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발끝 리본처럼

박지수 — 오에프알 서울·미라벨

햇빛이 은은하게 닿는 치마, 바람이 어깨에 머무른 퍼프 블라우스. 또렷한 취향으로 단장한 박지수는 서촌으로 향한다. 마음을 움직인 물건을 네 개의 공간에 풀어두는 세월 동안, 자하문로 일대는 그의 취향으로 조금씩 물들었다. 우리가 만난 날, 문득 두 발끝 달린 리본이 그를 닮았다고 생각했다. 작고 사랑스러운 모습으로 눈앞에 펼쳐진 길을 곧게 바라보며 나아가고 있으니.

오늘은 ‘오에프알 서울0fr. Seoul’이 쉬는 날이라 이곳에 우리뿐이네요. 평소 좋아하는 공간에서 이야기 나누게 되어 기뻐요.

자주 들러 주셨다니 감사해요. 만나서 반갑습니다.

 

최근에 휴가 차 해외에 다녀오셨다면서요?

네. 뉴욕에 다녀왔어요. 좋은 시간을 보냈네요.

 

SNS 사진에서도 즐거움이 느껴지는 듯했어요. 그나저나 이곳 2층에 자리한 ‘미라벨Mirabelle’은 올해 7년째 운영 중이죠? 프랑스에 머무를 때 시작했다고요.

맞아요. 다니던 회사를 그만둔 다음 앞으로 무얼 할지 생각해 보려고 프랑스로 떠났어요. 언어부터 배우려고 어학원에 등록했고, 남는 시간에는 일하려고 했는데요. 학원도 바쁜 데다, 프랑스어가 어느 수준이 되기 전까지는 직장을 구하기 어렵더라고요. 용돈벌이가 될 만한 일을 고민하다가 빈지티 소품을 한국에 소개하기 시작한 거예요.

 

해외에서 한국에 소품을 판매한다는 게 어려운 일이잖아요. 어떻게 용돈벌이 삼아 시작하게 됐나요?

쉽게 시작한 건 아니었어요. 일을 해야 한다는 절박한 마음에서였죠. 제가 프랑스에서 물건을 보내면, 한국에 사는 친구가 다시 국내 택배로 상품을 고객들에게 보내는 식이었는데요. 절차도 복잡했고 배송비도 비쌌어요. 실제로 문제가 생긴 적도 있고요. 하지만 저는 문제를 마주하기 전까지는 미리 걱정하지 않는 성향이고, 문제가 발생해도 해결에 집중하는 편이라 미라벨을 운영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일단 해보는 마음이었군요. 지수 씨는 다양한 물건 중에서도 취향이 담긴 것들을 꾸준히 소개하고 있죠.

한국에 있을 때도 이태원 보광동 앤틱 마켓 같은 곳에서 빈티지 소품을 모았어요. 그런데 현지에 오니까 가격도 합리적이고 좋은 물건이 훨씬 많더라고요. 이런 걸 한국에도 알리고 싶은 마음에 조금씩 구매 대행을 했는데, 많은 분들이 좋아해 주셨어요. 나중에는 빈티지가 아닌 한국에 없던 프랑스 브랜드 기성품도 판매했죠. 빈티지는 수량이 하나뿐인 데다 포장도 까다로웠기 때문에 대안을 고민한 결과였어요.

 

그렇게 들여온 브랜드 중 하나가 ‘흐꺙Reqins’이죠? 쇼룸에 가봤는데 사랑스러운 공간이라고 느꼈어요.

좋게 봐주셔서 감사해요(웃음).

 

나의 취향을 닮은 물건을 다른 사람들도 좋게 봐준다는 건 뿌듯한 경험이겠어요.

그럼요. 특히 흐꺙을 한국 손님들이 좋아해 주시는 게 신기했죠. 프랑스에서는 국민 신발 같은 존재거든요. 단독 매장은 없지만 어떤 신발가게에 가도 있는 제품이에요. 고급화 전략을 쓰지도 않고 합리적인 가격으로 판매하는데, 그 점이 오히려 마음에 들었어요.

 

쉽게 접근할 수 있는 느낌 때문이었을까요?

네. 어떤 가게의 어떤 상품들은 절대 만지면 안 될 것 같은 느낌을 주기도 하잖아요. 그런데 흐꺙은 사람들이 언제든지 와서 편하게 살펴볼 수 있으면서 누구나 좋아하고, 쉽게 살 수 있다는 점이 제 취향과 딱 들어맞았죠.

오에프알도 편하게 방문할 수 있는 공간이라고 느껴요. 이곳은 파리 마레지구에 있는 유서 깊은 편집숍, 오에프알 파리의 분점이죠. 지수 씨가 파리에 있을 때, 창립자 알렉상드르 튀메렐Alexandre Thumerelle이 먼저 서울에 매장을 열어보자고 제안했다고요.

