딱 한 장만 고른다면

얼굴도 나이도 취향도 다른 여섯 사람에게 옷장을 열어 단 한 장의 티셔츠를 골라 보여달라고 했다. 저마다 생김새가 다른 옷 위로는 쭈글쭈글하거나 부드러운, 열렬하거나 사랑스러운 이야기가 흐른다.

이명주

어라운드 매거진 에디터

명주가 고른 것
어라운드 10주년을 기념하며 만든 굿즈 티셔츠. 비매품.

함께 입고 싶은 옷
도트 무늬 스커트와 주황색 양말에다 플랫 슈즈를 신고 싶다. 그리고 품에는 책 한 권이 있어야 한다. 이왕이면 《AROUND》로.

시작부터 말씀드립니다만 저는 티셔츠가 없습니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별것 아닌 티셔츠는 있어도 별것이 되어줄 티셔츠는 없다는 거죠. 아뿔싸! 내가 만든 기획에 내가 참여하지 못하는, 그야말로 자기 무덤을 판 것 같은 기분에 휩싸여 있다가 문득 저를 구해줄 구원 투수가 떠올랐습니다. 재작년 12월의 끝자락, 어라운드의 10주년을 기념하며 열린 ‘발견담’을 위해 만든 굿즈 티셔츠예요. 일상 속 어디에나 녹아 있는 티셔츠처럼, 읽는 이의 곁에 가까이 머물고 싶은 《AROUND》의 바람을 담았어요. 당시에는 ‘월간 티셔츠’라는 이름으로 모두에게 소개했죠. 도화지처럼 새하얀 옷 위에는 일러스트레이터 세아추 작가의 그림과 함께 “why are you wearing a book?”이라는 문구가 적혀 있습니다. 뒷면 목덜미에도 앞면에 있는 영문구가 작게 쓰였네요. 검은 콩처럼 눈코입이 동글동글한 캐릭터는 자기 몸만 한 책을 들고 있어요. 가만 보니 책을 읽다가 우리와 눈이 마주친 것 같기도 하고, 몸에 꼭 맞는 책을 입고 있는 것 같기도 합니다. 티셔츠에 들어가는 그림을 정하기 위해 어라운드의 모든 식구가 시안들을 뚫어져라 쳐다보며 신중하게 투표하던 기억도 떠오르네요(웃음). 한 장의 티셔츠로 말미암아 저에게 좋아하는 옷을 고르는 것은 어떤 의미인지 곱씹어 봅니다. 옷이란 나를 내가 원하는 모습으로 만들어 주는 도구가 아닐까요? 나아가 입는 행위는 현재의 나에게만 유효하기에, 어제까지의 내가 어떤 옷을 입었느냐는 중요하지 않아요. 오늘의 내가 되고 싶은 방향을 따라 하얀 티셔츠든, 샛노란 티셔츠든 덥석 골라 머리부터 집어넣으면 된답니다.

지정현

어라운드 브랜드 프로젝트 매니저

정현이 고른 것
유니폼브릿지Uniform Bridge의 나바호 패턴 티셔츠. 가격은 4만 원.

함께 입고 싶은 것
품이 여유로운 올리브색 바지와 옥색 비즈 팔찌, 보헤미안처럼 보일 샌들.

옷장에서 티셔츠 한 장을 골라달라는 동료의 부탁을 받고 기쁜 고민에 빠졌습니다. (덕분에 야근하고 있네요. 명주 씨, 고마워요!) 이 티셔츠는 대학교에 다닐 때 구매했는데, 10수 정도로 원단이 두꺼워서 여름에는 살짝 더울 정도예요. 그땐 이런 헤비 코튼 티셔츠가 유행이었는데, 가슴팍에 있는 ‘나바호’(미국 남서부 지방의 원주민을 이르는 말로, 독창적인 기하학 무늬를 넣어 직물을 만들었다.) 패턴이 마음에 들어서 쿠폰을 써가며 품에 넣었어요. 무난한 컬러의 티셔츠라 그때나 지금이나 곧잘 손이 갑니다. 이 옷의 특별한 점은 한 가지 더 있습니다. 오른쪽 밑단을 보면 고양이 패치가 붙어 있는데요. 군대 가기 전, 친구들이랑 술을 마시고 담배를 피우다 티셔츠에 ‘빵꾸’가 나버렸어요. 구멍이 난 것도 깜빡하고 있는데, 엄마가 동대문시장에서 고양이 패치를 구해서 꿰매주셨죠. 왜 고양이냐고 물어보니 “귀엽잖아.”라는 간단한 답이 돌아왔습니다. 저는 바로 수긍했고요. 덕분에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물건이 돼서 더욱 각별하게 생각하는 티셔츠입니다. 저는 티셔츠가 모든 옷차림의 시작이라고 생각해요. 기본으로 챙겨 둬야함과 동시에 그날 입은 옷 중 가장 임팩트가 있어야 한다고요. 특히 여름에는, 이 한 장으로 승부하겠다는 거창한 다짐으로 티셔츠를 사 모아요. 핑크, 레드, 그린처럼 평소에는 엄두도 안 내는 컬러를 시도하고 사이즈가 안 맞는 것도 갖고 있습니다. 저한테 옷은 굳이 입을 열지 않아도, ‘대충 이런 거 좋아합니다.’라고 어필할 수 있는 직관적인 표현 수단이에요.

