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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다운
바다를 곁 하고
도시는 둘로 나뉜다. 바다가 있는 도시와 바다가 없는 도시. 둘은 많이 다르다. 도시에는 바다가 필요하다. 그건 바다가 있는 도시에 살아본 사람만 알 수 있다. 그리고 또한 바다가 없는 도시에서도 살아본 사람만 알 수 있다.
서울에서 태어났다. 하지만 누군가 고향이 어디냐고 물으면, 서울보다는 “해운대”라는 대답이 먼저 나온다. 서울에서 태어나 다섯 해 남짓 살았지만 거의 기억에 없다. 생애 첫 기억은 부산 해운대에서 시작 된다. 어린 시절 앨범 속 사진의 배경은 대부분 해운대 바닷가이고, 바다에 사는 어린이였던 난, 하지만 파도를 무서워했던 것 같다. 파도를 피해 도망가는 사진만 여러 장이다. 그 시절 사진 촬영이 취미였던 아버지는 늘 카메라를 목에 걸고 다니다가 파도에 놀라는 나를 보면 셔터를 눌렀다. 바다는 나의 놀이 터였고, 가족 소풍 장소도 바다였다. 처음 세발자전거를 타고 달린 곳도 바다 옆으로 난 길이었다.
고등학교는 해운대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언덕의 꼭대기에 자리한 곳을 다녔다. 교실 창문으로 밖을 내려다보면 언덕을 빼곡하게 채운 집들 끝에 바다가 있었다. 일 분단 맨 앞줄 왼쪽 자리를 가장 좋아했다.
그 자리에서는 고개를 왼쪽으로만 돌리면 항상 바다를 볼 수 있었다. 앞에 아무도 없어서 교실에 나만 있는 것 같은 착각도 들었다. 고등학교 3년 동안 바다 옆에 앉아 보낸 시간은 헤아릴 수 없고, 그 시간을 보내며 바다와 하늘빛이 매일 매시간 달라진다는 걸 실감했다. 그 시절 휴대폰 카메라가 있었다면 매일 사진을 찍었을 텐데, 대신 나는 일기를 썼고 간혹 그림을 그렸다.
일찍 하교하는 토요일이면 종종 학교에서부터 집까지 걸어갔다. 가파른 언덕길을 한참 걸어 내려와 길을 여러 번 건너고 골목을 요리조리 돌아가면 해운대 바다에 닿았고, 바다를 따라 걸으면 그 끝에 집이 있었다. 그런 날이면 신발에 늘 모래를 한가득 담고 와서 엄마에게 야단맞기 일쑤였지만, 그런 건 크게 상관없었다. 나는 오른편에 바다를 두고 걷는 게 좋았다. 신발 속으로 자꾸만 모래가 들어가는 것도 좋았다. 더 이상 파도도 무섭지 않아서 밤바다를 마주 보고 한참 쪼그리고 앉아 있기도 했다.
대학에 진학하며 서울에서 살게 되었다. 태어났지만 낯선 도시, 친구라곤 한 명도 없는 서울에서 나는 조금 외로웠고 많이 답답했다. 매일 어디를 보고 숨을 쉬어야 하는지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서울 사람 들은 그럴 때 한강에 가는 모양인데, 한강 둔치에 서서 앞을 봐봤자 강 건너 아파트가 보일 뿐인데, 그게 뭐가 그렇게 좋다는 건지 잘 모르겠다고도 생각했다. 그 시절 나는 지하철이 한강 당산철교 위를 달리는 순간에만 잠깐 고개 들어 숨을 쉬었다. 합정역에서 당산역으로 달릴 때는 오른쪽 창가에 섰고, 당산역에서 합정역으로 갈 때면 왼쪽 창가에 섰다. 꾹 닫힌 지하철 객실 창문 너머 세로로 길게 보이는 강을 바라보면서 저 강 끝에 바다가 있겠거니 했다. 멀리 강의 꼬리가 바다라고 생각했다.
그걸로 성에 차지 않아 온전한 바다가 보고 싶을 때면 밤기차를 타고 부산으로 갔다. 서울에서 가까운 바다 같은 건 없었고, 인천은 심리적 거리가 아주 멀어서 나에겐 부산이 가장 가까운 바다였다. 동이 틀무렵 부산역에 내리면 비릿한 바다 냄새가 났고, 나는 바다가 보이지 않는 부산역에서 숨을 크게 쉬곤 했다. 서울에도 친구들이 생기고 생활이 바빠지며 바다를 보러 부산에 가는 일은 줄어들었지만, ‘나는 언제나 해운대에 갈 수 있다.’는 생각은 서울살이를 버티게 해준 힘이었다.
남미를 여행하며 가장 좋았던 곳을 꼽으라면 다섯 손가락 안에 칠레의 도시 발파라이소가 있다. 발파 라이소 골목을 걸으며 자주 해운대가 떠올랐다. 비탈길을 따라 집들이 따닥따닥 붙어 자리하고 있고, 언덕 아래에 바다가 있는 도시 발파라이소. 창은 대부분 바다를 향해 나 있고, 그렇지 않더라도 골목에 서서 아래를 내려다보면 모두에게 공평하게 바다가 보였다. 우리는 이곳에서 언덕 위 골목길 사이를 끝도 없이 걷다가, 배가 고프면 내리막을 따라 내려가 부둣가에서 해산물 스프를 먹었다. 바다를 등지고 언덕을 바라보면 알록달록 색칠한 건물이 모두 나를 내려다보고 있는 것 같아 재미있었다. 부른 배를 두드리며 다시 그 집들을 향해 언덕을 올랐다.
