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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용원 — 월간토마토
지역 잡지 《월간토마토》를 만들며 대전의 골목과 사람, 사라지는 풍경을 기록해 온 이용원 편집장. 모두가 앞을 보며 달려갈 때 그는 홀로 뒤를 보며 도시의 문장을 지어왔다. 20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그가 쌓아 올린 종이더미 사이로, 대전은 어느새 지워지지 않는 제 얼굴을 갖고 있었다.
보통 지역 잡지엔 지명을 넣기 마련인데, ‘대전’ 대신 ‘토마토’라는 이름을 선택하셨어요.
창간 당시 이런 의문이 있었어요. ‘왜 서울에서 만드는 잡지는 당연하게 전국에 팔리는데, 지역에서 만드는 잡지는 지역 한정이라고 생각할까?’ 사람들 머릿속에 자리 잡은 그 경계가 싫어서 제호에 굳이 ‘대전’이라는 단어를 넣지 않기로 했어요. 대신 오감을 자극하는 과일 이름을 붙여보자 마음먹고 리스트를 쭉 뽑았죠. 그런데 월간 수박, 월간 딸기… 하나씩 읽어보니 죄다 원예 잡지 같은 거예요(웃음). 사실 처음 정한 제목은 ‘레몬’이었어요. 조금 심심해서 ‘월간 레몬 가게’라고 이름 붙여 준비하고 있었는데, 서점에 가보니 이미 《Lemon Tree》라는 잡지가 꽤 잘 팔리고 있더라고요. 그래서 그 이름은 포기하고 다음으로 떠올린 게 ‘토마토’였죠. 우선 발음이 좋았고요. 거꾸로 읽어도 토마토고, 무엇보다 다 익으면 겉과 속이 똑같이 빨갛잖아요. 그 한결같은 점이 참 좋았어요. 몸에도 좋고 건강하니까 우리 잡지도 그렇게 만들자고 마음먹었죠. 가끔 토마토는 채소 아니냐고 묻는 분들도 있는데, 그럴 땐 채소와 과일의 성격을 모두 가진 매력적인 존재라고 설명해요.
2007년에 창간해 어느덧 20주년을 앞두고 계시지요. 지난 시간을 돌아보면 《월간토마토》는 어떤 세월을 지나온 것 같으세요?
매 순간이 비슷한 긴장감의 연속이었어요. ‘내년에도 잡지를 계속 낼 수 있을까?’ 하는 불안과 부담을 늘 안고 있었거든요. 그런데도 포기하지 않고 한 달 한 달 꾸역꾸역 버티며 여기까지 왔습니다. 어른들이 하시는 말씀 중에 ‘소걸음으로 천 리를 간다’는 말이 있잖아요. 정말 그렇게 걸어온 것 같아요. 상황이 급하다고 해서 무작정 빨리 뛸 수도 없었고, 그저 묵묵히 한 발 한 발 내딛다 보니 어느덧 20년이라는 시간 앞에 서 있네요.
그간 한 번도 쉼 없이 달려오신 거예요?
딱 한 번, 3개월 정도 멈춘 적이 있어요. 2020년 2월부터 4월까지요. 그때 《월간토마토》 ‘시즌 2’를 준비하면서 인쇄부터 재단, 제본, 포장까지 우리 손으로 해보려고 세팅하는 기간이었죠. 재봉틀도 사고, 직접 제본이 가능한 종이를 찾아내는 게 정말 어려웠어요. 지금도 쓰고 있는 사탕수수 종이를 그때 찾았는데, 일반적인 나무 종이로 만들면 50페이지만 넘어가도 미싱 바늘이 안 들어가거든요. 지업사마다 연락해서 확인해 보고 사탕수수 종이를 써보니까 그제야 100페이지 정도까지 바늘이 들어갔죠. 그렇게 하나씩 준비하던 시간이었어요.
발행을 잠시 멈춰가면서까지 그런 수고로운 방식을 택한 계기가 있었나요?
