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말과 눈빛이 혼자를 살 수 있게 했습니다

평론가 부부의 사생활

당신의 말과 눈빛이
혼자를 살 수 있게 했습니다

평론가 부부의 사생활

혼자서는 발굴할 수 없는 마음이 있습니다. 혼자여야만 가능한 마음도 있습니다. 마음으로부터 마음으로까지, 가장 먼 그 길을 걷다 보면 알게 됩니다. 둘이면서 하나인 것을, 하나이면서 둘인 것을. 우리는 오늘도 절룩거리며 그 길을 오래 오래 걷습니다.

그녀의 이야기

아내의
안에

얼마 전, <이중섭의 아내>라는 다큐멘터리를 보았다. 이 다큐는 일본에서 2014년에 개봉했고, 한국에서는 그 후 2년이 더 지난 2016년에 개봉했다. 그녀는 거동하기 위해 걸음을 보조해주는 기구나 다른 사람의 부축이 필요하긴 하지만, 한국에서 열린 이중섭 작품의 전시회를 보러 오가고, 외출 전이면 거울 앞에 앉아 립스틱을 바르고 머리 매무새를 가다듬는다. 카메라로 지켜보는 그녀의 일상은 너무나 평범해서, 이 다큐의 부제가 ‘평범한 그녀의 일상’이어도 하나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았다. 

다큐의 중반부에 그녀가 제주도에서 남편과 아이들이랑 함께 살았던 집에 방문하는 장면이 있다. 초가집의 한 귀퉁이에 있는 방 하나. 좁은 통로에는 아주 작고 낮은 아궁이가 두 개 걸려 있는 방. 네 식구가 나란히 누우면 딱 맞을 만한 그 방. 마치 부엌에 딸린 곡식 창고처럼 보이는 허름하고 어두운 그곳에서 이중섭과 그의 아내와 그들의 아이들은 함께 살았다. 밥을 지어도 반찬이 없어서, 한라산에 가서 부추를 뜯고, 바닷가에 나가 게를 잡았던 일을 그녀는 그리운 듯 엷은 미소를 만면에 띤 채로 들려주었다. 

