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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의 사생활 99
우리는 일 년에 한 번씩 낯선 도시로 떠나고, 올해는 대구였다. 백지처럼 아무것도 쓰이지 않은 도시의 빈 모습을 머릿속에서 마주해야 할 때면, 나는 포털 사이트도 소셜 미디어도 아닌 만화책을 먼저 펼쳤다. 출판사 ‘삐약삐약북스’는 ‘지역의 사생활 99’라는 이름으로 비수도권 지역을 주제로 한 만화 시리즈를 출간해 왔다. 도시 하나를 정해, 만화가가 사적인 상상력을 발휘하며 만들어낸 이야기는 유달리 들떠 있진 않다. 되려 담백하고 간결하며 한편으로는 쓸쓸하지. 그렇기에 낯선 도시와의 첫인사를 그 책으로 나누곤 했다. 어디에 살고 어디로 향하든, 우리는 보통의 나날들을 보낼 테고 그 안에서 한 꼬집의 특별함이라도 발견한다면 도시를 향한 애정이 자라난다는 걸 알려주었으니까. 우리가 사는 터전을 단편 이야기로 마주하는 지역의 사생활 99, 그 책장을 슬며시 펼쳐둔다.
프로젝트의 이름은 아홉 개의 지역에서 아홉 명의 만화가가 아홉 권의 만화책으로 도시를 소개한다는 의미를 담았다. 우리가 보는 웹툰이나 영화, 드라마에서는 이야기의 배경을 콕 짚어 말하지 않으면 대부분 서울, 수도권을 가리킨다. 삐약삐약북스는 “한국 사람들의 절반은 수도권에 살고 있지만 절반은 수도권 바깥에 살고 있다.”며 “바깥에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조명하고 싶었다고. 2020년 8월부터 2021년 8월까지 만화 아홉 권이 프로젝트의 품 안에서 처음 출간되었는데, 독자들의 열렬한 사랑을 받아 현재는 시즌 2, 3과 특별판까지 포함하여 총 스물여덟 개의 지역이 이야기로 남았다. 같은 프로젝트라도 장르와 스타일이 다양한 작가들이 모였기에, 사적인 상상과 현실을 넘나들며 도시를 맛보는 즐거움을 선물한다. 프로젝트의 시작을 알린 첫 번째 시즌의 책들을 소개한다.
고성 | 알프스 스키장 | 정원
알프스 스키장에 버려진 듯 보이는 개를 구조하기 위해 민재는 헤어진 연인에게 전화한다.
공주 | 4공주 | 북구플랜빵
공주 백제문화제를 즐기기 위해 모인 네 명의 친구들이 하룻밤을 보내며 어른이 된 모습을 상상한다.
광주 | 용도락/광주 식도락 투어 | 작은비버
용이 사람과 섞여 살게 된 세상. 민서는 고조할머니로부터 용의 휴가를 함께 해달라는 부탁을 받는다.
군산 | 해망굴 도깨비 | 불친
해망굴에서 울고 있던 주인공에게 다가온 어린아이. 군산의 원도심을 함께 배회하며 어쩌면 좋을지 고민한다.
단양 | 가만히 있어도 사라지지 않는 것 | 불키드
오랜만에 단양으로 돌아온 도이는 많이 변한 고향의 모습에 당황한다.
담양 | 1-41 | 김래현
키 번호 1번 송연과 41번 유진은 둘도 없는 친구 사이. 10년 후, 담양으로 출장을 간 유진은 송연을 우연히 만난다.
대구 | 달구벌 방랑 | 근하
서울에서의 가난한 생활을 뒤로하고 막연하게 대구로 온 제이와 이현. 곧 대구를 떠나고픈 마음도 피어오른다.
부산 | 비와 유영 | 산호
부산광역시 광안리 바다에서 마주친 인어와 인간의 이야기. 일상적인 바다가 환상적인 만남의 공간으로 탈바꿈한다.
충주 | 여름방학의 끝에서 | 고형주
경원은 충주에 사는 지현한테서 이곳에 머물러 달라는 부탁을 받는다. 고민하는 이 마음은 동정일까, 우정일까?
삐약삐약북스와 두 분에 대해 소개해 주세요.
불친과 불키드, 두 사람이 전라북도 군산에서 꾸려나가는 만화 전문 출판사입니다. 귀여움의 힘은 강하고 오래간다는 생각에 ‘삐약삐약’이라는 단어를 출판사 이름에 넣었는데, 덕분에 어린이책 출판사로 오해받는 일이 종종 있답니다(웃음). ‘불친’은 모든 사람에게 사랑받으려 애쓰지 말자는 뜻으로, ‘불키드’는 아내 불친의 닉네임 앞 글자를 따서 지은 이름이에요. 둘 다 웹툰 작가로 활동했습니다.
지역에 대한 관심으로 ‘지역의 사생활 99’ 프로젝트가 시작된 게 아닐까 싶어요.