그때 “농사짓듯 책을 짓겠습니다”라는 캐치프레이즈를 내걸었거든요. 사람들은 농업이 삶의 근간이라고 말하지만, 현실에서 농업은 그만큼 중요하게 대접받지 못한다는 느낌을 받았어요. 책이 처한 상황도 농업과 참 닮았더라고요. 그러다 문득 우리가 잡지를 너무 쉽게 만드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원고 쓰고 디자인해서 파일만 보내면 끝이고, 독자 발송까지 외주를 주면 우리 손을 떠나 자동으로 다 나오잖아요. 그래서 손길이 하나하나 묻어난 책을 만들어 그 가치를 조금 더 높여보고 싶었어요. 그렇게 정말 농사짓듯 책을 만들어보니 처음엔 반응이 아주 뜨거웠어요. 독자들한테 ‘토마토스럽다’, ‘초심을 찾은 것 같다’는 이야기도 많이 들었고요.
당시 잡지를 흑백 1도로 인쇄하셨던 걸로 기억해요. 시각적인 화려함보다는 텍스트 자체, 즉 ‘읽는 경험’에 더 무게를 둔 선택이었다고요.
맞아요. 잡지를 창간하고 한동안 지인들에게 그런 이야기를 참 많이 들었어요. “잡지는 기본적으로 비주얼이 중요하다.”, “텍스트가 너무 길어서 누가 읽겠냐.” 같은 걱정 섞인 말들이었죠. 하지만 저는 ‘보는 것’은 이미 핸드폰이나 TV, 영화 같은 영상 매체로 충분히 경험한다고 생각했어요. 단순히 눈에 보이는 것만이 전부는 아니잖아요. 진짜 읽기의 즐거움을 느낄 수 있는 잡지를 만들고 싶다는 욕심이 있었어요. 그래서 텍스트가 더 잘 읽히도록 흑백으로 인쇄했죠.
처음 《월간토마토》를 마주할 독자들에게 이 잡지를 소개한다면 어떤 문장으로 시작하고 싶으세요? 오랜 시간 동안 소개 문구에도 변화가 있었을 것 같아요.
처음에는 ‘공간, 사람, 기록’이라는 테마로 만드는 잡지라고 소개했어요. 중간에는 지역 이야기를 발굴하고 함께 나누는 지역 잡지라고도 했고요. 초반에는 문화예술 잡지라는 이야기도 많이 들었는데, 당시에는 문화예술이 지닌 사회적 함의를 중요하게 여겼거든요. 척박한 지역 문화예술 현장에서 다양한 예술이 매개되고, 그 생태계가 건강해지도록 돕는 역할을 해보고 싶었죠. 그런데 지금은 ‘지역의 이야기’에 더 집중하고 있어요. 요즘 제가 자주 하는 말이 있는데, “지역이 쇠락하는 이유는 자기 서사를 갖지 못하기 때문”이라는 거예요. 그런 의미에서 지역이 조금 더 자기만의 서사를 가질 수 있도록 돕는 잡지라고 소개하고 싶어요.
편집장님이 오랫동안 곁에서 지켜보고 기록해 온 대전의 서사는 무엇이었나요?
대전은 참 재미있는 도시예요. 일제강점기에 근대 도시로 급격히 성장했다는 점에서는 군산이나 부산과 비슷하지만, 대전은 농경지였던 한밭 위에 철도가 놓이며 탄생한 곳이거든요. 그 전까지는 도시로서의 실체가 없던 곳이었죠. 또 삼남 지방 사람들이 다양하게 모여 살다 보니 배타성이 낮고 굉장히 포용적이에요. 한편으로는 백제와 신라의 접경지였고, 치열한 영토 분쟁의 최전선이었던 역사 때문인지 속내를 쉽게 드러내지 않는 면도 있고요. 최근에는 과학 도시라는 정체성까지 더해졌죠. 과거부터 현대까지의 다양성이 공존하는 곳, 그게 제가 본 대전입니다. 서울처럼 촘촘하게 짜여 있지도, 다른 광역시들처럼 자기 색깔이 지나치게 고착화되어 있지도 않아요. 무엇이든 새롭게 그려볼 수 있는 여백이 있는 도시랄까요. 저는 대전이 앞으로 써나갈 이야기가 미국의 포틀랜드와 닮았다고 생각해요. 언젠가 꼭 취재하러 가보고 싶은 도시인데, 대전처럼 다양성을 포용할 수 있고 새로운 실험이 가능한 공간이 남아 있거든요. 대전은 인류가 가야 할 긍정적인 미래를 실험해 볼 수 있는 도시라고 혼자 자주 이야기하고 다녀요(웃음). 최첨단 연구 단지가 있으니, 과학 기술이 인간을 더 행복하게 만드는 데 어떻게 쓰이는지를 실질적으로 증명해 볼 수 있는 거죠. 예를 들어 이동 약자의 문제를 과학 기술로 해결한다거나, 조용한 주택가에서 에너지 자립이나 마을 공동체 활성화를 실험해 보는 식으로요.
