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책은 어떤 장르인가요?

몰스킨

두 손에 쥘 수 있는 가장 작고 깊은 작업 공간. 고무 밴드를 열어 견고한 커버를 들추면 새하얀 작업 공간이 눈앞에 펼쳐진다. 가름끈을 끼워 넣는 간단한 손짓으로 누군가의 작업은 멈춰지거나 다시 시작될 수 있다. 몰스킨이 꾸준히 사랑받는 이유는 하얀 종이에 생각과 작업을 담아내는 사람이 이 세계에 꾸준히 존재하기 때문이다.

가장 조용한 전설

한 시대를 풍자하고 서서히 사라지는 것들이 있다. 그것은 브랜드일 수도, 물건일 수도, 스타일이나 유행일 수도 있을 테다. 그 무언가를 복간하려는 노력은 꾸준히 있어 왔다. 그러나 다시 살아난 것들은 이전만큼 아름답지 못했고, 꾸준히 사랑받지 못했다. 시대가 변하고 사용하는 사람이 바뀌었기 때문이리라.

그러나 여기, 복간 이후 전설이 된 브랜드가 있다. 1800년대, 프랑스 파리의 작은 문구점에 조용히 쌓여 있던 검은 노트. 그것은 화려하지도, 요란하지도 않은 생김새로 문구점 한쪽에 가만히 놓여 있던 그림자 같은 존재였다. 약 200년의 시간이 흘러 1997년에 이르렀을 때, 이탈리아에서 이 노트는 다시 한번 살아난다.

두 사업가의 손에 의해 이름 없는 검정 노트에 ‘몰스킨’이란 이름이 붙어 사랑받기 시작한 것이다.

아주 가까운 예술

별이 된 지 오래인 예술가들이 있다. 그림으로 남은 초상과 이름만이 익숙한 예술가들, 친구보단 위인에 가까운 예술가들. 그러나 그들이 지금 우리가 쓰는 이 작은 노트를 사랑했다고 하면, 마음의 거리가 한 뼘쯤 가까워지는 기분이다.

반 고흐는 성직자를 열망하던 화가다. 오로지 하나님만을 좇던 그이지만 암스테르담 신학대학 진학에 낙방했고 광신도적인 기질 때문에 교회에도 들어가지 못한다. 그런 그를 구원한 것은 그림이었다. 몰스킨을 사용했다고 알려진 그이기에 숱한 습작이 몰스킨 노트에 그려진 건 아닐까 상상한다. 화가인 외사촌 곁에서 배운 유화의 물감이 몰스킨에 한두 방울 묻어 있지는 않을까 짐작해 보는 것이다.

미국의 작가 헤밍웨이 역시 몰스킨을 사랑했다. 작가의 몰스킨은 어떤 모양이었을까. 사위에 널린 어떤 것에서 영감을 받아 휘갈긴 메모이거나 정갈하게 적어 내려간 문장이거나… 혹은 “그는 멕시코 만류에서 조각배를 타고 홀로 고기잡이하는 노인이었다.” 같은 명작의 도입부는 아니었을까.


반 고흐와 헤밍웨이, 그리고 피카소까지 몰스킨과 함께한 이들의 이름은 익숙하고도 반갑다. 그들이 몰스킨의 고무밴드를 풀고 가름끈을 끼워가며 무언가를 기록해 왔다고 생각하면 어쩐지 친근함마저 느껴진다. 예술가와 같은 물건을 공유하는 것. 이 설렘 어린 행위를 가능케 하는 것이 바로 견고한 한 권의 노트다.

둥그스름한 모서리와 고무 밴드로 고정된 표지. 단단한 만듦새의 표지를 열었을 때, 가장 먼저 눈에 띄는 문장은 “In case of loss”다. 잃어버렸을 때 반드시 찾고 싶은 물건이 될 노트. 하얀 종이에 무언가를 써 내려갈 때, 이야기가 깃든다면 그것은 분명한 작업이고 예술일 테다. 아이가 그려 내려간 삐뚤빼뚤한 선도, 낯선 언어를 배우는 청년이 기록한 귀여운 비문도, 아빠가 기록한 얼렁뚱땅 레시피도, 엄마가 그려 넣은 장난스러운 그림도 어찌 작품이 아닐 수 있을까. 그래서 몰스킨은 ‘쓰이지 않은 책’이다. 누군가의 몰스킨은 그림책이 되고, 누군가의 몰스킨은 에세이가 된다. 누군가의 몰스킨은 만화책이, 누군가의 몰스킨은 시집이 될 것이며, 또 누군가의 몰스킨은 쉬이 정의할 수 없는 새로운 장르가 될 것이다.

