돋보기 너머로 일상을 보는 화가

에바 알머슨

돋보기 너머로
일상을 보는 화가

에바 알머슨

일상과 행복이 촘촘하게 엮인 그림이 있다. 가족과 산책하고 목욕을 즐기고 놀이동산에 가는 평범한 삶이 화폭에 담긴다. 물론 단조롭게 되풀이되는 일상만 있는 건 아니다. 황색 날개를 가진 아이는 몽상을 꿈꾸고, 만개한 꽃이 머리카락을 가득 채우기도 한다. 늘 곁에 있지만 사소해서 눈에 보이지 않던 것들이 에바 알머슨이라는 돋보기를 통해 존재를 드러낸다.

Interview
화가 에바 알머슨

“저는 대상 자체보다 거기서 어떤 감정을 느꼈는지를 중요하게 여겨요. 누군가를 그리는 게 아니라 무언가를 나타내는 거죠. 그 과정에서 저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을 그림에 담는 걸 좋아해요.”

10년 전 아트페어를 통해 한국에 처음 오셨다고요.
맞아요. 로스앤젤레스에서 갤러리를 운영하시는 한국 분의 소개로 코엑스에서 열린 아트페어 ‘서울국제만화애니메이션페스티벌SICAF’에 참여했어요. 

한국의 첫 느낌이 어땠나요?
그때 아시아를 처음 방문했는데, 한국은 저를 무척 환영해주었어요. 특히 클라이언트 한 분이 아주 큰 호응을 보여주셨어요. 한국의 다른 갤러리나 아트페어에도 소개해주셨고요. 열정적이고 흥미로운 경험이었어요. 그 이후 꾸준히 한국에 드나들면서 전시를 하고 아트페어에 참여했죠. 여러 브랜드와 컬래버레이션도 했고요.

전시장 입구 큰 벽에 아기자기한 집과 나무가 그려져 있어요. 마당에서 아이는 아이스크림을 먹고, 줄무늬 옷을 입은 강아지는 손님을 보고 놀란 거 같은데요. 어느 휴일, 다정한 집에 초대를 받은 기분이에요.
이번 전시 타이틀이 ‘집’이에요. 안으로 들어오면 제일 먼저 활짝 핀 꽃이 보일 거예요. 대문을 열어 손님을 환영하고 있죠. 전시는 두 가지 의도를 담고 있어요. 첫째는 보호처, 안식처가 될 수 있는 공간을 꾸미고 싶었어요. 집 안에서 가까운 사람들과 소소한 시간을 나누고 이리저리 뛰어다니는 바쁜 삶 속에서 주변 인물들과 진정한 관계를 유지할 힘을 얻죠. 또 다른 콘셉트는 일탈처럼 사회와 동떨어진 다른 세계로 들어가는 거예요.

방마다 특징이 있나요?
첫 번째 방에는 자화상을 모았어요. 자아를 발견하고 성찰하면서 시작해요. 사랑의 맹세, 감정의 방, 판화나 세리그래피, 도자기 및 조각을 보여주는 방도 있고요. 이번 전시가 세계 최대의 전시이기 때문에 다양한 주제의 그림뿐 아니라 다양한 브랜드와 진행한 컬래버레이션 상품도 한자리에서 만나볼 수 있어요.

수년 동안 서울을 드나들며 경험한 서울의 모습도 담았다고요.
10년 동안 한국을 드나들면서 한국을 소재로 한 그림을 그렸어요. 올 때마다 새로운 걸 발견하면서요. 서울의 풍경, 건물, 사람들은 이제 저의 일부이자 일상이 되었어요. 일상의 소재를 그리는 작가로서 서울을 작품에 담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었어요. 서울은 이제 저의 일부를 구성하는 도시니까요.

유년 시절부터 그림을 그렸나요?
아주 어릴 적부터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어요. 저는 부끄럼 많은 아이였거든요. 그림으로 소통하기가 쉬운 편이었죠. 처음에는 주로 다이어리에 그림을 그렸어요. 유명한 화가가 되겠다는 뚜렷한 목표는 없었지만 평생 그림을 그릴 거라는 확신은 있었던 거 같아요.

그런 확신은 어떻게 오던가요?
저는 삶에서 저를 움직이게 하는 것, 즉 감정을 기억하고 보존하기 위해 그림을 그려왔어요. 어릴 때 그린 그림을 보면 제가 경험한 순간과 그때의 감정들이 생생하게 되살아나요. 그 경험이 쌓이면서 그림은 저의 내면을 표현하는 중요한 부분이 되었죠.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 “너 나중에 커서 뭐 할 거야?” 물으면 그림을 그릴 거라고 말했어요. 사라로사에서 공부를 하다가 바르셀로나로 이사하면서 본격적으로 그림을 배우게 되었고, 부모님도 많이 지지해줬어요. 그림 안에서는 제가 꿈꾸는 걸 마음껏 이룰 수 있잖아요. 어린 시절부터 그림이 주는 힘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화가가 되지 않았어도 평생 그림을 그릴 거라고 여겼어요. 자연스러운 과정이었죠.