대전에서 대학 시절을 보낸 후 ‘옥천신문’에서 기자 생활을 시작하셨잖아요. 원래 기자의 삶을 꿈꾸셨어요?
네, 아주 오래전부터요. 중학교 2학년 때부터 기자가 되겠다고 마음먹었으니까요. 사실 그 마음의 시작은 짝사랑하던 국어 선생님이었어요(웃음). 갓 부임하신 선생님이었는데, 아이들이 짓궂은 장난을 쳐도 다 받아주시던 다정한 분이었죠. 어느 날 글짓기 숙제를 내주셨는데 제 글을 보시더니 “용원이는 글을 정말 잘 쓰는구나.”라고 칭찬해 주시더라고요. 좋아하는 사람이 해준 그 한마디에 기고만장해서 ‘나는 글 쓰는 사람이 되어야겠다.’고 결심했죠. 그때부터 책도 더 열심히 읽고 글도 쓰며 지내다가, 고등학교 때 5공 청문회가 열렸어요. 당시 신문에 연재된 기사를 읽으면서 신문이라는 매체가 세상에 미치는 영향력이 정말 엄청나다는 걸 알게 됐죠. ‘글 쓰는 직업으로 기자가 참 괜찮겠다.’ 싶어 과를 알아보니 신문방송학과가 있더라고요. 시골 고등학교라 법대나 경영대가 최고이던 시절이었어요. 선생님도 “우리 학교 50년 역사상 네가 처음이다. 거기 가면 취업 안 된다.”며 어머니께 전화까지 하셨죠. 그런데 어머니는 “용원이가 하고 싶은 대로 하게 해주세요.”라고 하셨어요. 그렇게 신문방송학과에 가게 된 거예요.
그 시절의 경험이 편집장님께 어떤 흔적을 남겼는지 궁금해요.
돌이켜보면 정말 좋은 시간이었어요. 보통 작은 신문사에서 경험을 쌓고, 기사로 검증받으며 더 큰 단위의 신문사로 나아가는 과정이 기자라는 직군의 일반적인 시스템이라고 하더라고요. 서울에 있는 대학을 나와 바로 서울의 일간지에 들어가 버리면, 국토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지역 사람들의 삶을 실질적으로 경험하기 쉽지 않을 거예요. 하지만 작은 군 단위 신문사에서 일하면 매일 만나는 사람들이 다 이웃이에요. 5년쯤 지나니 시내 어디를 가든 아는 얼굴 한둘은 꼭 마주치곤 했어요. 멀리 떨어져서 보는 관찰자가 아니라 곁에 늘 있는 기자가 되는 거죠. 시위 현장에서 농민들이 던지는 물건에 맞아보기도 하면서, 민초의 삶과 고민이 무엇인지 국가의 축소판 같은 그곳에서 아주 밀도 깊게 경험했어요.
책상 앞에서는 결코 배울 수 없는, 삶의 민낯을 마주하는 시간이었겠어요.
맞아요. 무엇보다 세상을 바라보는 눈이 바뀌었어요. 지역 신문사에서 일하기 전까지만 해도 저는 흑백논리에 사로잡힌 열혈 대학생이었거든요. 노동자는 무조건 옳고 자본가는 나쁘다는 식으로 세상을 단순하게만 봤죠. 그런데 옥천신문에서 직접 부딪히며 일을 해보니 세상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더라고요. 세상이 얼마나 복잡한지, 그 안의 서사가 얼마나 겹겹이 쌓여 있는지 깨닫게 된 정말 소중한 기회였어요.
