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을 위해 가꾸는, 나의 정원

Gardens In London

당신을 위해 가꾸는, 나의 정원

Gardens In London

한껏 내일의 날씨를 안내하던 BBC 기상 캐스터가 클로징 멘트를 던진다. “Happy Gar￾dening!” 날씨 좋은 여름이면 ‘Goodbye’의 또 다른 표현처럼 통용되는 이 말은 런던에서 별다를 게 없는 일상의 언어다. 어디서건 꽃과 식물을 기르는 일이 다반사인 그들에게 정원과 공원, 푸른 자연은 자기 만족을 넘어 타인과 사회의 질을 결정짓는 필수요소다.

예술가들이 사랑한 언덕
햄스테드 히스 Hampstead Heath

A. Hampstead, London NW3 1BP 

H. cityoflondon.gov.uk

O. 연중 무휴

“드디어 햄스테드 히스 공원 근처에 살게 됐어.” 3년간 교우하던 이웃집 브라질리언 부부가 자신들의 이사 소식을 전하며 건넨 첫 마디를 통해 나는 햄스테드 히스를 처음 알게 됐다. 한껏 상기된 그들의 얼굴은 내게 깊은 의구심을 남겼다. 어디서건 걸어서 5분 내외면 푸른 잔디와 녹지를 만날 수 있는 런던에서 굳이 특정 공원을 선호할 필요가 있을까? 트럭 가득 짐을 싣고 떠나는 그들이 마지막까지도 강조했던 곳, 나는 불현듯 그 공원에 가봐야겠다고 결심했다. 

런던 북부 끝자락에 자리한 햄스테드 히스는 공원이라 하기에는 거대한 황무지, 하나의 거대한 언덕에 가까웠다. 입구를 지나 30분쯤 제법 경사진 언덕을 거닐었을까. 공원 끝자락에 오르자 사면에서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이 온몸의 땀을 훔치고 지나간다.

언덕 위에는 피크닉 매트에 앉아 샌드위치를 즐기는 가족, 망원경을 들고 저 멀리 랜드마크를 하나씩 열람하는 관광객, 테이크아웃 잔을 들고 음료를 즐기는 현지인 등 찾아오는 이도, 즐기는 방식도 제각각 다르다. 그러고 보니 런던에서 집값을 결정짓는 좌표는 대중교통의 편리성보다 공원을 얼마나 곁에 두고 있는가 하는 점이다. 그런 면에서 햄스테드 히스가 자리한 이 일대는 대대로 많은 예술가와 유명인이 한 번쯤 살았거나 살고 싶어하던 오랜 동경의 대상이었다. 매일 같이 이 언덕을 오르내리며 서점 직원으로, 문하생으로 청년의 꿈을 꾸던 조지 오웰, 그 외에도 시인 존 키츠, 엠마 존슨, 주드 로 등 런더너들의 햄스테드 히스 예찬은 익히 유명하다. 산책하듯 언덕을 천천히 오르고 있노라면 어느 순간 예술가들의 마음을 이해할 법도 하다. “걷거나 뛰는 것을 즐기는데, 특히 햄스테드 히스를 올라가며 발아래 동네 풍경을 힐끔힐끔 살피는 걸 좋아해요.” 베네딕트 컴버배치의 한 인터뷰가 떠올랐다. 그 브라질리언 친구는 어떤 찰나, 어떤 영감을 얻곤 했을까.

하늘 가장 가까운 쉼터
퀸 엘리자베스 루프 가든 Queen Elizabeth Roof Garden

A. South Bank Centre, Belvedere Rd,
Lambeth, London SE1 8XX

H. southbankcentre.co.uk

O. 매일 10:00~22:00

고개를 들자 손 닿을 듯한 거리에 뭉게구름이 흐른다. 선글라스의 도움 없이는 눈을 뜰 수 없는, 시리도록 푸른 하늘 아래 런던의 청춘들이 빌딩 옥상에 들어선다. 잔 가득 찰랑이는 시원한 와인을 들고 벤치로, 잔디 위로 삼삼오오 둥지를 튼 사람들. 런던 중심에 자리한 루프톱 가든은 직장인들이 피곤에 지친 몸을 잠시 쉬어가는 도심 속 휴식처다. 무용, 연극, 콘서트 등 각종 공연이 열리는 런던의 대표적인 공연 예술홀 엘리자베스. 템스강변이 인접한 이 빌딩 4층 옥상에는 야생화와 푸른 잔디로 뒤덮인 하늘 아래 정원이 있다. 한쪽에는 푸른 잔디, 맞은편으로는 나무 데크가 정갈하게 깔린 화단이 서정적인 풍경을 선물한다.