정종혜

어라운드 매거진 에디터

종혜가 고른 것
리버풀FC의 챔피언스리그 우승 기념 유니폼. 공식 온라인숍에서 9만 3천 원 정도. 비싼 배송비 별도.

함께 입고 싶은 것
무엇을 걸쳐도 좋다. 이 옷을 입는 날은 유니폼만이 주인공이니까.

제 옷장에는 입기 위한 것보다 기억하기 위한 티셔츠가 있습니다. 좋아하는 선수와 응원했던 순간을 간직하기 위한 축구 유니폼이죠. 이 옷은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에 속한 리버풀FC의 챔피언스리그 우승을 기념하기 위해 제작됐어요. 당시 리버풀은 삼 대 영으로 지고 있던 경기를 동점으로 만들었고, 승부차기에서 우위를 거두며 우승컵을 들어 올렸습니다. 경기가 열린 도시의 이름을 따 일명 ‘이스탄불의 기적’이라고도 불리는 경기에서 ‘Man Of The Match’로 뽑힌 선수는 제가 가장 좋아하는 스티븐 제라드였죠. 유니폼 스폰서인 칼스버그와 유럽 챔피언의 로고, 리버풀 로고가 새겨져 있고, 다섯 번째 우승컵이라 별도 다섯 개나 수놓아져 있어요. 뒷면에는 제라드라는 이름과 등번호 8번이 큼지막하게 적혔고요. 구단에서 자체 제작한 기념품이기에 리버풀 옷을 담당했던 리복 마크가 없는 점이 기존 유니폼과 다른 특별함이랍니다. 저는 이 옷을 리버풀의 중요한 경기가 열릴 때, 우승컵을 얻었을 때만 입어요. 전날까지만 해도 간절함이 절절하게 흘렀는데 새빨간 유니폼을 입고 나서는 날은 기쁨만 가득합니다. 출근을 하든, 우승 기념 케이크를 사러 가든 ‘내가 우승팀 팬이라니!’ 하며 호들갑도 떨어줘야 해요. 먼 나라의 축구팀을 좋아하는 일이 여간 쉽지 않다 보니 경기를 잘하지 못하면 순간 ‘다른 팀을 좋아할까?’ 싶은데, 방에 걸린 유니폼을 보면 그럴 수가 없어요. 졸린 눈을 비벼가며 본 수많은 경기, 나를 웃고 울린 선수들이 모두 한데 떠오르니까요.

민수기

편집숍 ‘므스크샵’ 대표

수기가 고른 것
아티스트 윤협의 일러스트가 그려진 티셔츠. 비매품.

함께 입고 싶은 것
패션 디자이너 드리스 반 노튼Dries Van Noten이 쇼 피날레에 등장하던 스타일처럼 흰 티셔츠 위에 블루 스트라이프 셔츠 걸치기. 단추는 꼭 두 개를 풀어야 한다.

시기가 정확히 기억나진 않지만, 2004년쯤 윤협 작가가 자신의 일러스트를 넣은 티셔츠를 제작해 가까운 이들에게 선물했어요. 그때 두 장을 받았죠. 가슴팍에 그래픽 일러스트가 크게 프린트되어 있고 티셔츠의 사이즈가 큰 데다가, 작가 사인이 안쪽 목덜미에 새겨져 있는 게 특징이에요. 얼핏 봐도 아시겠지만, 하도 많이 입어서 목 부분이 늘어나고 무언가를 흘린 흔적도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웃음). 윤협 작가는 어릴 때부터 같은 동네에 살던 형인데 멋있어서 제가 따라다녔어요. 형들 쫓아다니면서 같이 노래도 듣고, 낡은 데크를 하나 구해서 스케이트보드를 타기도 했고요. 그 형은 골목길에 그래피티 태깅을 할 때 티셔츠에 새긴 것과 같은 구름 캐릭터를 그리곤 했는데요. 현재의 그림체와는 꽤 다른 모습이에요. 이젠 더 이상 보기 어려운 그림이라고 생각하니까 티셔츠가 더욱 소중하게 느껴지네요. 아, 그리고 처음에 두 장을 선물로 받았지만 지금 남은 건 한 장뿐이에요. 므스크샵이 국내에 처음으로 소개한 해외 브랜드 ‘아워 레가시’와 미팅을 할 때 그들에게 선물로 주었거든요. 생각해 보니 이런 게 티셔츠의 매력 아닐까요? 입기 쉽고 선물하기도 쉽고, 반대로 소장하기도 쉬운 점이요. 우리의 일상 어디에서든 티셔츠라는 존재에 접근하기 쉽잖아요.