처음에는 믿기 어려웠어요. 그냥 해보는 말인가 싶고, 장난인지 의심도 했죠. 그런데 알렉스가 매장 위치 후보를 보내달라고 하거나, 오픈 일정을 물어보더라고요. 고마움과 감동이 컸지만, 서울의 공간이 파리 오에프알의 아류 같은 느낌이 날까 두렵기도 했어요. 어설프게 따라 한 느낌이 나지 않길 바라면서 파리 디렉터와 의논하며 도움을 받았고, 지금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네요.

 

어떤 인터뷰에서는 이런 말도 했어요. “나만의 색을 뚜렷하게 나타낼 수 있고 계속해서 아끼게 되는 상품이 좋은 상품이라고 생각한다.”라고요. 오에프알과 미라벨에서 시간이 느리게 흐르는 듯한 느낌을 받는 이유가 여기에 있을까 싶었어요. 

결국 손이 자주 가는 물건은 유행하는 것이라기보다 소장 가치가 있는 것들이니까요. 요즘은 인스타그램을 켤 때마다 모르는 브랜드를 보게 돼요. 전부 대단한 브랜드지만 우리나라에서는 모든 게 너무나 쉽게 생기고 사라진다는 생각이 들었죠. 카페만 해도 문을 연 지 몇년 만에 사라지는 곳들이 많잖아요. 뭐든 빨리빨리 바뀌는 문화가 아쉽게 느껴져요. 그래서 판매할 때도 그 점을 염두에 두게 돼요. 조금 극단적인 표현일 수 있겠지만, 제가 파는 물건이 한두 달 쓰고 버릴 쓰레기가 되면 안 된다고 생각해요.

 

공감해요. 지수 씨는 다양한 패션 아이템을 소개하고, 관심도 많아 보이는데, 어떻게 좋아하게 됐나요?

엄마가 교사였는데 꾸미는 걸 너무 좋아하는 분이었어요. 보통 선생님들이 옷을 화려하게 입는 편은 아닌데, 엄마는 조금 특이하셨던 것 같아요(웃음). 그때 엄마가 패션지 《VOGUE》를 정기 구독하셨는데요, 따라 읽는 일이 정말 재밌었어요. 올여름 바캉스 추천 아이템이라는 제목으로 상품 사진을 모은 기사가 있다면 제일 마음에 드는 제품을 골라서 스크랩도 하곤 했죠. 누가 시킨 것도 아니었는데 말이에요. 그렇게 자연스럽게 다양한 브랜드를 알게 됐어요.

 

그때가 중·고등학생쯤이었을까요?

초등학생 때였어요. 그 후로 패션을 점점 좋아하게 됐지만 관심이 많은 정도에 그쳤는데, 프랑스에 교환학생으로 가서 충격을 받았어요. 모두가 잡지나 미국 드라마에서 나오는 것처럼 멋지게 하고 다니는 거예요. 한국에서는 특이하게 입으면 이목이 쏠리기도 하는데, 옷차림도 다양했고요. 심지어 멋쟁이 할머니, 할아버지도 많았죠. 옷에 완전히 빠져서 교환학생 일 년간은 옷 구경만 다닌 것 같아요.

 

우와, 정말요?

친구들과 빈티지숍나 아웃렛을 다니면서 새로운 브랜드를 접하는 일이 재밌었어요. 그때 제가 옷을 많이 좋아한다는 걸 알았죠.

다시 한국에 돌아와서는 패션 회사에서 일했죠? 패션을 취미로 좋아하는 것과 일로 다루는 건 조금 달랐을 것 같은데요.

맞아요. 제가 사고 싶은 상품이 아니면 애정이 잘 안 가더라고요(웃음). 그래서 지금은 제가 좋아하는 상품을 소개하고, 많이 사고 자주 착용하는 삶을 지향해요. 그게 진정성이잖아요. 나한테 예뻐 보이지 않고, 내가 사랑하지 않는 물건을 어떻게 팔겠어요. 거창해 보이겠지만 저한테는 일종의 신념이에요.

 

그러고 보니 오늘도 흐꺙의 플랫 슈즈를 신었네요. 평소에도 자주 착용하는 것 같았어요.

개인소장 하고 있는 흐꺙 신발이 정말 많은데요. 프랑스 본사와 상품에 대해 의견을 주고받기도 해요. 감사하게도 제 의견을 반영해 제품을 만들어줄 때도 있죠. 예를 들어 영화에서 본 이미지에서 착안해 이런 신발이 있으면 좋겠다고 말씀드리면 신규 모델로 구현해 주세요.

브랜드를 함께 만들어가고 있었군요. 일상에서 플랫 슈즈뿐만 아니라 다채로운 의류, 레이스와 프릴도 참 많이 보여요.