군산에 정착하면서 수도권과 그 외 지역의 격차를 몸소 느꼈습니다. 문화적 경험과 배울 수 있는 기회의 차이뿐 아니라 서울을 중심으로 보도되는 뉴스와 미디어를 볼 때마다요. 우리가 사는 곳을 다루는 콘텐츠는 없을까 생각했고, 단순히 여행이나 홍보 목적이 아닌 현지에 거주하는 사람들이 무얼 먹고 어떤 곳에서 누굴 만나는지 다뤄보고 싶었어요. 먼저 둘이 머리를 맞대고 작가를 선정하는데, 반드시 지역에 연고를 두어야 하는 건 아니고 깊은 애정을 가진 지역이 있다면 가능합니다. 지역에 대한 이해와 사랑이 깊을 때 더 좋은 작품이 나온다고 믿거든요. 즉, 지역 선택은 출판사가 아닌 작가에게 달린 거죠.
책을 읽을 때 인상 깊게 남았던 부분이 있어요. 표지는 지역별로 다른 컬러를 사용하고, 시작에는 언제나 도시 이름의 유래와 응급실 숫자를 기록해 두셨죠. 특별한 이유가 있나요?
먼저 표지 디자인의 경우, ‘해외처럼 먼 지역’이라는 콘셉트로 국제 우편 봉투의 빗금 디자인을 테두리에 차용했어요. 각 도시의 개성과 분위기를 시각적으로 표현하려는 의도로 지역마다 표지 컬러가 다른데, 독자들이 책을 접했을 때 표지에서부터 지역의 독특한 정체성과 분위기를 느낄 수 있습니다. 그리고 도입부에 도시 이름의 유래, 교통, 경제 등의 정보를 한 페이지에 압축해서 넣어두었죠. 응급실 숫자를 기록한 건 정보 제공을 넘어, 발전 수준과 생활의 질을 간접적으로 보여주기 위함입니다. 예를 들어 서울에는 현재 50여 곳의 응급실이 있다지만, 충북 단양은 2013년만 해도 도시에 응급실이 단 한 곳도 없었어요. 격차를 드러내는 중요한 정보죠. 두 번째 시즌부터는 유아차나 휠체어가 필요한 독자들을 위해 ‘바퀴로 갈 수 있는 곳’ 코너도 만들어두었어요. 누구나, 어디든 갈 수 있는 세상이 되길 바라면서요.
작품 말미에는 언제나 삐약삐약북스와 작가가 나눈 인터뷰가 담겨요.
만화가라는 직종은 어쩐지 다른 장르의 작가님들과 비교했을 때 인터뷰가 상대적으로 적은 것 같아요. 만화 독자분들이 그간 가졌을 갈증을 긴 인터뷰 코너를 통해 풀어내고 싶었습니다. 작가의 의도, 작업 과정, 지역에 대한 생각과 즐겨 찾는 장소 등을 직접 들을 기회를 마련한 거죠. 이를 통해 독자들은 만화를 단순히 소비하는 게 아니라, 창작자의 관점에서 작품과 도시를 재해석해 보는 경험을 할 수 있을 거예요.
《AROUND》 주제가 대구이니만큼, ‘대구’ 편 작업에서 근하 작가와의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가 있다면 들려주세요.
근하 작가가 첫 샘플 원고를 송고해 주었을 때, 인물들의 머리칼 한 올, 배경 속 풀 한 가닥마저 정성을 다해 그린 걸 보고서 깜짝 놀란 기억이 나요. 거기다 ‘달구벌 방랑’이라는 만화 제목에 대해, “달구벌은 우리 고장 ‘대구’ 지역을 이르던 말입니다.”라고 첨언해 주었는데, ‘우리 고장’이라는 단어가 마음에 와닿아서 한 번 더 감동받기도 했죠. 지역의 사생활 99의 만화는 중·단편이라 넓은 범위의 이야기를 다루기 어려운데요. 근하 작가는 수성못, 동성로, 대명동, 만촌동 등 대구를 동으로 분류해서 보다 넓은 시야로 이야기를 꾸려나갔어요. 저희에게도 뜻깊은 작업이었습니다.
도시가 주제지만, 주인공은 아니라는 생각을 했어요. 지역 예찬이나 정보를 부각하는 대신 스토리와 캐릭터 간의 관계가 중요하게 다뤄지는 듯해서요.
단순히 지역 예찬이나 정보 제공에 초점을 맞추면, 이야기가 딱딱해지거나 단순한 홍보물처럼 느껴지고 말 거예요. 반면에 스토리와 캐릭터 간의 관계를 중요하게 다룬다면, 지역의 특성과 분위기를 자연스레 드러내면서도 독자들에게 지역을 더 깊이 이해할 수 있는 바탕이 되어주겠죠. 저희는 지역에 깃든 다양한 이야기와 인물상을 그려나가는 이 프로젝트가 그 지역을 경험해 본 이들에게는 공감과 반가움을, 낯설게 느끼는 이들에게는 새로운 시각을 제공하는 작품이라 생각해요.
도시에는 밝은 면만 존재하지 않기에 이면이 보이기도 해요. 예를 들어 ‘부산’ 편의 쓰레기가 널린 바다, ‘군산’ 편의 사회적 약자들의 희생에 대한 기록처럼요.
