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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책 끝에는 조그만 이름이 차례로 쌓인다. 이 기록이 당신의 손에 닿기까지 고군분투한 사람들이다. 이 중에서도 기획부터 출간까지 분주하게 뛰는 사람이 있다. 그 이름은 바로 편집자다. 책의 꼴을 떠올리고 글의 흐름과 단어를 다듬는 사람. 출판사 이야기장수를 이끄는 이연실 대표는 18년 동안 이 일에 마음을 다해왔다. 《김이나의 작사법》, 《부지런한 사랑》 등 그가 매만진 에세이도 여러 권. 연실은 한 사람은 책 한 권과 같다고 믿는다. 오늘도 연실은 마주 앉은 이를 보며 떠올린다. 그는 어떤 이야기를 품은 책이 될지.
《라면을 끓이며》(김훈), 《걷는 사람, 하정우》, 《나는 울 때마다 엄마 얼굴이 된다》(이슬아)…. 내게 머물며 짙은 여운을 남겼던 에세이는 모두 연실의 손에서 탄생했다. 그는 누군가의 작은 우주를 건져 올려 독자들의 품에 안겨주는 일을 사랑한다. 실은 한 번도 꿈꿔본 적 없는 삶이었다. “오랜 꿈인 소설가가 되지 못했으니 나에게 형벌을 줘야겠다.”는 생각으로 출판사 문학동네에 입사했단다. 그런데 뜻밖의 세상을 만났다. 수많은 사람들이 각자의 자리에서 온 마음을 다해 한 권의 책을 만드는 짜릿한 세계가 있었다. 편집자의 손을 거치면 어렵던 문장도 술술 읽히는 세계. 디자이너가 쪽번호 모양마저 고심하고, 제작자는 최적의 종이를 고르는 세계. 연실은 딱 일 년만 일하겠다는 생각을 한 달 만에 바꿨다.
처음 맡은 분야는 ‘비소설’. 열정 가득한 신입 사원은 “문학동네에서 비소설이면 좌천된 거 아닐까….” 하는 걱정에 휩싸였다고. 에세이는 읽어본 적도 없고, 좋아하지도 않았던 분야였으니까. 하지만 연실은 천직을 만났다. 평생 만나보지 못할 다양한 직업군의 작가와 울고 웃고 일하는 생활이 좋았다. 연실은 각자의 삶을 즐겁게 살아온 “생활인”이 자기만의 이야기를 마법처럼 터뜨리는 순간을 사랑한다. 평범한 전업주부, 히트곡을 만든 작사가의 삶이 활자가 되는 순간을 고대한다. 그의 하루는 바쁘게 흘러간다. 모든 작업자의 의견을 조율해 최선의 모양으로 책 한 권을 만들기 때문이다.
연실의 새로운 보금자리는 출판사 이야기장수. 시장에 자리를 깔고 유쾌한 말을 전하던 이야기장수처럼 재밌는 이야기를 콩나물 팔 듯, 두부 팔 듯 쉽게 전하고 싶단다. 그는 이야기 보따리에 그가 마주친 귀한 것들을 몽땅 넣어두었다. 연실의 주머니에 담긴 문장과 단어가 궁금하다. 그가 자리를 펴는 곳에 털썩 앉아 내가 모르던 세계로 빠져들고 싶다. 정성 들여 매만진 타인의 기록. 연실이 우리에게 줄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이다.
그를 거친 작품도 무수하다. 유독 기억에 남는 도서가 있을까?
연실에게 부탁했다. 편집자님, 책 추천해 주세요!
기획력이 돋보인 책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 | 문학동네
“2015 노벨문학상 수상작이에요. 2차 세계대전 참전 여성 200명의 인터뷰가 담겼어요. 주변 사람들이 처음엔 전쟁 이야기라 많은 호응을 얻지 못할 거라고 우려했죠. 그래도 제가 큰 감동을 받은 이야기라 편집을 맡았는데, 예상도 못한 수상 소식이 들려온 거예요. 때로 기획은 계산이 필요하지 않다는 걸 알려준 책입니다.”