이후 기자 생활을 접고 《월간토마토》를 시작하셨어요. 어떤 갈증이 편집장님을 잡지의 세계로 이끌었나요?
스물아홉에 입사해 서른세 살에 그만뒀는데, 중학교 때부터 꿈꾼 ‘글을 짓고 싶다’는 감각이 신문의 스트레이트 기사와는 잘 맞지 않았어요. 그때 개인적으로 뒤늦은 사춘기가 왔는데요. ‘행복한 삶이란 무엇일까?’, ‘나는 왜 살고 있는가?’ 같은 고민에 빠져 있었거든요. 그러다 결국엔 공동체를 생각하게 되더라고요. 내가 발 딛고 있는 이 도시가 행복해야 나라가, 더 나아가 지구별이 행복해지지 않을까 생각한 거죠. 그러려면 사람들의 사유의 결이 어느 정도 맞닿아 있어야 하는데, 다들 돈과 권력만 좇으며 살 수는 없잖아요. 그래서 ‘우리는 왜 태어났고 어떻게 살아야 행복한가?’를 고민하는 철학이 일상 안에서 자연스럽게 학습되어야 한다고 믿게 됐어요. 그런데 학교에서는 이런 걸 가르쳐주지 않으니 얼마나 답답하던지, 우리 사회의 많은 문제가 여기서 시작된다는 생각까지 들더라고요. 저는 일상 안에서 그런 사유를 가능하게 하는 게 예술을 감상하는 행위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당시 우리나라는 예술 생태계가 많이 무너져 있었죠. 서울보다 지역으로 가면 상황은 훨씬 더 심각했고요. 제가 직접 예술을 창작할 수는 없으니, 예술을 매개하는 사람으로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고민하다 문화예술 잡지를 만들어야겠다는 결론에 닿게 된 거죠. 창간 초기 ‘공간·사람·기록’이라는 테마도 있었지만, 제가 가장 중요하게 이야기한 건 ‘예술의 일상성’이었어요. 예술이 특별한 무엇이 아니라 우리 삶 가까이에 늘 존재하는 세상을 꿈꾸며 잡지를 만든다는 것. 지금 생각하면 조금 장황한 캐치프레이즈였죠(웃음)?
과거에는 도시 문화예술의 일상성에 집중하셨다면, 지금 시선이 가장 머무는 곳은 어디예요?
요즘은 초반에 잠깐 말씀드렸던 ‘이야기 생태계’에 마음이 가 있어요. 20년 동안 기자의 눈으로 대전이라는 도시의 변화를 곁에서 지켜보며 느낀 가장 큰 문제는, 이 도시에 자기 정체성이 없다는 점이었거든요. 많은 학자들이 대전의 정체성을 찾기 위해 포럼을 열고 연구를 하지만, 정작 더 중요한 건 ‘우리는 어떤 정체성을 갖고 싶은가?’에 대한 시민의 담론 형성이라고 생각해요. 그리고 그 담론이 가능하려면 결국 이야기 생태계가 건강해야 하고요. 제가 생각하는 이야기 생태계의 구성 요소는 작가와 출판사, 인쇄소, 도서관, 서점 그리고 독자예요. 출판사 안에는 일간지도 있고 저희 같은 잡지사도 포함되겠죠. 이런 구성원들이 건강한 생태계를 이루며 지역의 이야기를 발굴하고 공유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지역도 자기 서사를 만들어간다고 생각해요. 그래야 도시의 미래 정체성이나 방향성 역시 조금 더 효율적이고 합리적으로 결정될 수 있고요. 그래서 저는 잡지뿐 아니라 지역 일간지도 많이 봐주셨으면 좋겠다고 이야기해요. 일간지가 형편없다고 말씀하신다면, 어쩌면 그건 독자가 없기 때문일 수도 있거든요. 지역 방송을 봐주시고, 일간지와 잡지를 구독하고, 지역 출판물을 꾸준히 읽어주시면 좋겠어요.
