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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아하는 드라마가 끝이 나고 마지막 회 엔딩 크레디트가 올라가기 시작하면, 나는 조용히 두 손을 모은다. 저절로 간절한 마음이 된다. 이번 드라마는 꼭 대본집 나오게 해주세요. 제발요.
시작은 이랬다. 한일 월드컵의 열기로 온 거리가 뜨겁던 2002년 여름, 젖은 눈으로 해사하게 웃는 여자 주인공의 얼굴이 클로즈업 숏으로 끝이 나는 드라마가 있었다. 이름은 전경. 홍대 인디 신에서 활동하는 미완성 밴드의 키보디스트이자 고복수의 애인. 거리에서 팩 소주를 마시고, 담배를 뻑뻑 피워대는 여자 주인공이라니. 남자 주인공은 고복수. 전과 2범 소매치기인데 2부 말미에 뇌종양 시한부 판정을 받는다(총 20부작인데!). 그리고 이 둘은 운명처럼 만나 사랑을 한다.
MBC 드라마 <네 멋대로 해라> 이야기다. 배신과 이혼, 불치병, 자살, 가정폭력, 또 누군가는 출생의 비밀을 안고 살아간다. 이쯤 되면 통속과 신파가 적절히 가미된 다소 올드한 소재의 철 지난 드라마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이 드라마는 어딘가 좀 달랐다. 선한 역도 없고, 악역도 없었다. 이 인물에 마음이 간다 싶으면 뭔가 하나쯤 이상한 구석이 있어서 시청자들을 혼란에 빠뜨렸다. 어떤 사람들은 드라마가 종영된 후에도 시름시름 앓았다. 시청률이 높았던 것도 아닌데. 드라마를 너무 사랑한 나머지 사람됨을 포기할 정도로 일상생활이 어려운 사람들이 생겨났다. 그러니까 나 같은 사람들. ‘네멋 폐인’들.
이렇게 다짜고짜 20년 전 팬심을 밝히고 나니, 조금 멋쩍은 기분이 든다. 어쩔 수 없는 시대성 때문일까. 최근 이 드라마를 20년 만에 다시 보았는데, 내 상상 속 드라마와는 조금 다른 모양을 하고 있었다. 어떤 장면은 매우 생경했고, 종종 불편한 지점들도 있었다. 그런데도 내가 ‘네멋 폐인’이었음을 부정할 수 없는 이유는, 그 시절의 내가 분명 이 드라마에 사로잡혀 있었기 때문이다. 시간이 흘러 퇴색되어 버린 것들 사이에서 여전히 변하지 않고 빛을 내는 순간들이 거기에 있었다.
나는 복수(양동근)가 얼굴을 쓸어내리면서 마른세수할 때, 그 천연함이 좋았다. “남자랑 자본 적 있냐?”는 한 기자의 물음에 “네.”라고 담백하게 대답하는 전경(이나영)을 사랑했다. 시원시원한 미래(공효진)를, 클라리넷을 연주하던 중섭(신구)을, 아들 돈은 받으면서 무슨 돈인지 묻지 않는 유순(윤여정)을 사랑했다. 경이의 웨이브 머리를 따라 하고, 팩 소주도 처음 마셔봤다. 6호선 광흥창역 인근에 있던 버스 정류장(사실은 택시 정류장이었던)과 129번 버스, 홍대 일대와 선유도 공원을 걸었다. 포항 호미곶에도 다녀왔다. 거대한 상생의 손이 검푸른 파도에 일렁이고 있었다. 드라마가 끝난 그다음 해. 나는 여의도에 있는 프로덕션으로 생애 첫 출근을 했는데, 성질 고약한 선배 피디에게 허구한 날 혼이 났다. 뭘 잘못했는지도 모르고 일단 고개부터 숙였다. 그날도 역시 호되게 꾸중을 들었고, 나는 조용히 사무실을 빠져나와 무작정 서강대교를 달리기 시작했다. 그 대교의 끝에 경이의 정류장이 있었다. 한강 다리는 또 왜 이렇게 긴지. 뛰다가, 걷다가, 눈물 콧물 범벅이 되어 겨우 도착한 그곳에 경이는 없고, 빈 의자만 덩그러니 있었다. ‘그’ 벤치에 앉아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가 내쉬었다. 사회초년생의 서글펐던 마음도 조금씩 진정이 되었다. “사는 동안 살고, 죽는 동안 죽어요.” 그래, 사는 동안 살고, 죽는 동안 죽어보자는 마음으로 그 시절을 지나온 것 같다. 웃고 싶으면 웃고, 울고 싶으면 몰래 울면서. 복수가 나에게 가르쳐준 것이다.
그때 나는 처음으로 드라마 대본을 옮겨 적었다. 드라마 대본이 한 권의 책으로 나오는 일이 드문 시절이었고, 공식 홈페이지에 업로드된 대본은 저작권 문제로 미리보기만 가능했다. 요즘은 그마저도 문제가 되겠지만. 나는 대본 미리보기와 한글 문서를 동시에 열어놓고 대본을 옮겨 적기 시작했다. “제1부. #1. 보육원 (해 질 무렵) 소나무 숲이 있다. 가늘게 바람 소리가 난다. 바람 소리 속에 쇠사슬의 삐걱거림이 묻어 나온다.”
젊은 중섭과 열 살 복수가 보육원 그네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는 1부 첫 장면부터 수술실을 빠져나오는 복수를 보며 환하게 웃던 20부의 마지막 장면까지. 나는 경건한 마음으로 필사했다. 한 문장 한 문장 옮겨 적으면서 다시 한번 이 드라마가 좋아졌다. 읽고, 쓰고, 또 읽었다. 20부작 드라마에서 모두가 한 번씩은 자기 인생의 주인공이 되는 이 드라마가 나는 좋았다.
