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구의 산책

밥솥

Rice Pot

밥솥

흙으로 빚은 밥솥에 흙에서 자란 쌀을 담아 밥을 짓는다. 윤기가 있고 부드러우며 고루 익어 향긋한 밥으로 식탁을 차린다. 밥솥도 나도 건강한 어른으로 성장해간다.

밥의 취향

대부분의 음식이 그렇듯 밥도 갓 지었을 때 가장 맛있다. 구수한 냄새와 열기를 느끼며 밥알들이 반짝이는 걸 보면 절로 미소가 지어진다. 주식으로 매일 접하며 덤덤히 넘기다가도 찰기나 익음 정도, 쌀과 잡곡의 비율 등에 대해 물으면 다들 취향과 소신을 꺼내놓고, 문득 허기를 느끼는 것이 밥이다. 나의 경우엔 역시 ‘고슬고슬하고 탄력이 살아있는 백미밥’이 좋다. 그래서 전기밥솥과 압력솥의 시절을 지나 도기솥에 정착하게 되었다. 식구들이 한 끼 먹을 분량의 밥을 도기솥에 올리고, 한두 가지 요리를 빠르게 완성하고, 찬을 꺼내어 밥상을 차리는 사이 쌀알이 밥이 되는 냄새가 근사하게 퍼진다. 밥솥째 식탁에 옮겨 뚜껑을 열었을 때 폭죽처럼 피어오르는 온기와 향은 열 반찬 못지않다. 바닥에 살짝 누룽지가 생기게 해서 숭늉을 끓이기도 하고 버섯이나 제철 나물을 얹어 솥밥 만찬을 벌일 때도 있다. 물론 햇반이나 냉동실에 얼려 놓은 밥으로 후다닥 대신해야 하는 날들도 부지기수. 도기솥이 푸른 가스 불꽃 위에서 밥내를 힘차게 뿜는 모습은 내 생활이 제대로 작동하고 있다는 증거다.

사용해야
완성되는

도기솥으로 밥을 짓다 보면 사용설명서가 장황한 것에 비해 실제 사용법이 너무 간단해서 놀라게 된다. 적당히 밥물을 맞추고 속뚜껑과 겉뚜껑의 구멍이 90도를 이루게 닫은 다음 중불로 20여 분. 따로 불 조절도 필요 없이 여기까지가 밥 짓기의 끝이다. 다시 20여 분 뜸을 들여 먹기만 하면 되니 압력밥솥에 견주어도 크게 차이 나지 않을 정도로 손쉽다. 반면 처음 사용 시 눈막음을 하고, 사용 후에는 세제 없이 닦아 바짝 말려 두어야 한다는 전후 관리법은 아무래도 조심스럽다. 그보다 더 마음의 준비가 필요한 대목은 사용하면서 반드시 금이 가고, 그래야 비로소 완성품이 된다는 것. 아즈마야東屋에서 대수롭지 않게 “바닥의 균열은 아주 당연한 사용 과정의 일부이다.”라고 설명해주었을 때, 겉으론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마음속에서는 불량품 교환을 거부하려는 심사인가 싶은 의구심이 뭉게뭉게 피어올랐다. 드디어 균열이 생긴 밥솥에 처음 밥을 짓던 시절에는 이러다 두 쪽이 날까 싶어 조마조마, 최대한 거리를 유지하며 지켜보곤 했다. 이젠 안다. 박스에서 막 꺼낸 새 제품이 사실은 미생이며 몇 년간 불 위에서 숨을 쉬며 깊어진 저 멋진 상흔이 이 밥솥을 완생으로 만드는 것임을. 우리가 제법 정성 들여 밥을 지을 수 있을 만큼 좋았던 날들이 이 밥솥 바닥의 조심스러운 단층으로 남아 있다.

이가 밥솥의
탄생

아즈마야의 이가 밥솥Azmaya Rice Pot은 비와코 호수가 위치한 이가伊賀 지역에서 만들어졌다. 도기를 만들기에 최적이라고 하는 이 지역의 흙을 거친 상태 그대로 물레를 돌려 성형한다. 흙 속의 작은 자갈이 나 거친 입자가 장인의 손을 상하게 하니 하루에 만들 수 있는 개수는 제한적이다. 흙과 유약은 같은 지역의 것을 사용하라는 선인의 가르침에 따라 이곳의 돌과 식물재로 천연 유약을 만들어 바른다. 고온으로 굽는 과정에서 흙에 섞인 유기물이 연소되면서 작은 기공들이 제대로 만들어진다. 이 기공은 공기와 불길이 드나드는 통로이자, 도기솥이 맛있는 밥을 짓게 하는 비결이 된다. 반면 같은 도기솥이라고 해도 시장에 유통되는 많은 제품들이 파틸 라이트를 사용하거나 몰드로 성형하고 때로는 실리콘을 덧발라 출시된다. 사용과 관리의 편의를 위해 오늘날의 제작 방법을 적용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이치지만, 이왕 도기솥을 사용하는 것이라면 처음부터 끝까지 정직하게 원리원칙대로 만들어진 제품에 마음이 간다. 전기밥솥이 말을 하고 햇반이 엄마 솜씨를 능가하는 세상이라 더 그렇다.

아즈마야 東屋

우리 시각에서 보면 일본만큼 과거의 유산을 소중히 이어온 나라도 없지만, 일본 내에서는 서구의 생활 방식을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일본 전통 공예의 명맥이 사그라져 간다는 위기감이 존재한다. 아즈마야는 생활용품 부문에서 이런 문제의식을 느끼고 전국 각지의 장인들과 직접 협력하며 제품의 기획과 품질 관리, 유통을 책임지는 새로운 비즈니스 모델을 만든 1세대 회사다. 장인의 공방, 지역 중간상, 도시의 도매상, 최종 소매상으로 이어지는 긴 유통 과정을 단순화하고, 공예에 대한 깊은 조회를 바탕으로 좋은 형태 중에서도 가장 좋은 것을 찾아내며, 이가 밥솥의 예와 같이 무엇 하나 타협하지 않고 만드는 제대로 된 물건으로 정평이 나 있다. 이들의 제품이 고객들의 호응을 얻으며 빔즈Beams, 스파이럴Spiral등 요즘 각광받는 숍에 놓인 모습을 보고, 도시로 떠났던 장인의 아들이 고향에 돌아가 가업을 이어가기로 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부러운 마음으로 본보기로 삼는 브랜드다.

Rice Pot, Azmaya | 26만 8천원, TW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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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사진 김희선

글·사진 김희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