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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족하고 단순한 삶에 대한 이야기
두 개의 캐리어
가족들과 함께 살던 집의 작은 방, 혼자 살던 원룸, 신혼집이었던 아파트. 그 안을 빼곡히 채웠던 짐을 거르고 걸러 챙긴 두 개의 배낭 그리고 다시 지니게 된 두 개의 캐리어. 돌고 돌아 내가 선택한 부족하고 단순한 삶에 대한 이야기다.
구체적인
목표
목표는 구체적이고 사소해야 한다. 한 해가 시작될 때마다 ‘영어 공부’라든가 ‘다이어트’ 같은 목표를 세웠지만 한 번도 지킨 적은 없었다. 연말이면 ‘시간이 이렇게 빠르다니.’ 한탄하며 다음 해 또다시 비슷한 목표를 잡기 일쑤였다. 그런데 단 한 번 목표를 달성했던 해가 있다. 그해의 목표는 ‘천천히 걷기’. 바쁘든 바쁘지 않든 언제나 무언가에 쫓기듯 빠르게 걷던 걸음에 스스로 숨이 차던 시기였다. 의식적으로 천천히 걸었다. 그저 계획한 대로 걷기만 하면 되니 목표를 이루기는 무척 쉬웠다. 빨리빨리 걷던 하루가 모인 한 해와, 천천히 걷는 걸음이 모인 해는 달랐다.
느린 걸음 덕분에 그 어느 해보다 많은 생각을 할 수 있었고, 내가 지금 어디를 향해 걷고 있는지 잘 알고 걸을 수 있었다. ‘올 한 해 천천히 잘 걸었다.’ 고개를 끄덕이던 그해 연말의 기억은 이후의 나에게 상당한 영향을 주었다. 지금 나의 바르셀로나 생활의 목표는 처음 이곳에 가져온 캐리어 두 개에서 더 이상 짐을 늘리지 않는 것이다. 한국으로 돌아갈 때 캐리어 두 개를 다시 그대로 들고 가는 것. 그 목표를 지키기 위해서는 꼭 필요한 것이 아니라면 사지 않아야 한다. 갖고 싶은 것이 생겨도 두 번 세 번 고민하게 된다. ‘캐리어 두 개’라는 구체적인 목표는 소비 생활 전체를 바꿔놓았다. 하지만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다.
10년 전으로
거슬러
독립은 어린 시절부터 오랜 꿈이었다. 내 물건을 내 마음대로 늘어놓는 공간을 갖고 싶었다. 취업하고 돈을 벌기 시작했을 때부터 독립하면 집에 둘 물건들을 사모으기 시작했고, 나 하나 누우면 꽉 차는 작은 방 한쪽에 그 짐들이 쌓였다. 당연하게도 방은 점점 지저분해졌다. 무엇이든 버리는 걸 좋아하는 깔끔한 성격의 엄마는 처음에는 그런 내 방을 몹시 마음에 안 들어 했지만, 언제부턴가 포기하셨다. 다만 가끔 내 방문을 열 때면 한마디씩 걱정 섞인 이야기를 했을 뿐. “너 잘 때 그 짐 다 너한테 무너질 거 같아.” 키가 큰 나는 짐 사이에 이불을 겨우겨우 펴고 웅크리고 잠을 잤다.
회사 생활 몇 년 만에 모은 보증금으로 집과 회사 사이에 있는 오피스텔 원룸을 계약했을 때 엄마는 잠깐 섭섭해하시다가 곧장 “네 짐을 모두 다 가지고 나가”라고 하셨다. 그 원룸에서는 1년 반 정도 살았다.
그곳에 사는 동안 내 공간이 없어서 살 수 없었던 것들을 사 모으기 시작했다. 말하자면 1000피스 퍼즐이 취미였던 그때의 나는 퍼즐을 펼쳐놓을 좌식 테이블까지 샀다. 내가 좋아하는 것들로 가득 찬 내 공간이 정말 좋았다. 퇴근만 하면 집으로 쪼르르 달려갔고, 주말에도 밖에 잘 나오지 않았다.
결혼하고 전셋집을 얻었다. 혼자 살던 원룸보다 큰 아파트였고, 우리는 갖고 싶었지만 사지 않았던 것들을 더 적극적으로 사기 시작했다. 서로를 격려했다. ‘사도 돼. 그러려고 버는 건데 뭐. 하고 싶은 건 하고 살자.’ 남편은 오랜 로망이었던 ‘우 플스 좌 엑박(게임기의 양대 산맥인 플레이스테이션과 엑스박스를 모두 구비하는 것)’을 실현했고, 평소에도 여행하는 기분을 내겠다며 더블 침대가 있는데 굳이 ‘이층 침대’를 또 샀다. 나는 온갖 전집을 사모으기 시작했다. 바느질에 관심도 없으면서 재봉틀을 샀고, 공기 청정기도 샀다. 가습기도 사고 비데도 샀다. 짐은 늘었고, 생활은 점점 편리해졌다.