발파라이소에는 유난히 길고양이가 많았다. 다들 상태가 좋고 털이 반지르르했다. 그리고 사람을 무서워하지 않았다. ‘이 고양이들도 모두 저 바다를 봤겠지.’라는 생각을 하면 기분이 좋아졌다. 자동차 아래나 음식물 쓰레기통 주변, 어두운 뒷골목을 다니며 사람들 신발만 보다 하루가 저무는 고양이들만 있는 도시를 걸을 때보다 한결 더 가벼운 마음으로 하루를 보낼 수 있었다. 골목을 돌 때마다 바다가 보이고 고양이를 만날 수 있는 도시라니. 발파라이소를 여행하는 내내 ‘팝니다’라는 팻말을 붙여놓은 집을 괜스레 유심히 살펴보곤 했다.
쿠바의 수도 아바나는 막상 여행할 때는 그렇게 좋다고 느끼지 못했다. 조금 더 솔직히 말해서 아바나에 바다가 없었다면, 말레콘 해변이 없었다면, 나는 아바나를 단 하루도 견디지 못했을 것이다. 사진 으로 보는 아바나는 총천연색 건물에 근사한 올드카가 있는 곳이고, 귀로 듣는 아바나는 흥겨운 음악 소리가 끊이지 않는 곳이지만, 걷는 아바나는 그렇게 즐겁기만 한 곳은 아니다. 한 걸음 내딛을 때마다 사람들은 “어이 거기 예쁜이, 시가를 사라, 럼을 사라.”고 나를 향해 외쳤고 아무리 들어도 익숙해 지지 않아서 차라리 귀를 틀어막고 싶었다. 무심코 걷다 보면 샌들 신은 발로 똥을 밟기 일쑤였고, 밟은 똥이 개똥이라면 그나마 다행이었다.
자유로운 마음의 사람들만 모여 사는 것 같은 아바나에서 자유롭게 걸어 다닐 수 없어서 답답했는데, 천만다행히 그 도시 끝엔 바다가 있었다. 거친 파도를 옆에 두고 걸으면 개똥도 말똥도 사람똥도 파도에 한꺼번에 쓸려 나가는 기분이 들었다. 바닷바람은 공기도 씻어내주었다. 아바나를 떠난 뒤 그곳을 떠올리면 말레콘의 높은 파도와 거친 바람이 함께 생각나고, 그때마다 그 아바나로 돌아가고 싶어진 다. 아바나에 있을 땐 기대하지 못하던 일이다. 바다 덕분이다.
바르셀로나에서 길을 잃으면 가만히 서서 몸의 기울기를 느껴보라고 친구가 말한 적이 있다. 분명 조금이라도 몸이 기울어진 쪽이 있을 거고, 그 방향으로 따라 걸어가면 바다가 나온다고. 이 섬세하면서도 애매한 이야기는 정확히 사실이다. 바르셀로나는 바다를 기준으로 완만한 경사로 이루어진 도시다.
바다를 중심으로 길을 찾는 도시, 바르셀로나. 그곳에서는 여름이면 비키니 위에 얇은 원피스 하나 걸쳐 입고 지하철을 타는 사람들을 흔하게 볼 수 있다. 할머니도 아이도 누구나 스스럼없이 그런 차림으로 다닌다. 집집마다 테라스에 비치 타월이 널려 있고, 해가 뜨면 타월을 들고 바다로 간다. 모래 위에 타월을 깔고 아무렇게나 드러누워 책을 보고 맥주를 마시고 도시락을 먹고 집에 와 다시 타월을 말렸 다. 한여름이면 9시가 넘어도 해가 지지 않아, 하루 일을 끝내고도 바다에 몸을 담글 수 있었다. 나도 바르셀로나에서는 언제나 짧은 반바지를 입고 지냈다. 언제 바다에 발을 담글지 알 수 없었으니까. 그러다 바닷물에 옷이 젖더라도 천천히 걸어 집에 오면 되었다.
요즘 나는 온통 바다로 둘러싸인 섬 제주에 살고 있다. 내가 사는 집은 함덕 해수욕장 근처에 있는 아파트이고, 함덕은 도시와 시골을 반씩 섞어놓은 것 같은 곳이다. 최근 이사를 가려고 집을 내놓았고 어제는 한 가족이 집을 보러 왔다. 그들은 “지금은 시내에 사는데 아이가 있어서 바다와 가까운 곳에 살아볼까 싶어서요.”라고 말했다.
내가 그 아이만 했을 때 우리 집은 바다가 없는 도시 서울에서 바다가 있는 도시 부산으로 이사를 갔고, 아버지는 집을 해운대에 구했다. 하지만 아버지 직장은 해운대에서 차로 30~40분 이상 달려야 하는 부산 시내 중심가에 있었다. 한참 시간이 흐른 뒤에서야 직장과 먼 곳에 집을 구한 이유가 궁금 해졌다. 아버지는 “기왕 부산까지 온 거 바닷가 앞에 살아야지 싶어 해운대에 집을 구했지.”라고 말해 주었고 나는 기립 박수를 쳤다. 이 이야기를 그 가족에게 해주려다가 그냥 빙긋 웃고 말았다.
글 정다운
사진 박두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