다큐는 그녀를 보여주다가, 그림과 편지를 배경 화면으로 삼아 그들이 주고받은 편지를 읽어주다가, (아마도 장이나 막의 구분을 의미하는 듯) 아주 잠시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검은 화면을 보여준다. 갑작스럽게 화면을 온통 채우는 어둠과 침묵, 내내 서로를 향한 애달픈 그리움의 토로이거나, 그녀가 일본에 있는 부모에게 그들 식구가 얼마나 고생하며 살고 있는지를 알리는 편지 내용과 거의 완벽히 대조되는 형식으로 그녀의 일상, 혹은 일상을 지속하는 그녀의 모습은 태연하고, 오히려 행복해 보였다. 그도 그럴 것이 (감독의 기획과 편집 때문이겠지만) 러닝 타임 내내 그녀는 내면 깊숙한 곳에 있는 무엇을 바라보듯 골똘하거나, 오래전에 있었던 일들을 이야기하면서도 자주 밝게 웃는 표정이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이제는 받을 수 없는 편지, 잡을 수 없는 손을 상기하게 하는 그 모든 문자와 이야기와 검은 화면 사이에서 홀로 환했다.인물들의 과도한 감정의 노출도, 과장된 편집의 흔적도 없이 잔잔하게 흐르던 이 다큐의 진행을 따라가다 불에 덴 듯 놀랐던 장면이 하나 있다. 건강상의 이유로 아이들과 자신만 일본에 있는 친정으로 건너왔고, 그 이후 그들 부부는 일본에서 함께 살고자 하는 열망을 담은 편지를 주고받았으며, 그녀 어머니의 도움으로 이중섭은 일본에 출입할 수 있었으나 단 일주일만 머물 수 있다는 통보를 받았고 정말로 일주일만 머물다 다시 돌아오겠다는 말을 남기고 한국으로 돌아갔다고, 그것이 그들이 마지막으로 함께한 시간이었다고. 이런 이야기들을 담담하게 전한 끝에, 그녀는 이렇게 덧붙인다. “살면서 많은 일들을 겪었지만 특별히 고생했다고 생각한 적은 없어요.” 정말로 그렇게 생각하는 그 표정과 목소리를 마주하며, 이해되지 않는 것은 이해하지 않는 채로 두는 것이 어쩌면 가장 큰 포용일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그토록 사랑했던 남편을 잃고, 하물며 그 죽음조차 곁에서 지키지 못했는데도 그녀는 어째서 내내 불행하지 않을 수 있었을까. 일본에서의 재회 이후, 3년이나 더 남편을 기다렸고, 그가 죽음에 이르기 전 일 년 정도는 소식조차 거의 없었는데도. 그녀는 어떻게 그들이 함께할 삶에 대해 내내 낙관할 수 있었을까. 물론 화면 바깥의 일들에 대해서라면 누구도 쉽게 추측할 수 없다. 인생의 말미에 이르러 낯선 눈동자들을 바라보며 천천히, 아주 천천히 곱씹듯 들려주는 그 이야기가 그녀의 인생 전부를 보여준다고 할 수도 없다. 어쩌면 그녀는 내가 상상하는 것 이상으로 괴로워하고, 절망하고, 두 눈이 붓고 또 부어 짓무를 정도로 기나긴 낮밤을 눈물로 보냈을 것이다. 그 지독한 상실감과 고독의 시간을 지나오면서 어떤 마음이 새롭게 생겨났을지도 모른다. 짧았지만 강렬했던, 서로에 대한 믿음과 애정이 충만했던 시절의 여전함. 돌아와 그녀의 손을 잡고 길을 걸어갈 그가 더 이상 이 세상에 없어도 그때의 기억과 그로 인한 행복이 여전히, 충분히 있다는 놀라운 사실이 그녀가 현실에 지지 않도록 했을 것이다.

고맙습니다

그녀의 이름은 마사코다. 다큐에서 한국 나이로 아흔 셋이었던 마사코는 제주도에서 그들이 함께 살았던 방에 놓인, 영정처럼 보이기도 하는 이중섭의 사진 앞에 서서 손을 모으고 눈을 감고 기도를 한다. 내내 외로워 보이지 않던 마사코가 아주 잠시나마 ‘완전히’ 혼자인 듯 보였던 것은 그 순간만큼 마사코는 죽은 아고리와 마주하고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남편의 손을 잡지 못하지만, 남편의 말을 기억하고 공기 속에서 그의 온기를 느끼며 늘 그랬듯 재회할 날을 기쁘게 기다리며 살아온 자신의 인생으로, 사진으로만 남편을 만날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것을 몸소 증명하며 살아온 마사코에게 그들이 함께 살던 그 방에 덩그러니 놓인 빛바랜 이중섭의 사진은 지금 이 순간 그녀가 철저히 혼자라는 실감을 하게 했을 것이다.

‘혼자’라는 말은 맞으면서도 틀리다. 누구에게나 물리적으로 혼자 있을 때가 있지만, 그때도 혼자 있는 게 아닐 수 있다는 말이다. 누구든 혼자 길을 걷고, 밥을 먹고, 영화를 보고, 차를 마실 때도 그는 다른 누군가와 함께 있다. 걷다가 문득, 먹다가 문득, 공기의 내음과 차의 향기와 음식의 맛과 질감 속에서 누군가가 떠오른다면, 그것이 당신이 혼자 있어도 결코 혼자 있는 게 아니라는 증거다. 아무도 없는 방 안에 누워 핸드폰 메시지를 확인하고, SNS에 올라온 누군가의 사진과 이야기를 볼 때, 아무 응답 없는 그 행위 속에서도 당신은 혼자인 채로 누군가를 만나고 있다. 

