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구의 산책

琉璃盞 유리잔

투명하게 잘 닦인 유리잔에 좋아하는 음료를 담는다. 술이어도 좋고 그저 차가운 물이어도 좋다. 유리잔의 날렵한 가장자리와 입술이 맞닿는 순간은 도구와 내가 가장 내밀해지는 시간이다.

균형을 담은 잔

AYE는 종이처럼 얇고 가벼우며 짧은 스템이 특징인 유리잔이다. 와인잔의 세계에서 얇음과 섬세함은 하이엔드 제품들이 내세우는 장점이다. 이들은 쭉 뻗은 몸매와 도도한 표정, 종류별로 세분화된 라인업을 자랑한다. 그 반대쪽엔 짧은 스템과 다부진 체격의 서민적인 잔들이 있다. 유럽의 떠들썩한 바에서 흔히 활약하는, 몸을 사리지 않고 여러 음료를 담아내며 일하는 잔들이다. 집에서 호젓하게 적당한 와인 한잔을 곁들인 시간을 떠올려보자. 이 중 어느 쪽을 고를까? 풀사이즈 고급 와인잔은 아무래도 부담스럽다. 내일 아침에 설거지도 내 몫인 걸 생각하면 더더욱 손이 가질 않는다. 그렇다고 아무 잔에나 따르자니 정취가 나질 않는다. 너무 많지도 적지도 않은, 딱 적당한 호사를 누리고 싶을 때 꺼내 드는 물건. 즐기는 나와 치우는 나를 동시에 위해주는 흔치 않은 균형이 이 잔에 담겨 있다.

액체의 위안

커피, 차, 술, 주스, 혹은 그저 적당한 온도의 물. 우리는 한 컵의 무언가에서 간단하면서도 확실한 휴식과 위로, 해갈을 얻는다. 그래서인지 컵은 가장 기본적이면서 사적인 식기로 꼽힌다. 아무 요리를 안 하는 사람들도 좋아하는 컵 하나 정도는 곁에 두는 것이다. 그중에서도 유리컵은 재료의 특징이 기능과 신비한 조화를 이룬다. 유리는 겉보기엔 고체지만 고체의 결정구조와는 다른 물체, 극단적으로 점도가 높은 액체이기 때문이다. 고대인들에게 유리란 귀중한 보석이자 ‘녹지 않는 얼음’, ‘불과 재에서 태어난 불사조’ 등의 칭호를 단 신비의 물질이었다. 메소포타미아인지 이집트인지 알 수 없는 과거의 먼 곳에서부터 왕들의 무덤과 고승의 사리함을 지나 이곳까지. 유리의 여정을 생각하며 이 신비롭고 귀한 ‘액체’를 마음에 쏙 드는 형태로 다듬어 곁에 두는 것, 그것을 즐기는 일은 청량한 위안이 된다. 마음속의 딱딱하고 불투명한 것을 걷어낸다.

AYE의 탄생

AYE는 고온에서 녹인 말랑한 상태의 유리를 금형(몰드), 일종의 틀 안에 입으로 불어 넣는 방법으로 만들어진다. 아무런 틀 없이 공중에서 불어 만드는 것에 비해서는 상당히 효율적이지만, 여전히 사람의 수고와 노련함이 필요한 작업. 그리고 결과적으로는 한 개 한 개의 표정을 조금씩 다르게 만드는 제작 방식이다. 운 좋게 도쿄에 있는 유리 공장을 방문해서 제작 과정을 직접 볼 기회가 있었는데 용광로 같은 중앙 화로를 중심으로, 사람과 기계와 소도구들이 솜씨 좋게 협력하면서 둥근 워크 플로우를 그리고 있었다. 그곳은 순환하는 생태계 같기도 하고 이글대는 태양을 축으로 반짝이는 별들이 끊임없이 태어나는 소우주 같기도 했다.

AYE를 만드는 곳은 1990년에 설립된 일본 브랜드 타임앤스타일이다.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가구 라인업을 살펴보면 테이블과 의자, 소파 등 서구의 생활 양식에 기반을 둔 품목들이 일본의 미감과 규모로 정교하게 다듬어져 있다. 일반 소비자 제품뿐 아니라 호텔이나 레스토랑과의 협업도 활발히 하고 있는데 국내에서는 강원도 씨마크 호텔에서 이들의 작업을 만나볼 수 있다. (많은 사람이 기억하는 로비의 기념비적인 테이블이 그중 하나. 타임앤스타일은 단 한 그루의 나무로 20미터가 넘는 상판을 제작하였다. 국내 운송을 위해 아쉽게도 두 파트로 절단해야 했다고 한다.) 요시다 대표는 일본에서 태어나 젊은 시절을 독일에서 보내고 일본에 돌아와 타임앤스타일을 시작하였다. 일본인의 시각에서 서구의 삶을 바라보고, 다시 유럽의 시각으로 일본의 전통을 응시해온 개인적 이력과 시각이 이들의 제품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AYE Wine Glass, Time & Style | 5만 5천원, TW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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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사진 김희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