어느 여행자는 바닥에 비스듬히 누워 단잠을 청하고, 근사한 정장 차림의 남녀는 벤치에 앉아 오롯이 서로에게 집중한다. 둥근 원을 그리며 모여 앉은 단체 그룹에서는 웃음소리가 그치질 않고, 데크 끝자락의 조그만 화원에서는 야생화를 구경하는 노부부가 서있다. 영국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정원 ‘에덴 프로젝트Eden Project’ 팀이 담당한 이곳은 공원의 존재 이유가 결국 타인을 위한 나눔에 있음을 온 몸으로 역설한다. 수익금은 전액 홈리스와 약물 중독자를 돕는 자원봉사 단체 ‘Grounded Ecotherapy’에 지급하며, 지금 당장 공원을 이용할 수 없는 이들의 빈곤한 삶까지 껴안는다.

꽃, 음식, 예술 그리고 공연

전 세계에서 녹지 비율이 가장 높은 이 도시에는 한때 로열 패밀리의 사냥터와 산책로로 사용하던 왕실 소유 정원 네 곳이 자리한다. 런던 북부에 자리한 리젠트 파크는 그중 사계절 각기 다른 매력으로 런더너들의 일상에 활력을 불어넣는다. 런던의 공원 가운데 가장 규모가 크기 때문일까. 리젠트 파크는 방대한 부지를 영민하게 활용해 다양한 축제와 이벤트 공간을 도시인에게 선물한다. 영국 최대 규모의 동물원 ‘런던 주London Zoo’에서는 봄이면 월동을 끝낸 동물들로 활기를 띄고, 여름이면 6월 런던 유명 레스토랑이 주축을 이룬 음식 축제 ‘테이스트 오브 런던Taste of London’이 마련된다.

퀸 메리스 로즈 가든Queen Mary’s rose garden을 가득 채운 3만 여송이 장미가 향기를 선물하고, 가을이면 노랗고 붉게 물든 단풍이 피크닉을 권한다. 가을이 무르익는 10월 중순에는 세계 최대의 미술시장 ‘프리즈 아트페어Frieze Art Fair’가 행사의 정점을 찍는다. 직장인들은 잠시 틈을 내어 이 여유로운 풍경 속에 잠시 몸을 누인다. 런던의 공원은 녹음을 벗삼아 휴식을 즐기고자 하는 이들에게 쉼 그 이상의 특별한 무언가를 지속적으로 제공하고자 노력하는 공간이다. 별다른 비용을 지불하지 않아도, 특별한 계획 없이도 예술과 공연, 음식과 독서 모든 것이 런던의 공원에서는 가능하다. 그래서 늘 그곳에 있지만 담길 ‘이야기’는 새롭다.

폐업 위기의 원예원
피터셤 묘목장 Petersham Nurseries

A. Church Lane, Petersham Road,
Richmond TW10 7AB

H. petershamnurseries.com

O. 월~토 09:00~17:00, 일 11:00~17:00

“시골 마을에서 여유로운 전원생활을 해보고 싶어.” 런던 중심부의 삶에 환멸을 느끼던 가엘 & 프란시스코 보글리온Gael & Francesco Boglione 부부는 그렇게 런던 남부의 전원 지역 리치몬드에 새로운 터를 마련했다. 절친이던 롤링스톤스 멤버 믹 재거의 추천이 결정적이었다. 그렇게 꽃과 나무를 가꾸며 자연과 더불어 사는 새 삶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부부는 자신들의 동네에서 오랜 시간 영업해온 화훼농원이 폐업하고 이를 가드닝 체인 기업이 인수하려 한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부부는 약속이라도 한 듯 단숨에 그 농장을 사들였다. 동네의 아름다운 화원 하나가 대기업에 귀속돼 윤기를 잃고 규격화된 모습으로 변질되는 것을 지켜볼 수 없어서였다. 피터샴 너서리에 얽힌 탄생 비화는 런던너들이 얼마나 자연을 즐기고 꽃을 사랑하는지, 그로 인해 자신이 속한 지역과 사회를 어떻게 가꾸고 싶어하는가를 설명하는 상징적 공간이라 할 만하다. 자동차 한 대가 겨우 들어설 수 있을 만큼 비좁은 비포장도로를 걷다 보면 막다른 길 모서리 자락에서야 만날 수 있는 이 공간은 마치 동화 속에서 튀어나온 듯 아기자기한 꽃과 묘목, 각종 가드닝 도구를 판매하는 사랑스러운 원예 농장의 모습이다.