함께 살기 위해서 혼자의 시간은 누구에게나 필요하다. 외부적인 상황에 정신없이 이끌려 다니다가도 잠시 쉬면서 자기만의 시간을 갖는 일은 내가 원하는 것, 내가 해야 하는 것을 확인하기 위해서, 나아가 스스로 만족하는 삶을 꾸리기 위해서 필수적이라고 할 수도 있을 만큼 중요한 일이다. 하지만 그 시간이 오롯이 자기만의 것이 되기 위해서는, 역설적으로 어떤 관계에 대한 의식이 필요하다. 독립적인 육체와 인격, 그리고 자유로운 삶으로 그려지는 혼자의 모습은 결국 그런 혼자와 혼자가 만나 이루어낼 어떤 관계에 대한 상상을 바탕으로 한다는 말이다. 나처럼 혼자인 당신이 있어서, 나는 혼자지만 혼자가 아니다. 

제주도의 옛집에서, 함께 지냈던 그 작은 방 안에서, 아고리의 사진 앞에서 혼자였던 마사코는 손을 모아 기도한 후에 감은 눈을 뜨고 가벼운 목례를 하며 들릴 듯 말 듯한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아리가또.” 혼자 남은 자신이 혼자가 아닌 채로 살 수 있었던 이유를 마주하듯이, 그 이유에게 깊은 인사를 건네듯이. 어떤 인사는 그렇게 완전히 혼자인 채로 혼자가 아니었던 시간을 등 뒤에 둔 뒤에야 할 수 있다. 한 편의 다큐를 함께 보고 그 시간을 곱씹으며 홀로 쓸 수 있어서, 나 역시 혼자인 채 혼자가 아니어서, 이 글은 고맙다는 말로 맺고 싶다.

그의 이야기

남몰래 부르는
이름

마감을 했다. 기분이 편하지 않다. 글은 끝났는데 무언가 끝나지 않은 그런 미묘한 기분이 하루 이틀 정도 지속된다. 어딘가를 계속 헤매는 것도 같고, 멀미가 나는 것도 같다. 마음이 끝내 차분해지지 않으면 나는, 콩자의 무릎을 베고 누워서 영화를 본다. 아내의 무릎은 나에게 방금 전 문장에서 사용한 쉼표 같은 기능을 한다. 숨을 고르게 해줄 뿐 아니라, 무언가를 연결시켜주는 일을 하기 때문이다. 

그날은 <이중섭의 아내>라는 영화를 골랐다. 이중섭의 얼굴에는 묘한 표정이 있다. 사진 속의 그는 자주 웃는다. 그런데 그 웃음 너머로 시린 무언가가 어른거리기도 한다. 얼굴에 약간 그늘이 있다는 말인데, 그 그늘이 어둡기보다는 밝은 편이다. 영화는 사진 속에 남은 이중섭을 보여주면서 동시에 사진 밖에서 영상으로 담긴 그의 아내를 보여준다. 이중섭의 아내는 그를 ‘아고리’라고 부른다. ‘아고’는 일본어로 턱을 의미한다. 이중섭의 턱에서 특징을 발견한 일본인 친구들이 그를 그렇게 불렀다고 그녀의 아내는 수줍게 웃으며 회상했다. 그러니까 ‘턱이 긴 이씨’ 정도의 의미로 번역이 되는 셈인데 그의 아내가 영화 내내 ‘아고리’라고 말할 때의 어감은 그런 뜻으로만 들리지 않았다. 누구도 대신 불러일으킬 수 없는 소리의 울림이 ‘아고리’를 읊조리는 그녀의 음성에 녹아 있다. 그녀가 아고리라고 말하는 순간에는 왠지 이중섭이 그녀 옆에 와 있는 듯한 느낌이 든다. 

