 걸음씩 걸어야 한다는 것. 아무리 바빠도 걸어야 했다. 바쁠수록 걸어야 한다. 바깥을 걸어야 집 안에 있는 시간 동안 건강을 유지할 수 있고, 그래야 내 일에 더욱 집중할 수 있다는 걸 이제는 안다. 지금은 다시 평상시 컨디션이다. 어디가 어떻게 좋지 않았는지 사실 세세하게 기억이 나지 않는다. 걷겠다는 마음도 사라질까 봐 쓴다. 사는 동안 사는 곳을 걷자고. 그게 나를 살리는 일이라고. 참 쉬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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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정다운

사진 박두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