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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선 이야기가 드넓고 뜨거운 분지에 찾아왔다.
원래 알던 이들인 것처럼 대구는 오래된 집, 풀과 나무를 묵묵히 내어준다.
이 도시에 잠시 머무른 허구의 장면들. 그 세 편의 삶을 따라가 본다.
임순례
〈리틀 포레스트>(2017)
작은 집은 상경한 혜원을 기다리며 묵묵히 고향을 지켰다. 몇 년간 아무도 살지 않았던 이곳에 어느 날 혜원이 들어선다. 성공의 기쁨을 한 아름 안고 돌아온 것도, 자신을 기다리던 가족을 보러 온 것도 아니었다. 뜻대로 되지 않는 서울 생활에 싫증이 나 덜컥 내려왔을 뿐이다. 딸을 두고 갑자기 집을 떠나버린 엄마도 그곳에 있을 리 없다. 힘 빠진 혜원을 맞이하는 집에서 그가 하는 일은 그저 잘 먹고 잘 자는 것. 고향에 머무는 오랜 친구 재하, 은숙과 함께 농작물을 키우며 매일을 살아낸다. 배추전, 감자빵, 아카시아꽃 튀김, 콩국수… 계절을 말하는 음식을 요리하며 엄마와 함께하던 기억을 거슬러 올라가고, 평생 이해할 수 없던 엄마를 좀더 너그럽게 바라보게 된다.
웃음과 음식으로 충만한 사계의 중심에는 집이 있다. 혜원이 요리하고 싶을 때면 구옥은 언제든 부엌을 내어주고, 그가 점점 치유되어 갈수록 먼지 쌓이던 찬장에는 식재료가 늘어간다. 친구들과 한잔 기울이며 깔깔거릴 때는 아담한 거실이 모임 장소가 된다. 재하가 데려온 강아지 ‘오구’의 새 보금자리도 바로 이곳. 이토록 다정한 혜원의 집은 2023년 대구로 편입된 경북 군위군에 자리한다. 고즈넉한 기와지붕과 집을 감싸는 푸른 나무는 혜원의 터전을 살펴보고 싶은 이방인들을 환히 반긴다. 불쑥 찾아온 영화 속 주인공을 안아주었듯, 누구에게든 열려 있어 언제든 방문해도 좋다. 부엌에 머물러 잠시 혜원이 경험한 날들을 떠올려볼까. 여전히 너그럽고 따스한 온기와 치유가 흐를 것이다.
김현정
〈나만 없는 집〉(2017)
작고 낡은 아파트. 열한 살 세영은 이곳에서 늘 혼자다. 부모님은 일로 바빠 혼자 밥 먹는 일이 부지기수. 하나뿐인 언니 선영이 있어도 세영은 늘 외롭다. 사춘기 탓인지 동생이 귀찮기만 한 언니는 날카롭고 쌀쌀맞다. 어느 날 세영의 무료한 일상을 콩닥거리게 할 소식이 들려온다. 학교 걸스카우트에 입단하고 싶은 사람은 회비와 함께 신청서를 내야 한다는 것. 부모님 허락만 있다면 언니 선영이 입는 근사한 단복을 세영도 가질 수 있다. 오직 걸스카우트만 입을 수 있는, 단정하고 예쁜 옷을. 부푼 마음을 안고 친구들에게도 걸스카우트에 들어가겠노라 선언했지만 엄마의 반응은 달갑지 않다. “한집에 무슨 둘씩이나 걸스카웃이고.” 세영은 공장에서 돌아와 지친 엄마 앞을 막아서지만 안 된다는 대답만 돌아올 뿐 정확한 이유는 듣지 못한다. 아빠와 언니도 무관심한 건 마찬가지. 결국 세영은 언니 옷을 훔쳐 운동장에 선다. 걸스카우트가 된 친구들 사이에서 잠시나마 진짜가 된 기분을 누려본다. 결국 언니에게 들켜 흠씬 얻어맞고 찾아간 엄마의 일터. 눈물을 닦아주는 엄마에게 세영은 묻는다. “왜 날 혼자 뒀어?” 네 식구가 사는 세영의 집에는 사실 세영만 없다.
작은 아이의 시선을 따라가며 외로움을 이야기하는 이 단편 영화는 대구·경북 지역에서 활동하는 청년 영화인들이 제작했다. 대구에서 나고 자란 김현정 감독의 자전적인 경험이 모티브가 되었다고. 1998년이 배경인 세영의 집을 찾기 위해 감독은 대구 전역을 돌아다녔다. 마침내 찾은 장소는 감독이 살던 동네의 재개발 예정이던 아파트. 세영의 이야기가 덧입혀진 낡은 공간에는 낯설지 않은 쓸쓸함과 공허함만이 맴돈다. 조용한 부엌에서 세영이 홀로 식사하는 장면으로 영화는 막을 내린다.
조근식
〈그해 여름〉(2006)
대학생 석영에게 1969년 여름은 평생 지워지지 않을 얼굴을 새겼다. 엄한 아버지의 눈초리가 싫어 친구를 따라 처음 와본 농활. 기대도 설렘도 없이 내려온 시골은 서울과 달리 무료하기만 하다. 그곳에서 우연히 만난 도서관 사서 정인. 엉뚱하고 허점 많은 그녀가 계속 눈에 밟히던 석영은 정인을 따라다니며 괜히 말을 걸거나 짓궂은 장난을 친다. 석영이 귀찮게 느껴지다가도 소소한 농담에 자꾸 웃음이 나는 이유는 정인의 마음만이 안다. 읍내에 나가 함께 음악을 듣거나 늦은 저녁 시골길을 걷는 기억이 쌓이며 둘은 점점 가까워지고, 두 사람은 서울행 열차에 함께 몸을 싣는다. 행복을 그리던 때도 잠시, 이별은 생각보다 빠르게 찾아온다. 월북한 아버지 때문에 간첩죄를 뒤집어쓴 정인이 석영을 지키고자 그를 떠난 까닭이다. 긴 세월이 흘러 희끗희끗해진 머리로 석영이 다시 찾아간 마을에 정인은 더 이상 없다. 그녀를 그리며 찾아간 만어사. 물고기들이 용왕 아들을 따라왔다가 그가 하늘로 떠나자 그리움에 돌로 변했다는 사찰로, 정인이 알려준 곳이었다. 돌이 수북이 쌓인 풍경을 앞에 두고 석영은 잊지 못할 그 여름을 떠올린다.
영화는 대구와 경상북도 일대를 풍경으로 그려진다. 젊은 석영이 처음으로 얼굴을 비춘 곳이자 상경한 정인과 손잡고 거닐던 장소는 대구 계명대학교 대명캠퍼스다. 세월의 흔적을 품은 서양풍 건물이 영화 속 여름과 잘 어울린다. 석영이 대학 친구들과 미팅을 하던 곳은 중구 공평동의 고전음악 감상실 ‘하이마트’. 대구와 경북의 조각들이 모여 아픈 사랑의 기억을 완성한다. 어떤 이야기를 품었든 어떤 시절을 말하든 이 도시는 무수한 영화의 무대가 되어주었다. 이곳에서 또 어떤 삶이 그려질까. 스크린 속에 담길 대구의 다음 장면을 어렴풋이 떠올려본다.
글 차의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