아고리는 아내 마사코에게 ‘남덕’이라는 별명을 지어 불렀다. 남쪽에서 온 덕이 많은 여자라는 의미였다고 하지만, 나는 그 남덕이라는 음성에도 아고리와 남덕 둘만이 아는 남다른 감각이 새겨져 있을 거라고 확신한다. 누구에게도 나누어 줄 수 없는 무언가가, 둘만의 역사이기도 한 특별한 감각이 사랑하는 연인을 부르는 이름 속에는 녹아 있기 마련이다. 나 역시 ‘콩자’라는 음성 속에 매번 다른 의미를 담아 아내를 부른다. 아니 의미라기보다는 마음에 가까울 것이다. 가장 가까운 사람만이 꺼내 볼 수 있는 마음, 나 혼자서는 결코 꺼내 볼 수 없는 나의 마음, 그러니까 콩자라고 아내를 부를 때마다 이 세상에는 나의 마음 하나가 새롭게 발굴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재밌게도 나는 남덕이 아고리에게 보낸 편지 속에서도 같은 현상을 발견했다. ‘소중하고 또 소중한 나의 사랑 아고리’라고 시작된 편지는 ‘마음으로부터, 남덕’이라는 구절로 마무리되고 있었다. 마사코 역시 아고리가 곁에 있어서 자신의 마음을 꺼내어볼 수 있는 능력이 생겼던 것이다. 

사진 속 아고리는 이 세상에 없고, 영상 속 남덕은 이 세상에 있다. 남덕 혼자 남겨진 것이다. 둘의 결혼 생활은 6년에 불과했다. 더군다나 그 6년 동안에도 역사적 정황과 가난으로 인해 헤어져 살았던 시기가 있었다. 하지만 아고리를 회상하는 남덕의 시간은 6년이라는 숫자로 담아낼 수 없을 것만 같았다. 사람들은 아고리가 더 이상 이 세상에 없다고 말하지만 그 ‘세상’에는 남덕도 없었다. 영화 속 남덕의 목소리는 때때로 단호했다. 그녀는 자신에 대해서는 수줍게 말했지만, 아고리를 말할 때는 달랐다. 그때는 분명하고 단호한 음성이 되었다. 마치 아고리의 마음 깊은 곳을 여기저기 들여다본 사람처럼, 여전히 그의 마음속을 살고 있는 사람처럼 말이다.

영화의 처음과 끝에는 아고리 없이 세상에 혼자 남겨진 남덕 씨가 미용실에 다녀오는 과정이 그려진다. 나는 왜 이중섭의 아내가 미용실에 가는 장면으로 영화가 시작해서 미용실에서 머리를 만지고 집으로 돌아가는 장면으로 영화가 끝나는지 조금 알 것도 같았다. 혼자 남겨진 남덕 씨는 아고리의 눈빛을 여전히 세상 곳곳에서 느끼는 것이다. 달리 말하자면 여전히 아름다운 남덕의 모습을 중섭은 어디선가 혼자 지켜보고 있는 중이다. 그러고 보니 영화 끝에 남덕이 돌아가는 곳은 그녀의 집이 아닐 수도 있겠다. 아고리가 있는 곳, 혹은 아고리의 마음이 있는 곳으로 그녀는 오늘도 귀가 중이다.

‘형 우리도 녹아가고 있어,
점점 작아지고 있어요’

글을 마감하고도 마음이 진정되지 않을 때 내가 또 찾는 장소 중 하나는 집 앞 ‘테루테루’라는 작은 술집이다. 아고리 정도는 아니지만 턱이 잘생긴 사장님이 운영하는 이자까야다. 선어회가 특히 맛있다. 친구 몇몇에게 이 선어회를 맛보였더니 심각하게 이사를 고민했을 정도다(뒤에 나오겠지만 정말 그런 이유 때문에 이사를 온 거 같은 친구가 하나 있다). 혼자서 칼을 잡아 회를 써는 사장님의 모습을 보면 슬쩍 웃음이 날 정도로 멋이 있다. 나는 멋있는 사람만이 맛있는 음식을 만든다고 믿는다. 그날은 하이볼에 회를 먹고 있는데 한 사람이 불쑥 가게 안으로 들어왔다. 아는 사람이었다. 그는 ‘살아보겠다고, 살겠다고, 어느 날 혼자 불쑥 묵호 같은 데를 찾아가는’ 사람이다. 동네 친구 박준, “헤어 디자이너는 아니고요, 시를 쓰고 있어요”, 라고 종종 자기소개를 하는 친구. 선어회 때문에 우리 동네 근처로 이사 온 것으로 추정되는 사람. 

