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도 말고 덜도 말고 아파트 글자

전가경·정재완―사월의눈

나는 아파트가 아닌 곳에서 살아본 적이 없다. 책《아파트 글자》를 보며 작지만 단단하던 유년 시절을 떠올린다. 나를 ‘1층 이쁜이’로 부르던 5층 아저씨는 잘 살고 있을까? 옆집 꼬맹이 찬일이는? 은퇴 소식으로 나를 엉엉 울린 경비아저씨는? 아직도 부개역을 지날 때면 내 유년기의 전부, ‘대동아파트’ 다섯 글자를 찾기 위해 바삐 눈을 굴린다. 

Question. 1

수많은 거리 글자 중

왜 ‘아파트 글자’였나요?

“2000년 초반부터 간판, 도로 표지판, 낙서, 안내문 등 거리 글자에 관심을 가져왔어요. 거리 글자는 장소 특정적이며 사용자들에 의해서 덧붙여지는 특징이 있죠. 이처럼 삶의 현장에서 생성되고 소멸하는 글자의 다양한 표정을 관찰하면서 지금도 많은 영감을 받고 있어요. 또한, 아파트 글자에도 꾸준히 관심을 가져왔는데요. 특히 유별나 보인 것은 대구의 오래된 아파트인 ‘경북아파트’ 글자였어요. 입체로 그린 글자를 페인트로 칠한 건데, 글자 형태와 연출 솜씨가 범상치 않았거든요.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아파트 글자를 모으기 시작했어요.”

Question. 2

시간에 따라 아파트 글자도

변했을 것 같아요.

“1970년대부터 80년대까지의 아파트는 층수가 낮고 외벽에 페인트로 글자를 그리는 방법을 주로 사용했어요. 따라서 납작 붓으로 만들어진 획의 모양이나 외벽 도장공의 즉흥적인 장식, 마감 처리 등을 눈으로 볼 수 있죠. 멀리서도 잘 보이도록 글자를 굵게 그리거나 획을 단순화해서 그리고, 입체 형태의 글자를 그린 것도 이 시대의 특징이에요. 타이포그래피가 주류 제도권 엘리트 학문이라면, 외벽도장공이 아파트 글자를 그리는 작업은 현장의 실천 행위라고 생각해요. 글자를 시각적으로 표현하는 행위라는 점에서 그 본질은 같죠. 최근에 건설된 브랜드 아파트들은 글자를 그리기보다는 붙이는 것이 일반적이에요. 브랜드의 정체성을 관리하기 위해 엄격한 매뉴얼이 적용되어 획일화된 것도 예전과는 다른 지점이죠.”

Question. 3

수집한 글자 중 베스트 아파트 글자를

꼽아주세요.

“앞서 언급한 1982년에 그려진 ‘경북아파트’가 오랫동안 인상에 남아 있어요. 지금은 재건축되어 이제 글자는 사진으로만 남아 있죠. 대구에서 최초로 지어진 동인아파트(1970)는 올 연말에 철거가 예정되어 있는데요. 이곳 역시 건물과 함께 아파트 글자도 사라지겠죠. 도시의 변화는 그곳에 기생하는 글자의 생성과 소멸에 고스란히 영향을 미쳐요.”

Question. 4

오래된 아파트 글자에는

어떤 시간이 담겨 있을까요?

“거리 글자가 가장 투명하게 반영하는 것은 도시의 과거와 현재예요. 대구의 북성로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70년대 간판이 시간의 때를 입은 채 걸려 있었습니다만, 도시 미관을 해친다는 이유로 간판정비사업이 진행되었어요. 과연 30-40년 묵은 간판 글자가 교정의 대상이 될 수 있을까요? 시간을 쌓아간다는 것, 즉 미래라는 단어를 떠올리면 ‘현재가 낡아진 때’라는 기분이 들어요. 사람이 노화하고, 도시가 쇠퇴하듯 글자 역시 낡아갈 거예요. 낡은 그것이 가지는 매력은 ‘익숙함이 주는 편안함’일 수도 있고, ‘낯섦이 주는 시각적 환기’일 수도 있을 텐데요. 우리는 곧 사라질 것에 대해 본능적으로 아쉬움을 느끼고 기록에 집착하는 것 같아요. 머리로 생각하기도 전에 몸이 먼저 반응하여 스마트폰으로 사진을 찍는 것처럼요.”

네모꼴에 가둔

거리 글자라는 예술

“거리의 간판과 더불어 아파트 외벽에 그려진 글자를 관찰하는 것은 과거의 타이포그래피를 현재의 일상에서 볼 수 있는 기회이다. 작명과 표현 방식이 완전히 달라진 지금, 1980년대에 그려진 글자 레터링은 어디서 볼 수 있을까. 잡지 제호나 광고 지면에 무수히 많던 글자 레터링은 어디론가 숨어버렸다. 하지만 거대한 아파트 벽면 글자 레터링은 아직 숨지 않았거나 ‘못’했다. 언젠가 그 벽이 허물어질 때, 글자도 함께 사라질 것이다.”

– 정재완(사월의눈 북 디자이너)

책을 한 장 한 장 넘기면서 아파트를 생각한다. 내가 살아온 아파트를, 나와 함께 살아온 아파트 주민을, 친구가 살던 아파트를, 그 모든 아파트 이름과 기억의 질감을. 우리는 아파트에 살거나 혹은 살지 않는다. 아파트 안 또는 그 밖으로 이루어지는 세상 안에서 아파트는 흔적을 남긴다. 《아파트 글자》는 그래픽 디자인 분야에서 글과 디자인이란 행위로 종사하는 두 사람이 2009년 ‘경북아파트’ 레터링을 발견한 이후 틈틈이 수집해온 아파트 글자들을 선보이는 첫 아파트 글자 컬렉션이다. 오랜 시간 천천히 변해온 아파트 글자의 모습은 잘 기획된 전시보다 흥미롭다. 책을 덮고 난 뒤, 아파트 외벽도장공이 되어 나만의 아파트 글자를 그려본다. “탈네모꼴이라는 사건을 모르는 고요한 세상”에서 자진하여 “형식미 안에 갇혀”보는 것이다. 아파트 키드는 이 네모의 세상이, 기분 좋게 아늑하다.

《아파트 글자 Apartment Letters》

강예린, 윤민구, 전가경, 정재완 | 사월의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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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디터 이주연

사진 사월의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