런던의 봄을 알리는 공간
첼시 플라워쇼 Chelsea Flower Show

A. Royal Hospital Chelsea Royal
Hospital Road, London., SW3 4SR

H. rhs.org.uk/shows-events

O. 매년 5월 말

아름다운 것을 귀히 여겨 혼자 즐기려는 인간의 소유욕이 정원문화라 해서 예외는 아니었을 테다.정원은 일찍이 왕실과 귀족의 소유물이었고 잘 조경된 녹지를 거니는 것은 상류층의 특권이었다. 아무나 닿을 수 없던 비밀의 화원이 대중을 향해 빗장을 열기 시작한 것은 1845년. 빅토리아 파크가 처음 공공 공원으로 기능하기 시작하면서 런던에는 그야말로 ‘가드닝’이 유행처럼 번졌다. 전 국민의 취미가 되는데 기폭제 역할을 한 것은 ‘첼시 플라워쇼’. 은퇴한 참전 용사들이 거주하는 로열 호스피탈 첼시Royal Hospital Chelsea 내 정원에서 첫 선을 보인 이 원예행사는 당시 쉽게 구할 수 없던 씨앗, 모종, 유럽의 독특한 식물과 조경사들의 가든 디자인을 소개하며 런던 각 가정의 정원에 다양한 영감을 주었다.

런던의 가드너 사이에서는 “첼시 플라워쇼가 끝나야 진짜 봄이 찾아온다”는 말이 있을 정도다. 그 막강한 영향력에 힘입어 매년 5월 말 열리는 세계 최대의 원예박람회 오프닝 티켓은 몇 달 전부터 일찌감치 동이 나고, 행사 첫날에는 엘리자베스 여왕이 자리를 함께하며 생중계 된다. 전 세계에서 꽃과 나무를 싣고 와 한껏 디자인한 정원과 열심히 개발한 새로운 모종을 감상하는 이들로 발 디딜 틈이 없다. 내 집에 어떤 정원을 둘지, 이웃은 무슨 식물을 기르는지 호기심과 경쟁심을 느낀다. 영국 전역 정원들의 그 해 풍경을 좌우하는 봄의 시작, 첼시 플라워쇼다.

그 시대의 정원, 나의 정원
제프리 뮤지엄 Jeffry Museum

A. 136 Kingsland Rd, London E2 8EA

H. geffrye-museum.org.uk

O. 화~일 10:00~17:00, 월요일 휴무

런던의 베테랑 가드너를 만난 건 제프리 뮤지엄에서가 처음이었다. 오십대 중반의 헤더 스미스는 플로리스트로서 꽃과 첫 인연을 맺었지만 가위로 자르고 꺾는 행위를 인위적이라고 느낀 뒤 자연을 관찰하고 생명을 가꾸는 가드너의 삶으로 전향했다. 그게 벌써 20여 년 전이다. 17세기부터 20세기까지, 영국의 시대별 주택과 실내 디자인을 시대별로 정리한 제프리 뮤지엄은 전시 내용 만큼이나 잘 가꾼 뒤 뜰 정원으로도 유명하다. 박물관 뒤편으로 돌아서자 그녀의 섬세한 손길이 닿은 아담하고 정갈한 정원이 모습을 드러낸다. 각 시대별로 유행한 정원을 미니어처처럼 구획한 이 공간은 시대별로 유행한 영국 정원의 특징을 한눈에 살펴보기 그만이다.

“에드워드 시대에는 부드럽고 은은한 색상의 꽃을 많이 심은 반면 빅토리아 시대에는 풍성하고 경쾌한 느낌을 꽃을 사용했죠. 조지 왕조 시대에는 모종이 비싸서 흙이 보일 정도로 식물 간 간격을 두며 전체적인 형태에 집중했고요. 이런 대략적인 특징을 안다면 정원을 산책하는 일이 훨씬 흥미로울 거예요. 정원은 늘 우리 주변에 존재해오던 공간이고 세월이 지나며 트랜드만 변했을 뿐 본질은 하나예요. 정원을 산책한다는 건 별다를 게 없는 일상의 문화라는 거죠.” 낡은 장갑으로 가위에 묻은 흙을 툭툭 털어내며 그녀가 말했다. 그리고는 아무렇지 않게 다시 정원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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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사진 박나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