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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ings I Realized after the Trip
사실은 여행에 관심이 없었다. 낯선 것보다는 익숙한 것을 좋아하는 성향 탓이었을지도 모르겠다. 파리에 가고 싶다며 훌쩍 유럽 여행을 떠난 언니를지켜봤으면서도 여행에 대한 내 생각은 달라진 게 없었다. 늘 파리의 향수에 빠져 살던 언니가 함께 여행을 다녀오자며 ‘여행 경비 전액 제공’이라는 통 큰 제안을 내놓았을 때도 나는 여전히 시큰둥한 반응이었다. 내 친구들은 네 언니가 전생에 너한테 무슨 빚을 졌기에 해외여행까지 보내주느냐면서, 심드렁한 표정을 짓는 내 엉덩짝을 금방이라도 걷어차고 싶어 하는 표정이었다. 그러다 지인으로부터 “네가 여행이라는 배움에 태만한 것이 아니냐.”라는 말을 듣고 머리를 얻어맞은 듯한 충격을 받았다. 무관심이라고 생각했는데 직무유기였던 걸까. 여태껏 이 넓은 세상에 대해 내가 너무 무지했던 건 아니었나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떠나면 무엇이든 경험하고 배우겠지.’ 그런 생각을 하며 여행길에 오르기로 했다.
파리를 여행하는 동안 언니와 나는 파리 레알 지구의 작은 스튜디오를 빌려서 지냈다. 위대한 예술 작품을 보고 역사적으로 의미 있는 장소를 찾아가는 것만큼이나 파리 사람들의 실제 삶을 관찰하고 직접 체험해보는 것이 내게는 중요했다. 우리는 아침마다 파리 특유의 구수한 바게트를 사기 위해 집 앞의 작은 빵집을 방문했다. 공원 벤치에 기대어 햇볕을 쬐기도 하고, 관광객들에겐 거의 알려지지 않은 레스토랑에서 천천히 식사를 하고, 낮이든 밤이든 시간만 나면 센 강 주변을 설렁설렁 걷고, 조그만 마켓부터 백화점까지 온갖 식료품점을 돌아다니며 소소한 쇼핑을 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들의 일상을 흉내 내면 낼수록 나는 내가 이 장소에 자연스럽게 스며들지 못하고 붕 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이유 모를 외로움이 불쑥불쑥 마음속에 돋아나 당혹스러웠다. 수없이 마주치는 아름다운 풍경과 행복한 순간에도 외로움은 늘 마음 어딘가에 눌린 자국처럼 남아있었다. 파리지앵들은 시크한 겉모습과는 달리 그들에게는 어린 소녀로 보였을지도 모를 체구 작은 동양인 관광객에게 하나같이 친절하고 상냥했다. 이른 아침부터 관광지들을 전투적으로 쏘다니는 여행도 아니었다. 그런데도 외로움은 야금야금 몸과 마음을 지치게 만드는 얄궂은 불청객 같았다. 그렇게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다 스튜디오로 돌아오면 그제야 마음이 한결 편안해지고 더할 나위 없이 아늑한 기분이 들었다. 그 아늑함이 좋아서 나는 파리 여행 내내 밤늦게까지 잠을 청하지 않고 하릴없이 시간을 죽이며 앉아있곤 했다.
여느 때와 같이 먼저 잠에 빠져 이불 속에서 얕게 코를 고는 언니를 곁에 두고 혼자 스튜디오의 나무 테이블 앞에 앉아 노트북이나 만지작대던 밤이었다. 주말을 앞두고 한 무리의 사람들이 가벼운 홈 파티라도 열었는지 창문 밖에서 떠들썩하게 웃고 떠드는 소리가 들려왔다. 여행 기간 동안 빌린 스튜디오는 가운데 작은 정원을 둘러싸고 여러 집이 서로 창문을 마주하는 형태였다. 방음이 잘 되지 않는 편으로 옆집에서 들리는 자잘한 생활 소음부터 건너편 집에서 파리의 남녀가 신명 나게 사랑싸움을 하는 소리도 곧잘 들리는 게 나름 매력 있었다.
