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심만이 내 세상

팍팍한 세계 속에서 무언가를 좋아하는 마음은 쉽게 멸시당하고야 만다. 그러나 현실이 어둡더라도 진심이 뿜어내는 빛은 가려지지 않는 법이니. ‘내 사랑이 이겨.’라는 믿음으로 세상과 맞서 싸우고 있는 덕후들 곁에 서서 있는 힘껏 소리쳐 본다. 이것이 우리의 사랑 방식이라고.

한계 없는 사랑은

우리를 강하게 만들지

이원석 <킬링 로맨스>(2021)

사랑으로 충만하던 시절, 종종 좋아하는 연예인을 위해 어디까지 몸을 내던질 수 있을지 가늠해 보곤 했다. 사라졌던 최애와 7년만에 조우한 범우는, 다시금 그 고민에 빠지고 만다. 11년 동안 쉬지도 않고 일하며 대한민국에 ʻ여래이즘’ 열풍을 불러일으켰던 황여래. 마지막으로 찍은 영화가 폭삭 망한 뒤 돌연 한 남자와 결혼하겠다며 연예계를 떠났던 나의 스타. 언제 어디서나 행복하기만을 빌었건만, 조나단에게 가스라이팅을 당하며 꼭두각시처럼 살아가는 모습을 본 범우는 결심한다. “여래님 평생 이러고 살 거예요? 제가 꼭 그 자식 죽여버릴게요.” 어떻게 해서든, 여래의 행복을 되찾아 주겠다고.

그렇게 호기롭게 동맹을 맺었건만 조나단의 생명력은 끈질기다. 지옥 끝에서도 번번이 살아 돌아온다. 무엇보다도 숨이 끊어지기 직전, 범우의 착한 마음이 발동을 건다. 네가 못 하면 내 손으로라도 죽여야겠다며, 여래가 이를 악물고 조나단을 해하려는 순간에도 범우는 최애의 손에 피 한 방울 묻히지 않겠단 마음으로 그가 한 노력을 모두 수포로 돌린다. 그런 그가 여래를 위해 해줄 수 있는 것은 누나가 고통스러울 때 곁에 있어주고, 도망칠 때 함께 달려주고, 아무도 누나를 위해 눈물 흘리지 않을 때 눈물 흘리는 것뿐이다. 

“자네는 꿈이 뭔가.” 조나단의 질문에 그는 꿈이 없다고 답한다. 범우가 ʻ서울대 합격’ 같은 개인적 성취에 목매는 인물이었다면 이 이야기는 시작되지도 않았을 것이다. 범우가 굳이 입 밖으로 내지 않았던 꿈은 여래가 행복하게 자신의 삶을 살아가는 것 뿐이다. 러닝타임 내내 우유부단하다가도 결정적인 순간 여래의 팬들을 불러 모아 함께 노래를 부르는 범우는 어쩐지 결연해 보인다. 결국 범우가 여래에게 줄 수 있는 건 밑도 끝도 없는 지지와 마음이다. 그 사랑만이 여래를 일으키고, 그가 그로 존재하게 만든다. ʻ로맨스’가 단순히 이성애적 사랑만 의미하지 않는다면, 보다 폭넓은 사랑을 담아내는 그릇이라면, 팬과 스타의 사랑 또한 로맨스란 장르로 구분될 수 있지 않을까. 우리는 흔히 ʻ덕후’의 사랑을 그저 일방적인 것으로 취급한다.

그러나 스타와 덕후의 관계는 우리가 알고 있는 것 그 이상으로 애틋하다. 서로의 삶에 개입할 수는 없지만, 결정적인 순간 등 떠밀어 줄 수 있는 사이. 한계 없는 사랑이 가능했던 우리들. 내가 사랑하는 이의 행복을 위해서라면 세상 끝까지 가볼 수도 있을 것 같았던, 불꽃 같은 마음을 품은 그때를 돌아본다. 그 사랑이 남긴 미미한 열기가 아직도 나를 따뜻하게 만든다고.

나의 진심은

한 치의 거짓도 없었음을

김진화 <윤시내가 사라졌다>(2020)

사람을 너무나도 사랑하는 마음에 평생 그림자가 되어 뒤를 좇는 삶을 택한 이들이 있다. 신순이는 윤시내의 팬이자 이미테이션 가수 ʻ연시내’로서 오랜 시간 그의 그늘 뒤에서 살아왔다. 선생님 노래를 부를 수만 있다면 평생 나이트클럽 같은 음지에서 활동해도 괜찮을 것만 같았다. 콘서트 당일, 윤시내가 사라지기 전까지만 해도 그랬다. 하루아침에 흔적도 없이 자취를 감춘 우상. 충격적인 사건은 신순이의 마음에 생채기를 남겼을 뿐 아니라 그의 근간마저도 흔들어 버린다. 진짜가 사라졌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팬심 담아 가짜 행세를 해온 그는 찬밥 신세로 전락한다. 

이대로 물러설 순 없다! 순이는 잠적해 버린 자신의 우상을 찾기 위해, 그를 위해 담갔던 인삼주를 품에 안고선 그의 소식을 알 만한 이미테이션 가수들을 수소문하기 시작한다. 그 여행길에는 관종력 넘치는 그의 딸 ʻ하다’ 또한 함께다. 가족도 뒷전일 정도로 윤시내 뒤만 쫓는 순이를 이해할 순 없지만, 사람들 관심이라면 헤어진 남자친구를 찾아가 깜짝 카메라 찍는 일 또한 마다하지 않는 하다에게 엄마의 무모함이란 대어나 다름없다. 덕후들의 진심? 그런 거 모르겠고, 이미테이션 행세나 하는 사람들 따라다니며 이목이나 끌어볼 작정이다. 모녀가 윤시내의 계보를 잇는 수많은 가짜를 만나는 동안, 둘 사이의 오랜 문제들은 걸림돌이 되어 그들의 앞길을 막는다. 