맞습니다. ‘군산’ 편은 불친이 직접 쓰고 그렸어요. 처음에는 적산가옥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로맨스물을 기획했다면, 완성작은 대명동 화재 사건과 개복동 화재 사건을 통해 ‘성매매 특별법’이 제정된 것을 배경으로 삼았죠. 지역을 보여줄 때 무엇이 대표성이 되어야 할지에 대해 깊게 고민하고 공부하곤 합니다. 굳이 안 좋은 이야기를 들춰낸다며 아쉬움을 토로하는 분들도 있지만, 이왕이면 관심이 부족한 곳에 힘이 되고 싶어요. 다양한 목소리와 이야기를 발굴하고 표현할 수 있는 방향으로 나아가려고요.
잘 보이지 않아도 분명히 존재하는 세상을 위해 목소리를 내는 거네요. 만화라는 장르는 어떤 매력이 있나요?
콘텐츠 중에서 정보를 만화만큼 쉽고 재미있게 전달할 수 있는 매체는 거의 없다고 생각해요. 무엇보다도 칸과 칸 사이의 여백을 통해 그 사이를 상상할 수 있는 즐거움이 있지요. 상상을 하며 독자는 이야기에 더욱 몰입하게 되고, 어린아이부터 노년까지 모든 세대 독자들의 추억과 사랑을 한 몸에 받는답니다. 창작자의 시선에서는 작은 규모로 해낼 수 있다는 것도 큰 매력이에요. 굶어 죽지 않는 한(웃음), 타협하지 않아도 되는 자유도 높은 직업이랄까요.
이외에도 삐약삐약북스에서는 다양한 주제 아래 만화 시리즈를 선보이고 있어요. 간단히 소개해 주실래요?
지역의 사생활 99 이후로 한국의 인디 음악 신을 만화로 조명하는 ‘음악의 사생활 99’를 발표했고, 올해는 청소년들의 고민과 현실을 다룬 이야기 ‘대운동회 2024’를 제작 중입니다. 그간 여러 어려움이 있었지만 지역을 다룬 이야기를 만드는 일에 사명감이 생겨서 지역의 사생활 99 네 번째 시즌을 위한 시동도 걸고 있고요. 삐약삐약북스는 앞으로도 이야기가 필요한 곳이라면 관심을 갖고 만화를 그려 나갈 거예요.
오래전부터 대구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싶다고 생각했는지 궁금합니다.
지역성이 자연스럽게 드러나는 대사를 써보고 싶다는 욕구가 항상 있었어요. 예를 들어 “홍대에서 만나.”, “서울대 앞에서 봐.”처럼, 수도권에서 머무는 사람들에게 익숙한 대사가 나오는 작품들처럼요. 이번 작업을 하며 저한테 익숙한 공간을 자연스럽게 보여주는 연출을 할 수 있어 재밌었습니다.
작가님께 대구라는 지역은 어떤 곳인가요?
저는 20대 초·중반을 대구에서 보냈어요. 아마 앞으로도 그럴 것이고요. 그렇기 때문에 좋고 나쁜 기억이 대구와 동반해서 자주 떠올라요. 대구에서 만난 사람과 곳곳에서 겪은 특정한 기억들로 이 지역에 애증을 느낀다고 해야 할까요…. (후략)
달구벌은 과거 대구 지역을 이르던 말로 넓은 평야, 큰 마을(부락), 큰 성이라는 뜻이죠. 만화 제목을 ‘달구벌 방랑’이라 지은 계기가 있나요?
심혈을 기울여 만든 제목이 아니라서 민망합니다. 이번 책 제목에 ‘방랑’이라는 단어를 꼭 쓰고 싶었어요. 계속해서 이동하는 인물에게 어울리는 단어라고 생각했거든요. 그런데 ‘방랑’에 어울리는 단어가 몇 없는 거예요. ‘대구 방랑’, ‘대구를 방랑하는 자들’도 참 이상하고 어색하게 느껴졌고…. 그러다가 달구벌이 떠올랐고, 이 두 단어를 붙여서 제목을 짓게 되었습니다.
지역에서 만화가로 활동한다는 것, 그리고 개선되었으면 하는 점에 대해 듣고 싶어요.
온라인으로도 많은 일 처리가 가능한 시대이고 저는 방구석에서 거의 모든 작업을 소화합니다. 하지만 제가 물리적으로 ‘지역’에 위치해 있기 때문에 생기는 어떤 소외된 감각이 지속적으로 드는 건 어쩔 수 없는 것 같아요. 아무도 ‘지역’에 관심이 없어요. 수도권뿐만 아니라 지방에서도 다양한 작업을 하는 창작자가 존재합니다. (중략) 지방에서 이뤄지는 어떤 노력들이 있다는 걸 알아주셨으면 좋겠어요. 이 고민 또한 현재진행형이라, 어떻게 답해도 부족할 것 같습니다.
에디터 이명주
자료 제공 삐약삐약북스 사진 군산 마음한장