나의 불어 실력은 한국에서 미리 외워간 ‘익스뀌제-므와(실례합니다)’, ‘라디씨옹 씰 부 쁠레(계산서 부탁합니다)’, ‘쥬 부드레 두 티케 뿌흐 알레 오 샹젤리제 씰 부 플레(샹젤리제로 가는 티켓 두 장 주세요-그러나 이 문장은 파리에서 지내는 동안 한 번도 사용하지 않았다)’ 정도만을 겨우 말할 줄 아는 수준이라 파티에서 무슨 얘기가 오가고 있는지 전혀 알아들을 수 없었다. 다만 그들 사이의 친밀함이나 즐거운 분위기만큼은 언어의 장벽을 넘어서 나에게도 고스란히 느껴졌다.
그 기분 좋을 정도의 시끌벅적함을 배경음악으로 삼고 있는데 언제부터인가 그들은 어쿠스틱 기타 반주에 맞춰 비틀즈의 ‘Let it be’를 부르고 있었다.여럿이 입을 모아 부르는 노래는 단출하고 조금 투박했지만 충분히 아름다웠다. 창가로 다가서서 노래 소리에 좀 더 귀를 기울였다. 창밖에서 나직하게 들려오는 목소리를 듣고 있으니 더 이상 외롭지 않았다. 서로 친밀하게 이야기와 시간을 공유하는 사람들. 그 모습에서 느껴지는 온기가 ‘이방인이 맞지만 이방인이어도 괜찮다’고 나를 어르고 타일러주는 것 같았다.
비록 잠시 온 여행일 뿐이지만 나는 이곳, 이 장소에 자연스럽게 스며들 수 있기를 바랐다. 하지만 내가 이방인이라는 사실은 어떻게 해도 변하지 않았고, 낯섦은 당연했다. 외로움 역시 필연적인 것이었다. 그런 감정에 내성이 없던 나는 그렇게 앓고 나서야 비로소 외로움까지도 내 몫이라는 사실을 순순히 받아들이게 되었다.
걷는 곳마다 아름다운 풍경이 펼쳐지는 도시 파리에서 가장 잊을 수 없는 순간은 우습게도 파리의 작은 방 안에서 홀로 깨어있던 그 순간이었다. 파티가 끝난 파리지앵들은 각자의 집으로 돌아갔지만 나는 이후로도 한참을 앉아 창밖을 바라보았다. 이제 방 안의 유일한 소음은 피곤에 지친 언니가 내는 작은 콧소리뿐이었다. 정말이지 평화로운 밤이었다.
다음 날 이른 아침부터 혼자 영화를 보러 나갔다. 전부터 보고 싶던 <프란시스 하>가 마침 파리에서 상영 중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이 기회를놓칠 수 없는 나는 언니와 파리 곳곳을 돌아다니면서도 영화시간표를 뒤적거리곤 했다. 집 근처에 영화관이 있다니, 이 얼마나 운명적인가. 홀로 감탄하며 티켓을 구입한 후 미로 같은 내부를 잠시 헤매다가 상영관을 찾아 들어갔다. 일렬로 일곱 명 정도가 앉을 수 있고 그런 좌석이 뒤로 여덟 아홉 줄 정도 들어찬, 일반 교실의 절반도 안 되는 아주 조그만 상영관이었다. 이른 아침이었지만 꽤 많은 관객들이 작은 상영관을 채우고 있었다.
곧 영화가 시작되었다. 모델처럼 잘생긴 옆자리의 청년, 아침부터 다정히 영화관을 찾은 노부부 등 파리 사람들과 같은 공간에서 함께 영화를 보고 있다는 사실에 괜히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렇게 이방인과 현지인 모두 작은 상영관에 나란히 앉아 칠판만 한 스크린을 올려다보며 조용히 영화를 감상했다. 영화를 보는 행위는 이방인에게든 현지인에게든 동일한 목적을 갖고 동일한 방법과 모습으로 이뤄지는 것이어서 그들과 조금 다른 내 생김새를 제외하고는 상영관 안의 모든 사람은 다를 것이 하나 없었다. 15시간 넘게 날아온 파리에서도 사위를 감싸는 어둠과 눈앞의 흰 스크린은 나에게 한결같았다.