제목 잘 지은 책
《우리 사이엔 오해가 있다》
이슬아, 남궁인 | 문학동네
“이슬아, 남궁인 작가가 주고받은 편지를 엮었습니다. 두 사람이 서로에게 품은 오해를 딛고 우정으로 나아가는 이야기예요. 제목은 이슬아 작가님의 문장에서 옮겨 왔는데요. 서간 에세이집이라면 흔히 작가들이 서로를 애틋하게 여기는 마음이 드러나는 제목을 붙이지만, 이 책은 심상치 않은 제목이 재밌어요. 다른 후보로는 ‘이슬아, 남궁인의 동공지진’이 있었네요(웃음).”
표지가 인상적인 책
《형사 박미옥》
박미옥 | 이야기장수
“국내 최초 강력계 여형사 박미옥 작가의 이야기입니다. 표지가 70-80년대 영화 포스터 같죠? 디자이너에게 작업을 의뢰할 때 옛날 히어로물 같은 느낌이 나면 좋겠다고 했어요. 한 여성 형사가 고리타분한 세상을 바꿔 놓은 이야기로 독자들을 초대하고 싶었거든요. 시선이 가는 표지를 만들자는 이야기장수의 지향점이 잘 드러난 작품이에요.”
우여곡절이 많았던 책
《가녀장의 시대》
이슬아 | 이야기장수
“이슬아 작가의 첫 소설이에요. 많은 예비 소설가들이 규모 있는 출판사에서 데뷔작을 내길 바라는데요. 제가 편집을 맡을지 논의하던 당시는 이야기장수가 이제 막 시작된 터라, 작가님이 우리 같은 신생 출판사와 함께하는 것이 망설여졌어요. 작가님을 찾아가서 나는 이 책 편집을 정말 맡고 싶고 잘할 수 있지만, 다른 곳에서 출간하는 선택도 이해한다고 전했죠. 돌아가는 택시에 올랐는데 아쉬워서 눈물이 뚝뚝 흐르는 거예요. 작가님이 곧 전화로 저와 함께하겠다고 이야기했는데, 그때 기분을 잊지 못해요.”
이연실 ㅡ 이야기장수 대표
오랫동안 에세이 편집을 해왔어요. 에세이, 어떻게 정의할 수 있을까요?
에세이란 좋은 삶을 살아온 사람이 쓰는 글이에요. 좋은 삶을 사는 사람이 좋은 에세이를 쓸 수 있다고 믿어요. 좋은 삶이란 자신의 자리에서 재밌게 살면서 얻은 행복을 주변 사람에게 나눠주는 삶이에요.
에세이의 아름다움은 무얼까요?
에세이는 출판계의 드라마예요. 누구에게나 쉽게 읽히면서 이 사람은 이런 생각도 하네, 하고 슬쩍 미소 지을 수 있는 장르죠. 친구가 자기는 요즘 책을 잘 읽지 않는다고 말한 적이 있어요. 영상은 틀어 놓으면 흘러가는데 책장은 넘길 힘도 없을 때가 많다는 거예요. 독서는 많은 힘을 들여야 하는 일이기도 하죠. 그런데 에세이는 책장이 잘 넘어가도록 손 내밀어주는 것 같아 좋아해요.
에세이 한 권은 어떻게 탄생하나요? 연실 씨만의 과정이 궁금해요.
저자를 먼저 찾는 편이에요. 인터뷰를 하면서 이 사람은 어떤 책이 될까 궁리하죠. 좋은 말 한마디를 남길 줄 아는 사람에게는 이야기가 있거든요. 출판이 결정되면 저자가 보내주는 원고를 살펴봐요. 지금 방향이 좋다거나, 다른 방향으로 써보자는 피드백을 주고요. 동시에 책의 꼴을 생각해요. 사진과 글의 배치, 폰트, 차례, 디자인 등을 궁리하는 거예요.
그다음은요?
교정교열 단계예요. 요즘은 태블릿으로 교정을 보는 편집자도 많은데요. 저는 어떤 판형이든 A3 용지에 크게 뽑고 고치면서 종이 여백에 원문을 수정한 이유를 써요. 작가에게 편지를 보내는 것처럼요. 다음엔 제목과 표지를 정하죠. 그리고 인쇄합니다. 출간 후 홍보까지 끊임없이 다른 부서와 소통한답니다.