순이는 하다가 자신의 진심을 이용해 인터넷 방송을 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크게 실망한다. 사과는커녕 “사람들 앞에서 윤시내 노래 한 번만 불러달라”며 한술 더 뜨는 딸을 보고도 아랑곳하지 않는다. 날이 선 언어로 가짜의 삶에 대해 쏘아붙여도 그가 당당할 수 있는 이유는, 단 한 번도 그 일에 ʻ진심’이 아니었던 적이 없어서다. 윤시내를 좋아하는 마음만으로 열정을 다해 그의 몸짓과 목소리를 따라 해오던 시간들. 사람들은 몰라줘도, 나만큼은 나의 순애보를 알고 있다면 그것만으로 족하다. 그 마음은 고스란히 나에게 되돌아와 위로를 전해준다. 우상을 생각하며 오랫동안 보관해 온 인삼주를 한 번에 들이켜고 맛있다며 웃는 순간 또한 그렇다. 

그런 순정을 알아주는 사람이 한 명 더 있다. 여정의 끝에서 마주한 윤시내 앞에서 순이는 그간 나이트 클럽에서 활동하며 갈고닦은 실력을 선보인다. 윤시내는 그런 그를 나무라거나 비웃지 않고 가만히 지켜본다. 최선을 다해 열창하는 연시내 뒤에 서 있을 신순이의 모습을 바라봐 준다. 내가 여태까지 부르던 것이 그의 노래가 아니라 나의 노래였다는 것을 알아차린 순간, 가짜에서 진짜로 거듭나는 그때, 신순이가 읊조리는 가사는 오래도록 우리의 마음속에 머무른다. “벗어나고파. 그대에게서 벗어나고파.”

가진 건

좋아하는 마음뿐이라 해도

김초희 <찬실이는 복도 많지>(2019)

좋아하는 마음 하나만으로 온몸과 마음을 다했던 일이 망해버렸을 때, 한평생을 바쳐 일궈온 세계가 무너져 내린 듯한 상실감에 휩싸이곤 한다. 천년만년 좋아하는 사람들과 함께 영화만 하겠다는 일념 아래 거장 밑에서 프로듀서 일을 하며 청춘을 헌납한 찬실은 감독이 급사하자 하루아침에 일자리를 잃고야 만다. 영화 곁에서라면 시집을 못 가도, 땡전 한 푼 없이도 괜찮을 줄 알았는데… 현실은 애정만으로 버티기엔 녹록지 않다. 벼랑 끝에 선 채, PD로서의 삶을 이어갈 수 있을지 고민하는 찬실. 그런 그의 앞에 별안간 어릴 적 우상이었던 ʻ장국영’이, 아니 자신이 장국영이라 주장하는 귀신이 나타난다.

찬실이 현실의 문제와 좋아하는 마음 사이에서 갈피를 잡지 못할 때마다 국영은 늘 그를 영화 편으로 돌려놓는다. “찬실 씨, 영화 안 하고도 살 수 있을 것 같아요?” 자신이 다시 영화를 할 수 있을 것 같냐고 되묻는 찬실에게 중요한 건 그게 아니라 진정 자기가 원하는 게 뭔지 모르는 것이 문제라고 힘주어 말한다. 영화와 멀어지기로 결심하며 그간의 짐을 다 내놓을 때 찬실보다 더 슬퍼하기도 한다. 외부의 사건들이 나의 진심을 희미하게 만드는 상황 속에서도 끊임없이 자신이 원하는 게 뭔지 알아야 행복해진다며 용기를 북돋는다. 찬실은 그의 말을 못 이기는 척 믿어보며 부메랑처럼 영화의 곁으로 돌아오고야 만다. 영화에 대한 자신의 사랑을 깊이깊이 생각하게 된다. “장국영 씨, 지금보다 더 젊었을 때는 저는 늘 목말랐던 것 같아요. 사랑은 몰라서 못 했지만 내가 좋아하는 일만은 나를 꽉 채워줄 거라고 믿었어요.” 찬실은 자신의 미련했던 과거를 인정하며 사는 게 뭔지 궁금해졌다고 이야기한다. 그리고 그 삶 속에 영화도 있다고. “제가 먼 우주에서도 응원할게요.” 그 고백을 가만 듣고 있던 국영은 자신의 역할은 끝났다는 듯, 찬실의 이마에 입을 맞추고선 사라진다.

발연기라고 욕을 먹으면서도 끝끝내 카메라 앞에 서는 일을 포기할 수 없는 소피도, 인생엔 영화보다 더 중요한 게 많으니 영화 없이 살 수 있을 것 같다고 말하면서도 끈질기게 시나리오를 쓰는 영도. 인물들은 모두 변변찮은 삶 속에서도 좋아하는 것을 놓지 않은 채로 살아가고 있다. 찬실은 그런 그들과 함께, 고민을 거듭하며 오르내리던 산을 내려가면서 소원을 빈다. “우리가 믿고 싶은 거, 하고 싶은 거, 보고 싶은 거.” 영화라는 광활한 우주를 헤맬 공동체들의 뒷모습은 미련하고도 다정해 보인다. 그 순간 문득 나의 곁에는 무엇이 남았는지 주위를 둘러보고 싶어진다. 나를 에워싼 수많은 사랑과 그들이 견고하게 쌓아 올린 나의 세계를 가늠하다 보면, ʻ이것이 나의 복이 아닐까?’ 하고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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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디터 오은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