듬성듬성 알아듣는 영어 대사와 내게는 별 도움이 되지 않는 불어 자막으로 이루어진 흑백영화. 그저 ‘보고 싶던 영화를 본다’는 데 의의를 두자고 생각했는데 스토리가 꽤 단순해서 대부분의 내용을 이해하며 볼 수 있었다. 한없이 명랑하고 유쾌한 영화임에도 불구하고 주인공의 여정은 어딘지 모르게 외롭고 고달픈 감이 있었다. 철없고 대책 없이 낙천적이며 꿈만 먹고 사는 주인공에게서 여러모로 동질감(심지어 거주지를 이곳저곳 옮기며 방황하던 주인공이 충동적으로 파리까지 날아가 홀로 외로움을 곱씹는 장면까지 있었다. 이럴 수가 나도 지금 파리인데!)을 느끼던 와중에 영화의 마지막 장면까지 보고 나자 이유를 헤아릴 새도 없이 눈물이 찔끔 나왔다. 주인공이 현실을 받아들이고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찾아 완전한 독립을 하는 모습은 미래에 대해 한창 고민하던 나에게 말로 표현 못 할 조언이자 위로였다. 비록 불어로도 영어로도 영화를 완벽히 이해하지는 못한 상태였지만 그때 나보다 영화에 절실히 공감한 사람은 없었을 것이다. 담담히 순응하고 있던 타국에 서의 외로움까지도 영화가 먼저 알아채고 어루만져준 듯한 기분마저 들었다. 나는 지금도 영화 <프란시스 하>를 그때 그 순간 파리에서 만날 수 있었음을 감사하고 있다.
I’m an alien. I’m a legal alien. I’m an Englishman in New York
(난 이방인이에요. 난 합법적 이방인이에요. 나는 뉴욕에 사는 영국인이죠).
여행을 떠나지 않았다면 내가 이 노래의 가사를 조금이나마 헤아릴 수 있었을까. 새로운 장소에서 만나는 기쁨과 즐거움뿐만 아니라 낯선 곳에서의외로움마저도 어딘가로 떠나본 이의 전유물인 것이다. 이제 나는 실제 여행이 마냥 즐겁고 행복하지만은 않다는 것을 안다. 그러나 여행이란 타국에서 느껴지는 낯설고 힘든 감정조차도 기꺼이 감내할 수 있을 만큼 유혹적이라는 사실 또한 안다. 여행은 저 멀리에서 끊임없이 나를 부르는, 그래서다시금 떠날 수밖에 없게 만드는 그런 것이었다.
파리 여행이 끝나갈 무렵 나는 매일같이 지나치던 숙소 근처의 레스토랑이 24시간 팻말을 내건 레스토랑 겸 카페(혹은 술집일지도 모르겠다)라는 것을깨달았다. 뼛속까지 야행성인 나는 24시간 열려있다는 것만으로도 그 장소가 마음에 들었지만 아쉽게도 그곳에서 시간을 보내는 일은 불발로 그치고말았다. 다시 파리에 간다면 이번엔 반드시 24시간 잠들지 않는 그곳에서 커피든 모히토든 마실 거리를 시켜둔 채 밤을 새워보리라고 다짐했다. 혼자 길고 긴 밤을 지새우는 동안 무얼 할지는 아직 모르겠다. 어김없이 찾아올 외로움이나 후회 따위는 그때 가서 생각하자고 넘겨버릴 뿐이다. 무슨 일이 일어날지는 아무도 모른다. 술 취한 누군가가 괜한 시비를 걸어올지도 모르고 별다른 일 없이 무료하게 제 앞의 잔을 홀짝거리는 와중에 조용히 아침이 밝아올지도 모른다. 만족스럽게 숙소로 돌아가 아침부터 꿀 같은 잠을 내리 자버리거나, 이번에야말로 외로움에 지칠 대로 지쳐 한국으로 비싼 국제 전화를 걸어댈지도 모른다. 모두 떠나봐야 알 일이다.
MK2 Beaubourg
www.mk2.com
MK2는 프랑스의 체인 영화관 중 하나다. 학생 할인을 포함해 영화관마다 할인 혜택이 다양하다. 프랑스 외화의 경우 불어로 더빙하여 상영하는 비율이매우 높은데, V.OVersion Originale는 자막이 제공되는 오리지널 영화를 의미하고, V.FVersion Francaise는 프랑스 영화 혹은 불어로 더빙한 영화이므로 티켓 구매 시 확인이 필요하다. 우리나라처럼 지정좌석제가 아니기 때문에 상영관에 입장한 후 마음에 드는 자리에 앉아 영화를 감상하면 된다.
글 사진 이지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