정말 많은 사람들을 만나며 책을 만들겠어요.
책 처음이나 끝에는 ‘판권’이라고 만든 이의 이름이 담겨요. 거기 적힌 모든 사람을 만나는 단 한 사람은 편집자죠.
특히 제목 붙이는 단계를 중요하게 여긴다고요.
제목이 좋아서 눈이 가는 작품이 있잖아요. 좋은 제목은 원고에 숨은 그림처럼 감춰져 있어요. 저는 오로지 내용에만 집중하면서 글을 다시 읽어봐요. 저자가 강조하려고 했던 말, 울림을 주는 단어나 문장을 백지에 옮겨 적고요. 그러면 특정한 말이 눈에 들어오거나 여러 단어가 결합하면서 제목이 탄생해요.
한 사람의 삶이 담긴 글을 매만지는 일이잖아요. 쉽지만은 않을 것 같아요.
수필이 책이 되는 순간, 독자를 위한 선물 상자가 된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원고가 독자를 향해서 계속 달려갈 수 있도록 작가에게 편집 제안을 하죠. 글 한 편을 넣을지 말지를 두고 작가와 씨름할 때도 많아요. 작가에게는 중요한 이야기가 전체 흐름을 끊는다고 느껴질 때도 있거든요. 그러면 끊임없이 설득해요. 물론 제 의견이 받아들여지지 않는 경우도 있어요. 그럴 때는 작가의 뜻을 듣죠. 그분의 이름을 걸고 나오는 책이니까요.
한 사람의 기록을 세상에 전하고 읽는 일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좋은 생각은 대화를 통해서 쌓여요. 나의 인생을 발신하고, 또 누군가의 이야기를 찾아 읽는다면 혼자만의 세상에 갇히지 않을 수 있어요. 상대방이 아무리 고집이 세도, 아무리 작은 사람이라도 그의 말을 들어보는 건 중요해요.
에세이를 출판하고 싶다면 무얼 소재로 이야기를 쓰면 좋을까요?
자기 이야기요. 낯설고 먼 곳에서 진짜 자신이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많아요. 또 화려하고 큰 이야기로 나를 부풀려야 한다고 생각할 수 있죠. 하지만 내 이야기는 아주 작은 데서 출발한다고 생각해요.
작은 데서 시작한 이야기란 무얼까요?
재미없는 회사를 다니던 친구가 있었어요. 그 친구는 아침마다 같은 날짜의 조선왕조실록을 읽었대요. 달이 두 개 뜨고, 호환마마가 닥친 날도 있었죠. 그래서 상사가 힘들게 하거나 어려운 순간이 와도 ‘뭐, 조선에 비하면 내 일상은 괜찮네.’ 하면서 지나갈 수 있었대요(웃음). 저는 이런 이야기 속에 우리가 있다고 믿어요. 작은 이야기를 매일 기록하면 나의 진짜 이야기를 발견할 수 있어요.
연실 씨도 그런 기록을 남기고 있나요?
네. 그날의 명언을 기록해요. 책이나 영화에서 나온 말, 만났던 사람과의 대화, 농담 속에서 나에게 가장 인상 깊었던 한 문장을 쓰는 거예요.
마지막 질문이에요. 편집을 왜 사랑하세요?
편집은 나를 계속 무너뜨리는 일이에요. 원고가 늦게 도착해서 이후 작업이 지연돼도, 인쇄소에서 문제가 생겨도 늘 사과하는 사람은 중간자인 저예요. 어릴 때는 “난 잘못한 게 없는데 왜 내가 미안하다고 말해야 하는 거야!” 했는데(웃음), 지금은 좋아요. 세상에 좋은 이야기를 남기기 위해서 끊임없이 고개 숙이고 나를 수정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서요. 한 권을 만들고 나면 고마운 사람들도 많이 생겨요. 모두가 사랑스럽고 빛나 보이고, 덕분에 제 인생도 재밌어지죠. 삶의 해상도가 선명해지는 기분이에요.
연실은 인쇄소에 갈 때 늘 인쇄기에 손을 얹고 기도한다.
“중쇄 찍게 해주세요!”
에디터 차의진
일러스트 세아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