단순한 것은
불편한 것
사는데 어쩌면 그리 많은 짐이 필요하지 않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처음 한 건, 6개월간의 여행을 통해서였다. 우리는 각자 6개월치 짐을 넣은 배낭을 하나씩 짊어지고 남미를 여행했다. 배낭 안에는 옷이며 세면도구, 상비약, 책 몇 권, 맥가이버 칼 등 꼭 필요한 것들만 들어 있었다. 대부분 요리를 맥가이버 칼 하나로 해결했고, 책 한 권을 여러 번 읽었다. 그러다 길에서 친구들을 만나면 바꿔 읽기도 했다. 사는 데 옷이 몇 벌 필요하지 않다는 것을 처음 알게 된 것도 길 위에서였다. 몇 벌 챙기지 않은 옷이었지만, 그나마도 자주 입는 옷은 손에 꼽았으니까.
종종 모든 것이 갖춰진 집이 그리울 때도 있었다. 남편은 각종 요리도구가 있는 주방을 아쉬워했고, 나는 읽고 싶은 책을 언제든 꺼내읽을 수 있는 책장이 그리웠다. 직장과 집을 놓고 여행을 떠나는 일이 단순히 ‘돈’을 포기하고 ‘자유로운 시간’을 선택한 것으로 생각했었지만, 사실은 ‘편리’를 버리고 ‘불편’을 선택한 일이기도 했다. 편리할 땐 몰랐는데, 불편해지니 알게 되었다. ‘자유’를 고른 우리는 그에 대한 대가로 사소한 불편을 견뎌야 했다. 하지만 20킬로그램이 넘는 무게의 짐을 짊어지고 걷는 동안 마음만큼은 깃털처럼 가벼웠다. 자유롭지만 불편한, 불편하지만 자유로운 6개월의 시간을 보내는 동안 나는 몸이 조금 불편할 때, 적당히 부족한 상황일 때 마음이 편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캐리어
두 개
2년을 머물 계획으로 바르셀로나에 왔다. 큰 짐은 모두 창고에 맡기고, 캐리어 두 개분의 짐만 들고 왔다. 일전에 육 개월치 배낭을 싸본 경험이 큰 도움이 되었다. 외국에서 길게 살면 챙겨야 할 짐이 무척 많을 것 같지만, 오히려 없었다. 세면도구도 화장품도 이불도 그 곳에서 새로 사면 될 일. 이번에도 꼭 필요한 것들만 넣었다. 캐리어 안의 대부분 짐은 옷과 책 그리고 컴퓨터 부속이었다.
지금 사는 집은 방이 하나, 거실이 하나인 작은 유럽식 공동 주택이다. 모든 가구와 가전제품이 갖춰져 있는데, 가구라고 해봐야 소파와 침대, 붙박이옷장 하나와 서랍, 작은 책장 정도가 전부. 전자제품은 냉장고와 오븐, 세탁기가 다였다. 잠시 머물다 가는 건데, 짐을 늘리고 싶지 않았다. 우리는 책상과 전기밥솥, 커피포트만 더 샀다. 전자레인지와 진공청소기 없이 사는 경험을 처음 하는 중이며 비데 없이 살 수 없다던 남편도 비데 없는 삶에 적응해갔다.
전자레인지가 없으니 음식은 보통 그날 해서 그 자리에서 다 먹는다. 바닥은 빗자루로 쓸고, 물걸레로 닦는다. 집에 젓가락이 네 벌밖에 없어서 가끔 다섯 명 이상의 사람들을 초대해 우리 집에 식사를 할 때면 “수저 챙겨와”라고 말해야 한다. 이불도 딱 한 채뿐이라, 여름에는 솜을 빼고 이불 겉 껍데기만 덮고 자고 겨울에는 그 솜을 다시 넣어 쓴다.
누군가는 궁상맞다 하지만, 잠깐을 머물더라도 편하게 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나는 짐을 캐리어 하나에 채워넣고 곧장 떠날 수 있는 지금이 좋다. 우리는 캐리어 두 개만 있다면 어디에서나 살 수 있다. 그 생각만 하면 기분이 좋아진다. 언제부턴가 내 SNS 프로필에는 이렇게 쓰여있다. ‘부족하고 단순한 삶을 지향합니다.’ 그것은 ‘두 개의 캐리어’의 다른 말이다.
글 정다운
사진 박두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