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에 흐르는 영화의 시간

어떤 영화적 순간은 대전의 풍경 위에 겹치며 비로소 완성됐다. 저마다의 소중한 것을 지키고자 했던 인물들의 목소리. 그 서사가 포개어진 공간들을 들여다본다.

Ⓒ〈덕혜옹주〉

주저앉을 수 없던 날들

허진호 〈덕혜옹주〉(2016)

기모노를 어색해하며 엉거주춤 걷는 시종 옆, 양장을 입은 십 대 소녀가 있다. 눈빛은 총명하고 걸음에 흐트러짐이 없는 것이 나이에 비해 어른스럽다. 소녀의 이름은 덕혜. 몇 해 전 세상을 떠난 고종의 어린 딸이다. 옹주를 끔찍이 아끼던 아버지가 세상을 뜨자 덕혜를 둘러싼 사람들은 그녀의 삶과 나라를 뒤흔들지 못해 안달이다. 그들 중 일본에 자신의 운명을 맡기고 충성하는 택수가 있다. 양장을 입은 덕혜를 보자마자 그는 이내 눈빛이 날카로워진다. 일본인 관료들이 모인 자리에서 조선의 마지막 황녀가 일식 의복을 입은 모습을 보여주고 싶어 덕혜에게 새 옷을 보냈건만, 정작 기모노를 입은 사람은 그녀가 아니었으니 말이다. 화를 내며 자초지종을 묻자 덕혜는 눈도 깜빡하지 않고 시종이 예쁘지 않냐며 되묻는다.
영화적 상상을 더해 구성된 덕혜의 삶은 어떠한 억압에도 꺾이지 않으려는 태도로 일관한다. 친일 관료들의 협박에 못 이겨 조선을 떠날 때도, 조선인 노동자들 앞에서 일본제국을 미화하는 연설문을 읽으라 강요당할 때도. 결국 그녀의 삶은 비극으로 치닫지만, 나라를 잃은 혼돈 속에서 자신을 지키려 했던 결연한 모습은 스크린 속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소녀 덕혜의 굳은 심성이 나타나는 장면의 배경은 대전 한남대학교 내부에 자리한 ‘오정동 선교사촌’이다. 기독교 선교사들의 주도로 대학이 설립되면서 형성된 주거지로, 1950년대에 조성된 집 일곱 채를 만날 수 있다. 기와를 얹은 고즈넉한 양옥은 일제강점기보다 후대에 지어졌으나, 근대의 분위기를 담뿍 느낄 수 있어 영화 속 덕혜를 자연스럽게 품는다. 어느 외국인 선교사들이 거닐었을 아름다운 풍경에 잠겨 산책하기 좋은 장소다.

Ⓒ〈변호인〉

용기의 걸음이 향한 곳

양우석 〈변호인〉(2013)

군사정권 시대, 대전에서 판사 생활을 하던 우석은 고향 부산에 내려와 변호사 사무실을 개업했다. 그의 사무실은 날마다 문전성시를 이룬다. 사람들의 수요가 많은 부동산 등기, 세무 상담을 전문으로 삼은 덕분이다. 동료들은 체면 상한다며 마다하는 일일지라도, 안락한 생활을 가져다줄 수만 있다면 ‘속물 변호사’ 같은 삶도 괜찮다. 대형 건설사의 자문 변호사 제의까지 받았으니, 이젠 호의호식할 일만 남았다. 그런 우석에게 데모를 벌이며 정의를 외치는 TV 속 대학생의 모습은 도통 이해할 수 없는 풍경이다. 정의라는 것, 우석에겐 울림을 주지 못하는 단어니까.
그러던 어느 날, 단골 식당 주인의 아들 진우가 한 달째 행방불명이라는 소식이 들려온다. 내막을 파헤쳐보니 진우는 억울하게 간첩 누명을 쓰고 대공분실에 구금되어 있었다. 어렵게 면회한 진우는 심한 고문으로 몸과 정신이 피폐해진 상태였다. 아무런 잘못 없는 청년에게 국가가 행사한 폭력을 목격하고 큰 충격을 받은 우석은, 생전 처음으로 안위가 아닌 정의를 좇아보기로 한다. 그렇게 그는 진우의 변호인이 되어 법원으로 향한다.
영화의 중요한 무대가 된 법원 건물은 대전의 구 충청남도청 본관이다. 일제강점기인 1932년 충남도청이 공주에서 대전으로 이전하며 건립된 이곳은, 2012년 도청이 다시 내포신도시로 옮겨가기 전까지 지역 행정의 중심지였다. 현재는 ‘대전근현대사전시관’으로 새롭게 태어나 방문객을 맞이하고 있다. 외벽을 장식한 갈색 스크래치 타일, 내부 곳곳의 아르데코 양식은 근대 건축의 과도기적 미학을 보여준다. 법정 장면 상당수가 이곳에서 촬영된 만큼, 스크린 너머의 시간을 직접 경험하고 싶다면 둘러볼 만한 현장이다.

Ⓒ〈부당거래〉

총구를 겨눈 두 사람

류승완 〈부당거래〉(2010)

경찰 철기와 검사 주양은 상대의 치명적인 약점이 담긴 문서를 하나씩 쥔 채 넓은 광장에서 만난다. 빨간 파라솔 아래 마주 앉은 두 사람. 팽팽한 긴장감이 흐른다. 먼저 철기가 가지고 있던 자료를 주양에게 건넨다. 대기업 김 회장과 주양이 함께 골프를 치는 사진으로, 주양이 그동안 김 회장의 후원을 받으며 비리 검사 생활을 했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최 반장이 나한테 선물을 줬으니까 나도 답례를 좀 해야지?” 이내 불편한 기색으로 두꺼운 문서를 테이블에 내려놓는 주양. 그가 담당하는 연쇄 살인 사건의 피의자가, 사실은 윗선의 지시로 철기가 꾸며낸 범인이었다는 내용이 나타난 증거물이다. 주양을 만나고 돌아온 날 밤, 홀로 밝게 켜진 공중전화 부스에서 철기는 분노에 휩싸여 두꺼운 문서를 찢는다. 철기는 윗선의 약속대로 사건을 마무리해 승진하길 바라고, 주양은 비리 행적이 알려지지 않길 간절히 원한다. 두 사람이 각자가 맺은 부당거래를 잘 마무리 짓기 위해 분투하는 과정은 부패한 권력 기관의 민낯을 드러낸다.
이들의 팽팽한 줄다리기가 그려진 영화는 대전 일대에서 다수 촬영되었다. 철기와 주양이 서로의 패를 확인하던 광장은 ‘대전 예술의전당’ 앞이며, 주양이 부하 직원한테서 자료를 넘겨받던 웅장한 연회장은 ‘이응노 미술관’이다. 이외에도 ‘대전시청’, ‘대전시립미술관’을 비롯한 여러 장소 이름이 엔딩 크레디트에 등장한다. 차갑고 거대한 직선 위주의 건축물들은 개인의 욕망이 부딪히는 도시의 분위기를 극대화하며, 영화의 묵직한 긴장감을 완성하는 최적의 무대가 되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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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차의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