1.
청포도를 기다리는 마음

일러스트레이터 키미

연필의 좋은 점은 종이만 있으면 어디서든 그림을 그릴 수 있다는 것이다. 물도 필요 없고, 붓도 필요 없다. 그곳이 어디든 스케치북만 펼치면 작업실이 된다. 지난 12월부터 어째서인지 산더미처럼 쌓인 일이 줄어들면 또 쌓이고 줄어들면 또 쌓이는 바람에 거의 집에만 있게 되었다. 나는 외출을 할 때면 습관적으로 종이와 몇 가지 색상의 색연필을 챙겨 가방에 넣어 두는데 그것들을 챙길 일이 없었다. 내가 사랑하는 여름이 오면 빨간색 스케치북과 연필을 챙겨서 어디든 가야지. 따뜻한 햇살 아래에서 눈에 보이는 멋진 것들을 쓱싹쓱싹 그리고 싶다. 그러고는 주렁주렁 열린 눈부신 청포도처럼 꽉 차게 영근 마음을 안고 집으로 돌아와야지. 나는 오늘도 집에서 그 계절을 기다리며 스케치북의 한 페이지를 청포도로 가득 채웠다.

아트컬렉션 스케치북 스칼렛레드 | 하드커버 | 미디엄

2.
함덕

일러스트레이터 임기환

지난 1월, 새해를 맞이하는 기념으로 혼자서 제주도 여행을 다녀왔다. ‘해넘이와 해돋이를 봐야겠다!’라는, 어떤 것보다 새해 계획다운 일정을 가지고 비행기에 오른 것이다. 그러나 얄궂은 제주의 날씨 때문에 새로운 일정을 계획하게 되었다. 제주도는 마음만 먹으면 몇 번이고 훌쩍 떠나오는 곳이었지만 대부분 숙소 근처에 머물거나 두 발로만 다녔기 때문에 와본 데 비해 가본 곳이 많이 없는 편이다. 그래서 이번에는 자전거를 빌려서 여태껏 가보지 못한 곳들 구석구석을 다녀보기로 했다. 이 그림은 자전거를 타고 함덕해수욕장 근처를 지나다 마주친 풍경을 기록한 것이다. 해수욕장을 지나 해안 도로를 따라 달리고, 자동차로는 다니기 힘든 좁고 구불구불한 길을 다니기도 했다. 익숙하지만 낯선 풍경들을 바라보며 달리다 보니 왕복 40킬로 정도 달린 여행이었다. 서울에서 따릉이로 단련한 보람이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아트컬렉션 스케치북 블랙 | 하드커버 | 라지

3.
나의 노트는 모두 성공한 실패담

뮤지션 이아립

매일 밤, 빈 노트를 펼치면 여행이 시작된다. 그곳에서 계획을 세우고 길을 찾고 또 길을 잃는다. 그리고 어딘가에 닿는 순간, 나의 미래와 나의 꿈은 나의 현재가 된다. ‘나의 노트는 모두 성공한 실패담 혹은 실패한 성공담. 나는 오늘도 빈 노트 속으로 걸어 들어간다.’

아트컬렉션 불렛노트 블랙 | 하드커버 | 라지

4.
Last Season

그래픽 디자이너 양수현

지난해 4월 나는 아이를 낳았다. 초음파 속 하얗고 동글동글한 것이 아이의 첫 모습이었다. 아이의 첫 이름은 양송이. 내 성을 땄고, 티 없이 하얀 것이 꼭 양송이를 닮아서였다. 송이의 탄생으로 나는 엄마로 태어났다. 서툰 부모 노릇을 지켜보며 많은 분들이 도움을 주었다. 그들의 걱정과 위로, 사랑으로 나는 조금 더 단단한 사람이 되었다. 어제는 못 했던 일들을 오늘은 해내는 아이를 보며 하루의 소중함을 느꼈다. 아이와 함께 한 산책길에서 매일 조금씩 달라지는 공기도 느꼈다. 올해도 매일의 변화를 예민하게 느끼고 싶다. 오늘은 다시 돌아오지 않으니까. 계절보다 섬세한 절기 달력을 만들어 고마운 분들에게 연하장을 보냈다. ‘양송이 스프’와 함께. 24절기를 하나하나 그림으로 그리면서 새해를 기대한다. 봄이 오면 봄나물을 챙겨 먹고 여름에는 수영을 실컷 해야지. 가을에는 낙엽 밟는 소리도 듣고 겨울에는 송이와 눈사람도 만들어야지. 입춘으로 이제 막 봄이 시작되었다.

클래식 리포터노트 블랙 | 하드커버 | 룰드 | 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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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디터 이주연

자료 제공 몰스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