편집장님께 기록은 어떤 의미인가요? 단순히 과거를 남기시는 것 이상의 목적이 있을 것 같아요.
마땅히 해야 할 이야기를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 하는 것이죠. 그동안 우리는 서울의 이야기가 아닌 지역의 이야기는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고, 기록에도 소홀했어요. 그런데 지역이 기록을 등한시하면 결국 함께 공유해야 할 이야기들을 잃어버리게 되거든요. 나중에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도 재료가 사라져버리는 거예요. 이건 현재뿐 아니라 미래의 문제이기도 하고요. 저는 존재와 존재 사이에 관계를 형성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방법이 ‘이야기를 공유하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지금 에디터님과 제가 이야기를 나누며 아주 얕게나마 관계를 맺고 있는 것처럼요. 현대 사회에서 공동체가 무너지는 이유도 예전보다 깊이 있는 이야기의 공유가 줄어들었기 때문이라고 봐요. 대전이라는 도시 안에서도, 더 나아가 구와 동 단위 공동체가 회복되려면 결국 이야기를 공유하며 관계를 회복하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해요. 물론 150만 시민이 모두 사적인 이야기를 나눌 수는 없잖아요. 그래서 도시 구성원으로서 함께 알고 공유해야 할 ‘마땅한 이야기’가 필요하다고 봐요.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누구나 조선 500년의 역사와 일제강점기, 한국전쟁 같은 역사를 함께 공유하듯이, 대전 시민으로서도 함께 알고 나누어야 할 이야기들이 있는 거죠.
편집장님이 왜 그토록 허물어지는 대전의 골목, 사라지는 풍경을 묵묵히 기록해 왔는지 알 것 같아요.
사라지는 것들은 결국 자기 서사의 기본이거든요. 우리가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고 있는지, 그 시간을 층층이 쌓아 이어주는 것이 바로 맥락인데요. 그 맥락이 사라지면 우리 자신을 정확하고 입체적으로 설명하기가 어려워져요. 그래서 그것들이 어떤 가치와 의미를 가졌는지 계속 남겨둘 필요가 있어요. 다양한 관점과 시각으로 바라보고, 의미를 부여하는 작업 역시 중요하고요.
과거 한 독자분이 소개된 장소에 약도나 지도를 넣어달라고 요청했을 때, “누군가의 삶터가 관광지가 되길 원치 않는다.”고 답하신 적이 있어요.
그 마음의 바탕에는 어떤 생각이 자리 잡고 있었나요? 지금 시대를 한 단어로 정의하면 결국 ‘자본주의’라고 생각해요. 무엇이든 팔아야 할 대상, 소비해야 할 대상으로만 바라보는 시대라는 생각이 들거든요. 저는 그 시선이 우리 사회의 많은 문제를 만들어낸다고 봐요. 지역도 마찬가지예요. 관광지가 된다는 건 결국 그 지역이 소비의 대상이 된다는 뜻이기도 하잖아요. 하지만 그곳은 누군가에겐 치열한 삶의 터전이고, 단순히 소비 관점으로만 바라볼 수 없는 의미와 가치가 있는 장소일 거예요. 저는 그런 공간들이 너무 쉽게 소비되는 방식으로 다뤄지지 않았으면 했어요.
약 10년 전 인터뷰에서 “조용하고 고요한 대전을 흔들어 놓고 싶다.”고 말씀하셨지요. 《월간토마토》의 활동이 이 지역에 어떤 변화를 만들었다고 느끼시나요?
에너지가 한창 넘치던 시절의 인터뷰네요(웃음). 사실 요즘 좀 의기소침해 있었거든요. ‘내가 지난 20년 동안 도대체 뭘 했나.’ 싶어서요. 큰돈을 번 것도 아니고, 회사가 눈에 띄게 성장한 것도 아니고, 오히려 갈수록 쪼그라든 건 아닌가 하는 좌절감이 들었죠. 그런데 예전에 같이 활동하던 후배 기획자가 식사 대접을 하고 싶다고 연락을 해왔어요. 갈비탕 한 그릇을 먹으면서 그러더라고요. “선배님 같은 분이 계셔서 우리가 뒤를 이어 이렇게 다양하고 재미있는 일을 할 수 있었습니다.” 그 말에 정신이 번쩍 들었죠. ‘내가 허튼짓을 한 건 아니었구나.’ 싶어서요.