그림으로 가족들의 일상을 엿볼 수 있었어요. 가족은 함께 어깨동무를 하고, 엄마는 아기를 무릎에 앉혀요. 모두 모여 저녁 식사를 즐기거나 산책도 하죠. 가족의 시간을 주로 그리는 이유가 있나요?
가족은 작은 사회집단이라고 생각해요. 규모는 작지만 사회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대부분 일어나죠. 우리는 작은 사회의 일상에서 관계를 맺고 다양한 감정을 느끼며 살아가요. 사랑, 희망, 공포, 자유 등이요. 우리가 가족들과 매일 겪는 사소한 행동이 모여 우리 삶을 구성한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어요.

꽃도 자주 등장해요.
꽃은 씨앗이 심어져 개화를 하며 결과물을 낳잖아요. 봉오리가 맺히고 활짝 피고 지는 모든 과정이 아름다워요. 꽃이 주는 희망과 강인한 느낌을 표현하는 걸 좋아해요. 

사랑하는 사람과의 일상을 담는 과정은 어떤 방식으로 이루어지나요?
저는 대상 자체보다 거기서 어떤 감정을 느꼈는지를 중요하게 여겨요. 딸이 재봉틀을 하는 걸 그린 적이 있어요. 그 순간 행복해 보였고 그 감정을 그림으로 담고 싶었어요. 누군가를 그리는 게 아니라 무언가를 나타내는 거죠. 그 과정에서 저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을 그림에 담는 걸 좋아해요. 영감을 받으면 그 감정에 대하여 짧은 문장을 적어놔요. 그 문장을 통해 당시에 느낀 감정으로 회귀할 수 있어요. 가끔은 간단한 스케치를 남겨놓기도 하고요.

캔버스 모서리에 있는 메시지를 봤어요. 황색 나비 날개를 가진 아이의 그림에 스페인어로 “가끔 나는 모나크나비 같다. 나는 정말로 멀리 간다.”라는 문장이 있었어요.
제 아이디어는 문장에서 시작하기 때문에 제 그림에서 문장이나 제목은 중요한 역할을 해요. 사실 스페인어로 남기기 때문에 한국인이 이해하긴 쉽진 않을 거예요(웃음). 그림을 그리면서 이것저것 다른 영감을 받으면 첫 문장이랑 관련 없는 그림이 되기도 하죠. 제가 느낀 감정으로 그림을 그리고 다른 이들에게 이를 전한다는 건 정말 행복한 일이에요. 하지만 관람객이 그림을 볼 때 본인들의 방식으로 자유롭게 해석하는 것도 중요해요. 제가 그림을 그리거나 메시지를 남기는 게 누군가를 가르치고 설득하려는 건 아니니까요. 제 감정을 담아서 그리고 사람들이 그 그림을 감상하면서 또 다른 감정을 느끼는 건 흥미로운 일이에요.

저는 특히 동물의 얼굴 안에 아이의 얼굴을 품은 그림을 좋아해요. ‘Cold on the outside’, ‘Astute’, ‘I am here even if you don’t see me’ 같은 작품이요. 무서운 동물의 표정과 맑고 온화한 아이의 얼굴이 대조를 이루잖아요. 눈을 떼지 못하고 한참을 들여다봤어요.
이 그림들은 시리즈로 연결되어 있어요. 사람들은 대부분 선한 마음, 좋은 마음을 가지고 있다는 전제로 시작해요. 우리는 대부분 선한데, 사회생활을 하고 인간관계를 맺으면서 외적으로 강해 보여야 한다고 생각하죠. 그래서 강인하고 냉철해 보이는 동물 마스크를 쓰는 거예요. 내면은 자기만의 좋은 마음을 가지고 있는데 마스크 안에 숨기고 있는 거예요. 안에만 품고 계속 겉으로는 다른 모습을 보이다 보면 본인의 원래 성향을 잃어버리는 경우도 생겨요. 사람의 양면적인 부분을 표현하고 싶었어요.

전시장의 노란 벽에는 판화로 작업한 초기 작품이 많아요. 굵은 선에서 강렬한 느낌을 받았어요. 대표작들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예요.
초기작에 판화가 많긴 한데 그 방의 그림이 모두 초기작은 아니에요. 일반적으로 유화를 자주 그리지만 지금도 판화를 그려요. 친밀하고 사적인 느낌을 표현할 경우 주로 연필로 그리고 간략하고 진실한 느낌을 전하기 위해서 판화를 사용하죠. 각각 표현하고 싶은 주제에 따라 기법을 달리해요. 오직 흑백으로만 판화를 제작하는데, 유화가 가질 수 없는 극적 요소와 회화기법으로 표현하기 힘든 강하고 직접적인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어요.