다양한 색, 레이스나 플라워 패턴, 프릴 디자인, 스웨이드…. 저한테 잘 어울리고 좋아하는 요소예요. ‘어울리는 옷’이란 틀에 갇혀서 입고 싶은 걸 못 입는 건 싫지만, 어쩔 수 없이 나에게 좀더 맞는 옷이 있잖아요. 저도 한때는 클래식하고 미니멀한 디자인을 좋아했는데, 이제 와서 당시 사진을 보면 정말 어색해요. 정장이나 셋업을 좋아하기도 했다니까요.

 

…지금은 잘 상상이 안 가요.

(웃음) 저도 그때 제 모습이 신기해요. 숱한 시행착오 끝에 깔끔한 옷보다는 색감이 돋보이는 옷이 제 장점을 부각한다는 걸 알았어요.

 

대표님의 분위기에도 지금 입은 소재가 잘 어울리는 것 같아요.

어릴 때부터 레이스나 캉캉 치마를 좋아했는데요. 중·고등학교 때 힙합 스타일 옷이 유행한 적이 있어요. 스투시, 베이프, 나이키를 무조건 입어야 했죠. 저도 어떻게든 유행을 따라가 보려고 그 브랜드 옷들을 샀는데, 거울 속 내가 너무 못생긴 거예요.

 

스스로 조금 어색하게 느껴졌던 거죠?

맞아요. 나는 줄무늬 티셔츠에 치마가 어울리는 사람인데, 그때는 리바이스 청바지에 폴로 카라티, 폴로 모자도 유행이었으니까 쉽지 않았죠.

결국 딱 맞는 취향을 찾았네요. 외출할 때 옷은 어떻게 고르나요?

매일 아침 즉흥적으로 입는데요. 미리 준비하더라도 나가기 직전에 바꿀 때가 많아요. 보통 신발이나 가방처럼 그날 꼭 착용하고 싶은 아이템을 정해두고 거기에 맞춰 나머지 의상을 골라요. 색 한 가지를 정해서 비슷한 계열로만 매치할 때도 있죠. 한 번 입은 코디는 되도록 입지 않으려고 하고요.

 

꼭 묻고 싶었던 게, 옷은 자기표현이라는 말이 있잖아요. 지수 씨처럼 옷을 판매하는 사람은 이 표현에 공감하는지 궁금했어요.

공감해요. 대학 시절 내내 백화점에서 옷을 파는 아르바이트를 했는데요. 꽤 많은 고객이 매장 직원이 옷을 추천해 주길 바랐어요. 그 부분이 솔직히 안타깝더라고요. 내가 입을 옷인데, 왜 남에게 선택권을 줄까 싶어서요.

 

지금도 그런 손님들을 종종 만나나요?

네. 제일 안타까운 경우는 이런 말을 하는 분들이에요. “이건 날씬한 사람만 입을 수 있어.”, “나는 다리가 안 예뻐.” 나이가 있는 분들은 “이런 건 아가씨들이 입어야 해.”라는 말을 자주 하세요. 사실 그런 게 어디 있나요? 내가 좋으면 입으면 되고, 잘 어울리게 활용할 방법도 생각해 보면 되는데요.

 

그럼 지수 씨는 어떤 사람이고 싶어요?

나만의 스타일을 가진 사람이 되고 싶어요. 특유의 개성이 느껴지거나 흔한 아이템도 남들과 다르게 매치하는 사람이요.

 

이미 그렇다고 생각해요. 짧은 대화였지만 즐거웠어요. 같이 흐꺙에 가보고 싶은데, 어떠세요?

좋아요. 거기도 오늘이 쉬어가는 날이라 얼른 열쇠를 가져올게요(웃음).

밖으로 나서자, 그가 꾸리고 단장한 공간이 거리 곳곳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우리가 머물렀던 미라벨과 오에프알, 그 옆은 꽁드와드 미라벨. 맞은편에는 홈오브하이, 코너를 돌면 흐꺙. 하늘하늘 걷는 뒷모습을 보며 프릴과 레이스는 비록 유연하게 흔들리지만, 그 안에는 단단한 사람이 머물고 있다고 생각했다. 용감한 마음으로 나아가며 서촌을 자신의 취향으로 물들이는 그런 사람. 혹 걷다 두 발끝 리본이 풀려도 그는 질끈 고쳐 맬 것이다. 자신에게 꼭 맞는 매듭을 찾고 기뻐하며 다시 사뿐 발을 내디뎌볼 것이다. 오늘 그는 무엇을 고르고 입었을까. 옷장을 들여다본 적 없어도 선명한 이미지가 떠오르는 까닭은 그가 이미 자신만의 고유한 모습을 갖췄기 때문일 테다. 낭만적이고 자유롭게, 박지수는 박지수처럼 문밖을 나섰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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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디터 차의진

포토그래퍼 장수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