그러고 보니 잡지만 만드신 게 아니라 ‘이데’라는 북카페도 운영하셨죠?
맞아요. 2008년부터 10년 동안 대흥동에서 이데를 운영했어요. 지금으로 치면 복합문화공간이었죠. 당시 대전은 정말 조용했는데, 저희는 거기서 아티스트들과 함께 공연도 하고 그림도 팔고 옥상 콘서트도 열었어요. 대흥동이 상업 지역으로 바뀌며 원룸들이 들어설 때, 그곳에 사는 사람들이 고립되지 않고 이웃과 따뜻한 기억을 나누길 바라는 마음으로 과거 전통 오일장의 형식을 빌려와 자취생을 위한 밑반찬도 팔고 공연도 열었죠. 이데 앞에 있는 대전여중 담벼락에 시민들과 그림을 그리던 공공 미술 프로젝트도 기억에 남아요. 비가 오면 지워지는 수성 페인트로 그린 소소한 기록이었지만, 나중엔 대흥동 일대에 진행된 공정여행의 한 코스가 되기도 했어요. ‘이런 일을 왜 해야 하는가?’를 끊임없이 질문하며 이어온 10년의 문화적 실험들이, 지금 활동하는 기획자들에게는 일종의 실증적 경험이자 밑밥이 되어주지 않았나 싶어요.
잡지 창간 초반부터 꾸준히 이야기해 온 키워드가 ‘재미’였잖아요. 이 잡지로 말하고 싶었던 재미란 어떤 것인가요?
창간 초반에는 정말 많이 이야기했죠. 당시 모토가 ‘재밌게 살자’였거든요. 그런데 마침 대전이 ‘노잼 도시’로 전국적인 유명세를 치렀잖아요. 저한테도 ‘대전이 정말 노잼 도시인가요?’라는 주제로 강연 의뢰가 들어올 정도였죠. 제가 강연을 하며 청년들에게 물었어요. “그럼 재미가 뭘까요?” 대전이 노잼인지 유잼인지 따지려면 재미를 정의해야 하잖아요. 친구랑 당구 치고 삼겹살에 맥주 한잔하는 거, 카페에서 수다 떠는 거라고 대답하더라고요. 대전에서 할 수 있는 거잖아요. 그럼 대전은 ‘유잼 도시’인 거죠. 그런데 왜 다들 노잼이라고 할까요? 제가 생각하기에 소비적 관점에서의 재미는 한계가 너무 분명해요. 돈을 써서 얻는 재미는 결국 더 큰 소비를 요구하거나, 또 다른 소비처를 찾아 떠돌게 만들거든요. 제가 말하고 싶었던 건 ‘일상의 재미’예요. 가끔 시간을 내어 소비하는 재미가 아니라, 매일의 삶이 재미있는 상태요. 도시의 미래를 상상하는 사람들도 결국은 ‘어떻게 하면 시민의 하루하루가 더 즐거워질까?’를 중심에 두고 고민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제가 잡지를 만드는 이유도 결국 그 안에 있고요. 저는 그런 도시를 만들고 싶었고, 지금도 여전히 그래요.
요즘 편집장님을 설레게 하는 것은 뭐예요?
저는 여전히 인터뷰하러 다니고 취재하는 일이 참 재밌어요. 우리 출판사에서 나오는 책들을 가만히 들여다보는 시간도 좋고요. 그런데 가장 재밌는 건 혼자 몽상하고 망상하는 시간이에요. 아까 말씀드렸듯 ‘우리 도시가 이랬으면 좋겠다.’ 하고 상상하는 거죠. 중요한 건 거기서 끝나지 않는다는 거예요. 저는 그 상상을 글로 써서 세상에 공개할 수 있잖아요. 어쩌면 그게 제가 잡지를 만드는 진짜 이유인지도 모르겠어요. 세상에 하고 싶은 이야기는 너무 많은데, 제가 정치인이나 연예인이 되어 방송에서 말할 수는 없으니까요. 결국 잡지라는 매체를 빌려 제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계속 세상에 건네고 있는 게 아닐까 싶어요.