무슨 드라마를 필사까지 하면서 보느냐며 핀잔을 주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것도 맞는 말이다. 하지만, 티브이로 보는 드라마와 문장으로 읽는 드라마는 또 달랐다. 특히 기억에 남는 건, 양동근 배우의 연기를 책 속에서 마주하던 순간. 무심한 듯 툭툭 뱉어내는 복수의 말들은 사실 대본을 거의 토씨 하나 바꾸지 않고 자기 것으로 연기한 배우의 내공이었다. 미래에게 뒤통수를 한 대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당시 나는 양동근 배우가 애드리브의 달인일 것이라고 짐작했던 것 같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런 호흡으로 연기할 수 없다고. 내 예측은 보기 좋게 빗나갔고, 나는 대본을 읽으며 그 틈을 찾아내는 게 좋았다.
요즘도 두고두고 회자되는 상추쌈을 물고 대문 앞에서 울먹이는 장면이나 숨을 거둔 아버지를 끌어안고 오열하는 장면 역시 지문은 의외로 간결했다. 훗날 ‘네멋’ 10주년 인터뷰에서 “어떻게 울라는 얘기는 없었지만, 그 심정에 빠져 울었다.”는 배우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어떤 문장은 배우의 힘으로 완성되기도 한다. 연출과 배우의 몫으로 남겨두는 대본의 여백과 그 여백을 알아채는 좋은 배우가 만나면 이런 장면이 탄생하는구나. 나는 남의 문장을 옮겨 쓰면서 드라마와 좀더 친해졌다. 그 사랑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고 마음에 묻었다. 피고름으로 옮겨 적은 인정옥 작가의 <네 멋대로 해라> 대본은 여전히 내 외장하드 속에 꼭꼭 숨어 있다.
그때부터 내 취미는 드라마 대본 읽기. 처음 드라마 대본을 읽었을 때 느낀 형식의 생소함도 읽다 보니 자연스럽게 적응되었다. 어떤 드라마 속 묘사는 소설보다 더 현실 같았다. 정말 좋아하는 드라마를 발견하면 어렵게 대본을 구해 마음에 남은 장면과 비교하면서 보는 버릇이 생겼다. 대본과 드라마가 같으면 같은 대로, 다르면 다른 대로 좋았다. 말맛이 좋은 대사는 웅얼웅얼 따라 읽어보기도 했다. 배우들의 목소리가 책 속에서 튀어나왔다. 몇 달 동안 배우의 손에 들려 있던 책을 잠시 빌려 읽는 기분이 들었다. 2009년, 노희경 작가의 <그들이 사는 세상> 대본집 초판이 처음 나왔다. KBS 2TV 드라마 <그들이 사는 세상>은 방송가에서도 단연 화제였다. “정지오(현빈) 같은 피디 왜 나만 몰라.”라는 말이 작가실을 타고 유행어처럼 번졌다.
그때 나는 시청률은 제법 나오지만 광고는 잘 붙지 않는 시사 고발 프로그램에서 작가로 일하고 있었다. 내 인생이 드라마라면 매일이 지지고 볶는 막장 드라마가 아닐까, 생각하며 이틀 걸러 뜬눈으로 아침을 맞던 시절. 당시 내가 주로 하던 일은 방송 사례를 찾아 취재하고, 촬영 테이프를 보고, 보통 30분 길면 45분 남짓 영상을 구성해서 더빙 원고까지 쓰면 끝이 났다. 분초를 다투는 전쟁 같은 시간을 겪고 나면 5주가 훌쩍 지나 있었다. 시간은 5주 단위로 흘렀고, 방송 열 번만 하면 한 살 더 먹는다는 농을 던지며 자조하던 나날이었다. 하루는 같은 일을 하며 속마음을 나누던 친구가 이런 말을 했다. “나 드라마 한번 써보려고. 너도 같이 하자.”, “내 일상이 온통 갈등과 대립과 충돌의 무한반복인데, 나는 왜 쓰고 싶은 이야기가 없을까.”
몇 년 후, 그 친구는 혼자 드라마반에 등록했고, 나는 얼마 더 있다가 바르셀로나행 비행기를 탔다. 여전히 그 세계에서 분투 중인 친구가 소식을 전할 때마다 나는 어제 본 미니시리즈를 안주 삼아 밤새도록 울고 웃던 그 시절의 우리로 돌아간다. 온 마음으로 응원하면서.
이 글을 쓰면서 철 지난 드라마들을 다시 꺼내 본다. 애써 눌러두었던 한국에 대한 그리움이 밀물처럼 밀려온다. 복수와 경이 거닐던 20년 전 홍대 일대와 밤의 한강 변, 싱그러운 보라매공원. 지오와 준영이 치열하게 일하고 사랑했던 여의도 방송가. 방송국과 대형 프로덕션들이 빠져나간 여의도는 여전히 잘 있을까? 경이 담배는 끊었을까. 몸에 좋다는 영양제는 꼬박꼬박 다 챙겨 먹는 중년이 되어 있을 수도. 어쩌면 복수와 함께. 모두 어딘가에서 잘 살고 있을 것만 같다.
그리고 나는 박해영 작가의 <나의 아저씨>를 읽으며, ‘추앙’과 ‘환대’의 마음으로 <나의 해방 일지> 대본집을 기다린다. 마음에 남는 대사를 한 문장 한 문장 옮겨 적는다. <나의 아저씨> 대본집이 출간되기까지 꼬박 4년이 걸렸으니, 어쩌면 더 긴 시간이 걸릴지도. 나는 저절로 또 간절한 독자의 마음이 된다.
글 박이나
사진 박이나, 정다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