나보다 1년 정도 늦게 이 가게를 알게 되었지만, 나보다 사장님과 더 친해진 거 같은 친구는 술이 어느 정도 올라서 막차로 여기를 들렀다고 했다. 그러고는 평소와 달리 스스럼없이 음악 몇 곡을 신청하며 읊조리듯 “형 있잖아, 난 저 연주하는 사람 표정이 너무 좋아.”라고 덧붙였다. 사장님이 유튜브 영상을 트니 거기 정말 넉넉한 아저씨가 해맑은 표정으로 건반을 누르고 있었다. 세상 다 가진 표정, 아니 세상 모든 게 필요 없는 표정. 같은 말인가. 그런데 왜 슬프지! 그는 웃고 있는데 울고 있는 거 같다. 그는 분명 이 세계에 우리와 같이 있는데, 혼자 외따로 어느 먼 곳에 있는 것만 같다. 자기만 아는 어딘가로 차원을 이동한 느낌. “저거 서로 대화하는 거예요.” 평소에는 과묵한 사장님의 한마디가 불쑥 음악 사이로 끼어들었다. 건반이 기타에게 기타는 트럼펫에게 서로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트럼펫이 취미인 사장님의 눈에 그들의 대화가 잘 들렸나 보다. “오늘 뭐 했어? 난 오늘 이거 했어.”라고 건반이 말하면, 기타가 “아 좋았겠다. 아니 어쩌면 슬펐겠다. 사실 오늘 나는….” 이런 식의 대화예요. 그런데 사장님이 번역해준 저 대화는 별다른 말도 아닌데 애틋하고 짠했다. 

준이 두 번째로 신청한 곡은 바싹 마른 나무껍질 같아서 불을 붙이면 확 타오를 것만 같은 음성의 여가수가 부른 노래였다. “사랑의 감정, 나는 당신을 잃었다고 느끼진 않습니다. 그러나, 내 마음에 다시는 당신을 들여놓지 않겠다고 생각했어요.” 정도로 번역될 가사가 흐르고, 그 사이 마신 몇 잔의 술 때문인지, 아니면 가수의 텅 빈 시선에 취한 건지. 그도 아니면 그녀의 건조한 음성에 취한 건지, 아무튼 취했다. 그리고 혼자서 서러워졌다. 부끄럽게도 갑자기 어디론가 도망가고 싶은 생각도 들었다. 혼자가 되고 싶었던 건지, 혼자가 되고 싶지 않았던 건지 잘 모르겠지만. 술잔에 담겨 녹는 얼음처럼 작고 차가워진 밤이 가게 앞 유리에 달라붙어 있었다. 그 사이 환청처럼 이상한 소리도 들었다. ‘형 우리도 조금씩 녹아가고 있어, 점점 작아지고 있어요.’ 그리고 옆에서는 취한 친구가 시 구절 같은 말을 아고리를 닮은 사람에게 들려주고 있었다. “손은 다른 손을 만나야 공손해져요. 손은 모아지지 않으면 공손해질 수 없어요.” 술과 시와 음악과 대화가 차가운 밤의 대기를 찢고 이상한 세계를 출몰시키고 있었다. 자칫하다가는 귀가가 아주 늦어질 수 있겠다 싶어 일어서려는 찰나 한 손이 불쑥 내 팔을 잡아끌고 말했다. “형! 우리 집에 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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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김나영, 송종원

사진 이자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