그림책 이야기로 들어가 볼게요. 2016년 고희영 감독과 그림책 《엄마는 해녀입니다》를 냈어요. 실제 해녀들과 생활하며 그림을 그린 거로 알아요.
상하이에서 한 잡지를 보고 해녀를 알게 됐어요. 강력한 이끌림으로 제주도에 가기로 결심했고, 제주도에서 해녀들의 물질을 그림으로 그렸어요. 우연히 제주 신문과 인터뷰를 하면서 제 그림이 신문에 실렸어요. 두 달 뒤에 고희영 감독에게 이메일이 왔어요. 제 그림을 봤다고, 우도 해녀들의 삶과 숨을 담은 자신의 다큐멘터리에 사용해도 되냐고 물었죠. 흔쾌히 허락했고 고희영 감독과 함께 우도로 가서 해녀들을 만났어요. 가슴 속 깊은 소망이 현실이 된 거죠.

해녀들과의 만남이 인생에 큰 전환점이 되었다고 했어요.
맞아요. 해녀들의 생활 방식은 정말 존경스러워요. 그들은 여성으로, 인간이 가진 숭고한 가치를 존중하며 꿋꿋하게 지키고 있었어요. 강한 독립성을 갖고 자신감도 넘쳤죠. 자연 친화적이며 가족뿐 아니라 지역사회를 부양한다는 자긍심도 있었어요. 서로 협업하며 넉넉하지 않은 환경에서 상부상조하는 끈끈한 유대관계도 놀라웠고요. 다이빙해서 채집한 걸 나눠 받고 해녀들의 집에 초대도 받았죠. 내면이 여유롭고 관대한 사람들이었어요. 해녀들과의 만남은 저에게 돌이킬 수 없는 깊은 영향을 주었어요. 그들 곁에 머무는 내내 특별한 존재와 함께한다고 느꼈어요. 제 스튜디오는 2층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그중 한 층을 다 비워서 당시 작업한 그림과 제주의 사진, 해녀들에게 받은 물안경이나 조개들로 채워놨을 정도예요. 자랑스럽다기보다 행복한 기억이 커요. 제 작업 중에 가장 좋은 선택이었어요. 

페인팅, 조각, 그림책 이외에도 ‘스킨푸드’, ‘엔제리너스’, ‘오즈세컨’, ‘코렐’ 같은 브랜드와 협업도 많이 하고 있어요. 쇼핑몰 프로젝트 작업도 했고요.
대중의 인기를 얻기 위해서 협업을 진행하진 않지만 제 작품이 프로젝트 속에서 조화롭다면 마음이 편안하고 좋아요. 제 그림이 다른 공정을 통해 색다르게 표현되는 과정을 좋아해요. 한계를 극복하고 새로운 것을 발견할 무한한 가능성을 열어주죠. 예술가는 큰 힘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해요. 사물을 보는 새로운 방법을 열고 사람들의 감정을 다른 방향으로 옮길 수 있죠. 그런 과정을 통해 사람들과의 교감의 폭도 넓어진다고 생각해요. 대중과 친숙해진 듯하고요.

예술가는 자신의 삶을 작품에 녹이곤 해요. 대화를 나누면서 단순한 선과 유머러스한 그림이 작가와 닮았다는 느낌을 받았어요. ‘행복을 그리는 화가’라는 애칭이 마음에 드나요?
사람들이 그렇게 느끼고 불러준다니 물론 마음에 들죠. 제 그림이 희망과 행복한 부분을 많이 담고 있고 제 삶이랑 닮았다는 거에 동의해요. 하지만 저도 늘 행복한 건 아니에요. 때때로 불행하죠. 힘든 순간도 있고 감내해야 하는 상황도 있어요. 그러나 그 순간에도 사소하지만 행복한 부분을 찾으려 노력해요. 우리는 그것을 발견하기 위해 노력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요. 

어떻게 노력하면 좋을까요?
우리는 주변에 근사한 것들과 행복한 감정들을 가지고 있지만 그것에 익숙해지면 잃을 때까지 얼마나 소중한지 깨닫지 못하죠. 우리는 슈퍼맨이나 슈퍼우먼이 아니에요. 하나씩 단계를 밟아 그 순간에 작지만 긍정적인 부분을 보려고 노력해보세요.

행복을 그리는 화가 – 에바 알머슨

A. 서울시 서초구 남부순환로2406 예술의전달 한가람미술관
H. evakorea.com
T. 02 332 8011
O. 2019년 3월 31일까지

에디터 김현지

포토그래퍼 Hae Ran 자료 협조 (주)디커뮤니케이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