조광훈

웹 매거진 ‘데일리 그라인드’ 대표

광훈이 고른 것
초콜릿Chocolate Skateboards의 스케이트보드 티셔츠. 아마도 3만 원.

함께 입고 싶은 것
펑퍼짐한 티셔츠에 맞는 넉넉한 청바지와 밝은 컬러의 모자. 청바지는 무조건 치골에 걸치고 밑단에 곱창 주름을 만들어 줘야 한다.

티셔츠는 저에게 취향으로 판가름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닙니다. 사계절 내내, 집 안이든 밖이든, 보드를 탈 때든 타지 않을 때든, 편한 자리든 격식 있는 자리든, 셔츠를 입을 때조차 항상 안에 티셔츠를 입습니다. 저한텐 생존 방식이나 다름없어요. 이건 2004년이나 2005년쯤 이태원에서 구입한 스케이트보드 브랜드 ‘초콜릿’의 티셔츠입니다. 원래는 파란색이었고, 가슴 중앙에 초콜릿의 아트 디렉터인 에반 헤콕스Evan Hecox가 디자인한 ‘Chocolate Chunk’ 폰트로 팀원들 이름이 배열되어 있죠. 평소 광팬이었던 터라 이 티셔츠를 발견하자마자 구매했지만, 파란색을 소화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렇게 옷장에 고이 모셔두고 잊어버린 어느 날, 무려 17년이 흐른 뒤에야 이 티셔츠를 다시 펼쳤는데 접힌 부분이 누렇게 변색되어 있었어요. 어차피 못 입게 된 옷, 색이나 뺄 셈으로 락스에 물을 풀어 담가 두었더니 매력적인 연보라(혹은 진한 핑크)색으로 변했죠. 개성과 추억이 깃든 이 녀석은 그렇게 애착 티셔츠로 부활했습니다. 저는 옷이 날개를 달아준다는 말을 믿어요. 그날의 옷이 마음에 들면 어디서든 자신감이 생깁니다. 가끔 약속 시간에 쫓겨 서두르다가, 마음에 들지 않는 핏으로 나서는 날에는 하루 종일 기분이 석연치 않습니다. 특히 스케이트보딩에서는 스타일이 멋의 73퍼센트를 차지하기에 나름 머리부터 발끝까지의 밸런스에 신중을 기하죠. 아무리 봐도 좋아하는 옷으로 멋을 부리는 행위는 저의 동력원이 분명하네요.

남아름

의류 브랜드 ‘트락타트’ 대표

아름이 고른 것
트락타트Traktat의 발터 벤야민 티셔츠. 6만 8천 원.

함께 입고 싶은 것
사실 옷을 입을 때 바지를 먼저 고른다. 그 이후에 잘 어울리는 색의 그래픽 티셔츠를 입는다.

저와 이재영, 조수근이 이끄는 트락타트의 티셔츠를 소개하고 싶습니다. 저는 대학에서 문학을, 대학 밖에서는 철학과 예술이론을 공부했습니다. 자신감과 열정으로 대학원에 진학했으나 팬데믹 시기인 터라 연구를 생활화하거나 적응하기에 어려운 나날이었죠. 결국 요원해진 졸업 대신 활로를 찾아 공부한 내용을 살려 브랜드를 시작했습니다. 철학자 발터 벤야민의 눈에서 빨간 빛이 뿜어 나오는 이 티셔츠는 사실 우리 셋을 위한 것이었어요. 브랜드를 오픈하기 전 함께 철학 세미나를 열고 페미니즘 교지도 만들며 밤을 새우다가 아침에 동묘에 가서 옷 구경을 하곤 했거든요. 그 시절의 추억이 담긴 티셔츠가 이제는 트락타트의 상징적인 옷이 되었네요. 왜 철학자의 눈에서 빛이 나오는지 궁금해하실 텐데요. 저에게는 어려운 이론서를 읽기 전에 항상 작가가 어떻게 생겼는지 사진을 검색하는 독서 습관이 있습니다. 조금은 사적인 장면들, 편안한 분위기에서의 사진을 검색하다가 카메라 렌즈를 정면으로 응시하는 모습을 발견하면 저장해 두었어요. 눈빛은 많은 것을 말해줍니다. 그 총명함을 참 사랑하는데요. 마찬가지로 형형한 벤야민의 눈빛을 빛으로 표현한 거예요. 이 티셔츠는 뒷목과 어깨의 시접선을 옷 안쪽에서 봉제하는 방식인 ‘아웃사이드 바인딩’으로 제작되었어요. 어깨선을 따라 뒷목 선 위로 하나의 원단이 덧대어져 있어 양장본 책처럼 튼튼하죠. 실제로 입으면 웅장하고도 강력해진 기분이 든답니다. 이야기를 나열해 두고 보니, 주변 사람들과 이야깃거리가 되고 스스로도 메시지가 인식되는 티셔츠가 매력 있는 것 같아요. 누군가 우리를 괴짜로 보더라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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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디터 이명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