세상에는 이야기를 전하는 수많은 매체가 있고, 이제는 짧고 빠른 콘텐츠가 주류가 된 시대잖아요. 그럼에도 긴 호흡의 글과 인터뷰를 담은 ‘종이 잡지’가 여전히 필요하다고 믿으시나요?
그럼요. 결국은 사유의 문제라고 생각해요. 사유가 사라진 시대라는 건 깊이가 사라졌다는 뜻이기도 하거든요. 요즘은 사람이 존중받는 한 인간이라기보다 ‘소비자’로만 존재하는 것 같아 슬플 때가 있어요. 지금의 출산 장려 정책조차 인간을 존엄한 존재가 아닌 경제 규모를 유지하기 위한 소비자나 노동자로 바라보는 느낌이 들 때가 있거든요. 그런데 인간이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지키려면 결국 사유해야 해요. 저는 사유의 훈련이 글 읽기와 글짓기를 통해 가능하다고 믿고요. 글짓기의 본질은 사유니까요. 사유가 없으면 글을 ‘짓는’ 일 자체가 불가능하거든요. 다음 세대를 위한 교육 역시 읽고 쓰는 힘에서 시작된다고 믿어요. 지금 유행하는 쇼츠나 짧은 영상은 깊고 지속적인 사유를 만드는 데는 한계가 있어요. 그래서 읽고 쓰는 행위는 학창 시절에만 머무는 게 아니라, 성인이 되어서도 일상적으로 이어져야 한다고 생각해요. 사람들이 깊게 사유할 줄 알고 인격적으로 도야될 때, 비로소 제가 꿈꾸는 조금 더 행복한 세상도 가능해지지 않을까 싶습니다.
오랫동안 기록해 온 사람으로서, 과거 문장을 다시 읽을 때 가장 먼저 보이는 건 무엇인가요?
요즘 잡지에 예전 기사를 다시 엮어 싣는 ‘다시 읽기’ 코너를 준비하면서 10년, 20년 전 기사를 계속 보고 있는데요. 한마디로 ‘참 팝했구나.’ 싶어요. 저도 젊었고 함께하던 기자들도 젊어서인지 문장이 굉장히 반짝거리고 톡톡 튀더라고요. 물론 지금 보면 문장은 훨씬 엉망이죠(웃음). 그런데 그 시절에만 있던 특유의 명랑함이 보여요. 지금은 노련해지고 깊이도 생겼지만, 그 명랑함은 조금 사라진 것 같아서 가끔은 ‘더 젊은 편집장에게 자리를 넘겨줘야 하나.’ 싶은 생각도 해요.
그럼에도 앞으로 잃지 않고 계속 가져가고 싶은 태도가 있다면요?
더 파격적이고 싶어요. 세상이 당연하다고 여기는 문법들을 깨는 작업을 더 많이 해보고 싶죠. 잡지 순서를 일부러 이상하게 구성해 보기도 하고, 예전에는 표지 디자인 없이 잡지를 발간한 적도 있어요. 그랬더니 한 독자분이 전화해서 “지금까지 본 표지 중 제일 좋다.”고 하시더라고요. 그런 식으로 관성을 깨는 시도를 할 때 정말 신나요. 한때는 제가 예술을 못 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돌이켜보면 제가 해온 이런 일들도 일종의 퍼포먼스나 예술이 아니었을까 싶어요. 24시간 동안 잠들지 않고 대전을 걸으며 사유의 결과를 기사로 만들기도 했고, 대전의 번화한 거리를 고정된 카메라로 한 시간마다 기록한 적도 있거든요. 생각해 보면 저는 그런 일들에서 재미를 느끼는 사람인 것 같네요. 요즘은 그런 파격이 조금 뜸했는데, 이번 인터뷰를 계기로 다시 한번 재미있는 일을 벌여봐야겠어요.
에디터 황진아
포토그래퍼 정찬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